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3봉 무혈점령 등반 일기
나의 첫 상고대를 만난 날
산은 가장 높은 정상 외에도 제각기 높이를 자랑하는 여러 봉오리가 모여 하나를 이룬다.
그 산봉우리를 점 삼아 오랜 자연의 굴곡을 삐뚤빼뚤 능선으로 이으면 웅장한 산줄기가 된다.
충남 서산의 가야산에는 옥양봉, 석문봉, 가야봉 세 개의 봉우리를 도는 3봉 코스가 있다.
가장 높은 가야봉이 해발고도 678m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인데, 세 개의 봉우리를 모두 찍는 3봉 코스로 등반하면 약 4~5시간 정도 소요된다.
어느 1월, 나는 적의 진지를 탈환하는 전사의 기백으로 이 코스에 도전했다.
주차장에서 한적한 마을 길을 둘레둘레 살피며 걷다 보면 곧 가야봉 직선 코스와 옥양봉, 석문봉으로 가는 방향, 두 개의 갈래길이 나온다.
옥양봉으로 시작해 석문봉을 지나 가야봉으로 가는 3봉 코스를 위해 오른쪽으로 발길을 뗐다.
등산로 초입은 겨울 싸라기눈에 축축하게 젖은 낙엽길이 완만하게 이어졌다.
넓고 깨끗한 숲길이라 트레킹 코스로 딱이구나 싶던 찰나에 돌계단이 시작되면서 슬슬 숨이 가쁘다.
1시간가량 능선이 거의 없이 돌계단과 경사가 심한 나무 계단이 반복된다.
이때부터 생각이란 없다. 그저 두 다리를 위로, 계속 위로 딛기만 할 뿐.
지쳐가는 등산객을 위로하듯 옥양봉에 다다르기 전 거대한 쉬흔길바위를 먼저 만났다.
예부터 큰 바위를 50길바위라고 했다는데, 날이 좋았으면 서산 마을이 다 보이는 좋은 뷰포인트다.
이날은 아쉽게도 정상에 다가갈수록 날씨가 더 차고 험해져 경치는커녕 뿌연 허공만 보였다.
인생은 제로섬게임.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고 하지 않던가.
비록 멀리 보는 비경은 잃었지만 고도가 높아지면서 서리 낀 설산의 신비로운 근경이 펼쳐졌다.
찬 겨울을 버티던 나뭇가지와 잎, 땅에 자라던 여린 풀에도 0.5cm 정도의 서리가 쌓였다.
그 속을 걸으니 겨울왕국 속 엘사가 된 것만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내가 보았던 이날의 풍경을 '상고대'라고 한단다.
나무나 풀에 서리가 쌓인 이 상고대는 눈이 쌓이는 눈꽃과는 다르다.
영하 6도 이하의 기온에 90% 이상의 습도, 바람 세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만 만들어지기 때문에 산우들 사이에서는 상고대가 펼쳐진 산을 만나면 운이 좋았다고도 말한다.
눈을 떼기 힘든 풍경을 만끽하며 걷다 보니 곧 옥양봉에 닿았다.
여느 때 같았다면 정상석을 보자마자 신이 났을 테지만 갈 길이 멀다.
사진 몇 장을 찍고 나머지 두 개의 봉우리를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돌탑이 인상적인 석문봉을 지나 가야봉으로 가는 길은 돌골짜기가 많아 거칠고 위험하다.
소낙눈과 바람이 매서웠던 이날은 특히 바위틈에 얼음이 많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실족하기 딱이었다. 흥미진진하고 모험적인 길이 분명하지만 그 위험천만함에 내심 이 길을 혼자 걷는 이가 없길 바랐다.
눈앞의 능선에 하늘만 보이는 것은 정상이 곧이라는 의미다.
높은 계단 끝에 가야봉 정상에 올랐다.
발아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날씨였지만 지나온 백색의 풍경과 거친 길에 충분히 의미가 있다.
그 사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상고대가 폈다. 그마저도 대자연의 마법이었다.
나는 이날 3봉을 무혈점령했다.
산봉우리를 등반하는 것은 평준한 길을 걷는 것과 다르다.
하나의 봉우리에서 다른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조금씩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내리막길을 한참 걸으며 그간 올라왔던 수고를 되새기게 만들기도 하고, 내려왔던 걸음들을 수포로 만들 만큼 더 가파른 오르막을 마주하기도 한다.
내가 등산에 푹 빠지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는 등산을 곧잘 인생에 빗대지 않던가.
하나의 실패, 하나의 성공. 점처럼 세밀한 사건에 일희일비하는 삶이 얼마나 무용한지를 깨닫게 하니까.
그냥 나는 늘 거기에 있는 우뚝 선 봉우리를 오르는 기쁨에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