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눈에 보기에도 귀티가 넘치는 차림의 50대 여성 손님이 갑자기 찾아왔다. 나에게 3년 동안 먹을 쿠키를 주문했다.
우연히 먹었던 우리 가게 쿠키가 너무 맛있어서 찾아오게 됐다며, 미리 선금을 치를 테니 집으로 매주 다른 맛의 쿠키를 배달해 달라고 했다. 쿠키를 잘 만든다는 걸 알고는 왔으나 계약한 3년 간 쿠키의 퀄리티가 떨어지거나 제시간에 배달되지 않으면 공개적으로 컴플레인을 걸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협박 섞인 주문에 나는 주저했다.
하지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동업하던 친구는 옅은 미소를 띠더니 선뜻 그러자고 했다.
손님이 3년 간의 쿠키 대금을 모두 치르고 돌아간 뒤 나는 어떻게 매주 다른 맛의 쿠키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했다. 머리를 싸매고 시름하던 내게 친구는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더니 묵묵하게 당장 이번 주에 그녀가 특별히 요청했던 핼러윈 호박 쿠키를 구웠다.
다음 주에는 피넛 쿠키를, 그다음 주에는 무화과 쿠키를, 그다음 주에는 머랭 쿠키를 구워 배달했다. 맛이 별로라는 평은 다행히 없었지만 다음은 무슨 쿠키를 구워야 하나 늘 걱정이었다.
그러고는 그다음 주 모카 쿠키를 위한 재료를 주문하려고 했을 때 그 손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갑자기 더 이상 쿠키를 배달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워 쿠키 맛이 별로였는지 물었다.
손님은 사실 2년 전부터 병을 앓고 있었다고 했다. 일주일 전부터 병세가 악화돼 주치의가 쿠키는 물론 기름진 음식, 밀가루는 모조리 피해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는 것이다.
내가 한사코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상황 때문이니 이미 지불한 대금을 환불받지 않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친구에게 이 나쁜 소식을 전했다. 친구는 내 말을 가만히 듣고는 놀란 기색 없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 손님은 애초에 쿠키를 먹어서는 안 됐어. 오른손은 떨고 있었고, 고급스러운 새틴 블라우스와는 대조적으로 입술은 바짝 마르고 눈 밑은 푹 꺼져있었거든."
나는 내가 만든 쿠키가 손님을 더 아프게 하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의기소침해졌다.
"난 몰랐어. 그럼 말 좀 해주지. 애초에 계약을 하지 않는 게 그녀에게 좋지 않았을까?"
"아니. 그 계약을 네가 고사했다면 과연 그녀가 덜 아팠을까? 더 행복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죄책감 따위 가질 필요 없어.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쿠키를 어떻게 해서든 먹었을 테니까 말이야. 그때 그 손님은 너의 쿠키를 3년이란 시간 동안 먹고 싶었던 게 분명해.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에 좋은 쪽으로 그녀가 배팅을 한 거야. 3년 동안은 쿠키를 먹어도 자신의 건강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내가 만든 쿠키는 손님에게 잠깐의 행복이 되어 주었을까?
톨스토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세몬과 미하엘을 생각하며 오마주 하여 쓴 글이다.
나도 모르게 젊음이 있는 지금의 내가 아닌 늙고 병든 은퇴 후를 걱정할 때마다 이 소설을 상기시킨다.
그녀가 아픔 속에서도 달콤한 쿠키를 먹었던 그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늙고 병약해져도 웃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달콤한 지금을 만들고 싶다.
열심히 일하고, 좋아하는 곳을 여행하고, 궁금한 것들을 배우는 지금이 미래의 내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