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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갓 된 엄마

우물 밖에는 언제나 사랑과 가시가 있다.

우물 안 개구리가 고슴도치가 된 사연

by 빛율

온몸이 가시로 찔리는 듯 고통스럽다.

내뱉어지지 않고 읽히는 말과 마음에 찔리고 베인다.


엄마로 살면서 복만 짓고 살아도 모자랄 것 같은데,

나와 내 아이를 지키겠다는 마음으로 만들어낸 가시로

나 또한 다른 이들을 찌르고 있음을 느낄 때,

내 안의 가시가 나를 향해 내가 찌른 배로 아프다.

고슴도치 어미가 되고 있는 걸까.


이제 곧 23개월이다.

아이와의 하루는 평화롭고 사랑스럽다.

아이는 이제 혼자 오래 놀 수 있고,

이따금이지만 "아빠가 추워 문 닫았어"와 같은 문장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못 알아듣는 말로 한참을 옹알거릴 때도 많지만 말이다.

밤수유를 끊고서 잠도 훨씬 잘 자고

종달새처럼 대여섯 시만 깨던 아이가 8시쯤에서야 느지막이 하루를 열기 시작했다.

물론 대여섯 시에 한 번은 깨어 울며 엄마 젖을 찾긴 하지만 말이다.


아이는 스스로 바지를 입고자 하고,

하다 안되면 자기 팔에 여러 개의 바지를 끼며 헤헤 장난으로 마무리한다.

스스로 소매를 걷고 손을 씻고, 혼자 계단을 오르내리고,

신발을 이따금 혼자 벗을 수 있다.


내가 내미는 숟갈은 한사코 거부하던 아기는 어디로 갔을까?

일찍이 자기 주도이유식을 한 게 무색할 정도로 요샌 자꾸 먹여달라고 한다.

내가 내가 하며 스스로 숟가락질을 하려는 마음보다는

자기가 먹을 때 흘리고 묻는 게 싫고 귀찮은 마음이 더 많아진 것 같아서

나는 괜히 내 밥을 먼저 열심히 먹곤 한다.

어린이집에서 먹여주고 해주는 데 익숙해져서일까.

선생님께서 한창 자기가 하려던 마음이 지나갈 때라고 하시니 믿고 기다려 본다.


내가 책을 읽어주려 하면 도망가버리곤 하던 우리 아가는 어디로 갔을까?

요즘 아이는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있다.

책을 계속 가져와 읽어달라고 하고, 자기 전에 얼마나 많은 책을 가지고 노는지 모른다.

영어든 한글이든 책에 나온 그림과 사진이

아이에겐 세상으로 향하는 문이고, 새로운 앎이겠지.

그냥 읽어주기보다 나도 의식적으로 글씨를 안 보고

그림을 보고 떠오르는 것들로 대화를 나눠보려 하고 있다.

여러 번 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내가 앵무새 같이 지루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얼마나 지루했을까?


물감놀이를 시켜주려 하니 무서운 듯 나가려 하던 그 아가는 어디로 갔나?

요즘 크레용이든 물감이든 펜이든 두려움 없이 뭐든 그리려는 아이.

병아리처럼 입을 모으고 집중하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사장님처럼 배를 내밀고 안게 되던 소파 대신

바르게 앉을 수 있는 책걸상을 들였다.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제라도 바른 자세로 앉기 시작해서 다행이다.


매일 맘스 다이어리에 아가의 변화를 기록하다가 한참 멈추었다.

적을 게 없어서가 아니었다.

너무 많아서였다.

매일 새롭게 하는 말이나 행동이 어찌나 많은지

아이의 성장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고

그 순간에 좀 더 집중하고 싶었다.


6개월 즈음 이유식을 시작하고부터 요리를 시작했던 엄마는

이제 17개월이 지나서야 조금씩 제 손으로 요리를 하는 게 아주 어색하지는 않게 되었고,

재료를 다듬고 손질하는 데 있던 공포가 아주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아이는 스스로 닭봉을 잡아 뼈를 발라 먹고

외식할 때는 스스로 음식을 잘도 먹는다.

엄마 나와서라도 잘 먹으라는 듯이.


엄마가 계속 일하고 있으면 "그만해. 앉아. 먹어. 옳지~"하며 엄마를 챙겨주는

이 놀랍도록 나를 키우고 있는 아기에게

나는 자주 사랑과 대견함, 미안함을 표현하고 있다.

엄마의 실수나 세심함의 부족으로 아프거나 다치게 할 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 이야기하면

그 깊은 눈으로 엄마 마음을 다 알겠다는 듯이, "응"하며 내 사과를 받아주는 걸 너머

내 아픈 마음까지 안아준다.


아이와 가족을 위한 요리와 정리를 위한 섬세한 집안일, 아이가 관심 있어 하는 그림 그리기를 도와줄 방법 등을 공부하고 찾는 데 집중했다면 좋았을 두 달여간, 나는 영어 공동 육아 모임을 짓고 다듬어가는데 온 마음과 정신을 쏟고 있었다. 목표했던 단순화와 정리, 가족 돌봄과 경제, 요리 공부를 위한 시간을 거의 갖지 못했다.


하지만 덕분에 계속되는 우울감과 무기력함에서 많이 벗어나 활기와 에너지, 생산성, 자기 효능감을 되찾아

우물 안 개구리에서 연못 속 개구리가 된 듯한 시간들이었다.

육아서를 읽을수록 아이 아빠와는 별개로 나만의 성을 쌓아나가는 기분이었다면,

주말에 아이 아빠와 함께하는 영어 육아 모임을 시작하고 '영어'라는 언어를 도구로

함께 같은 책을 아이에게 읽어주고, 같은 노래를 불러주고, 서투르지만 영어로 말도 걸어주면서

같은 경험과 앎을 공유하고 함께 추억을 쌓아나갈 수 있어서 외로움이 덜했다.


많은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나면서도

내 중심을 잘 잡고 긍정적인 영향만을 주고받는 게 어디 생각처럼 쉬울까.

자주 휘둘리고, 원치 않는 걸 배워오기도 하고, 부정적인 감정이 오가기도 한다.

그래서 혼자만의 시간이 더 소중해졌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흘려보내고,

더 많은 복을 짓고, 더 많이 나누고, 원칙을 지키고, 존재를 존중하며,

좋은 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지.


너무 모임에 몰입하는 나를 걱정하는 아이 아빠와는 별개로

아이의 놀라운 언어적인 도약과 가족문화의 긍정적인 변화,

배움과 영감을 주는 좋은 사람들과의 연결,

한국어와 영어를 통틀어 내가 아이에게 건네는 말의 질적인 성장,

그런 것들에 더 집중하기로 한다.


애썼다. 참 애쓰고 있다.

고맙다.

더 많은 사랑과 감사에 집중해야지.

곁의 좋은 이들과 나누는 에너지에 더 집중해야지.

사랑이어야지.


엄마니까, 나는 여리니까,

내 아이는 더 연약하니까,

가시를 만들어 지킬 수밖에 없다.

생존 본능이다.

너무 자책하지 말아. 너는 너를 먼저 지켜야 해.

되려 네가 찔린 상처에 더 오래 아파하렴.

네 가족을 지키지 못했던 시간들에 더 미안해하렴.

네가 온전히 회복하고

너를 가시 없이도 지킬 수 있어야

관계의 건강한 거리를 지킬 수 있어.

보기만 해도 무섭지만 온순한 초식동물로 살고자 한다면 말이야.


우물 밖에는 언제나 사랑과 가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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