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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유영 May 24. 2022

성선설 뿌시기

나라면 그렇지 않았을 거니까..?

나는 언제부터 성선설을 근간으로 한 인간이 되었을까.


'이것마저 거짓말이겠어?'

'설마 저 눈물이 거짓이겠어?'

'현실이 힘들어 뱉은 말일 거야.'

'본심은 그렇지 않겠지.'

'세상에 남을 해하는 것이 당연한 사람은 없을 거야.'


이미 상처를 줬던 사람을 끝까지 비호하고 있는 나를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믿었던 근거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라면 그렇지 않았을 거니까.


나였다면 나를 믿어준 사람에게 칼날처럼 매서운 말을 뱉지 못한다.

나였다면 오로지 나를 변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꾸며내지 못한다.

나였다면 누군가를 나의 필요에 의해 가져다 쓰고 돌아서지 못한다.

그것이 비록 1초 뒤 등을 돌리면 남남이 될 사이라 해도 말이다.


도덕에 대한 신념

정의에 대한 경외

법에 대한 신의


성경 말씀에 따라 착하게 살아야만 지옥가지 않는다는 어느 종교 신자의 외침과

전생에 지은 선악에 따라 현재의 행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윤회(輪廻)를 믿는 나의 모습은 비슷하다.


종교 교리도, 이솝우화도, 전래동화도, 옛 격언도 동서고금 막론하고 선(善)을 강조했기에

나는 '우리는 바르고 진솔하게 살아야 한다'는 진리를 모두가 함께 공유하는 것이라 믿었다.


그럼에도 왜 우리 삶에 배신자, 변절자, 범죄자는 존재하는 걸까.


거리낌 없이 회사 돈 수십억 원을 횡령한 회사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약해진 상대의 마음을 이용하는 사기꾼,

타인을 감정 쓰레기통 삼아 괴롭히는 동료나 친구,

본능만을 우선하여 배우자의 믿음을 져버리는 불륜 남녀들.


이들은 나 같은 사람이 어우러져 살아가기에 버거운 존재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어떻게 그럴 수 있지?'였다.


당장 우리가 '너'이고 '나'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면 어떻게 죄책감과 수치심 없이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었다.


가장 가까운 존재로 이런 사람을 마주했다.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배신의 고통은 사람을 너무 믿어버린 죄에 대한 독한 벌로 나를 괴롭혔다.


좋아하던 노래를 몇 달간이나 듣지 못했고,

혼자서는 밥도 넘어가지 않아 8kg가 빠졌다.

꾹 닫은 입으로 마음에 화병이 들어 새벽에 깨기를 반복하다 정신과를 다녔다.


석 달이 지났을까.

온전히 스스로를 위해 내가 만든 선의 기준을 지우기로 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미 일어난 상황을 모두 이해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란 선의 가치와 선 지키지 않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선이란 누군가에게는 '남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범위 내에서의 모든 것'이 될 수도,

오롯이 '본인'을 위한 모든 것이 될 수도 있다.


선의 범위가 '내 사람'이 될 수도, '사람'이 될 수도, '동물'이 될 수도 있다.


때로는 '가끔은'은 용인될 수 있는 통성의 영역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나를 배신했던 '그 사람'은 내가 가진 선의 가장 밑바닥조차 닿지 못한 사람이었기에 끝내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인간적으로는 이해라도 된다고 하면 그건 자신이 가진 선의 마지노선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선의 기준을 가진 이들을 어찌어찌 차이를 인정하며 살아왔던 것일 뿐 우리는 선의 기준이 다른 사람을 매 순간 마주치며 살아간다.


고로 내게 상처를 주는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면 우로든 좌로든 돌아가야 한다.

같이 갈 수 없는 사람을 움켜쥐고 오히려 나를 이해시키려는 행동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아야 한다.

상대방은 일말의 관심도 없는 되지도 않는 원인을 찾느라 마음만 병든다.


인간은 태생부터 선을 알리가 없고,

모두가 같은 선의 기준을 가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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