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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래유영 Feb 09. 2023

어른의 책임

그날 1인 가장이 차려낸 밥상

평소 안 하던 짓을 하면 사고가 난다.

어쩐 일로 지글지글 스팸, 두부, 김치를 한대 넣고 조린 집밥을 먹고 싶더라.


김치가 8할인 조림이 솜씨에 비해 과분할 정도로 제 모습과 맛을 갖춰갈 때부터 나는 신이 났다.

빨리 주변을 정리하고 밥을 먹을 생각에 손이 바빠졌다.


사고는 눈앞에 먹는 행복을 마주한 이 순간에 발생했다. 반 토막 남은 스팸을 유리로 된 반찬그릇에 넣으려는 순간 아차, 손에서 놓쳐버렸다.

바닥에는 그 튼튼하다는 락앤락 반찬통이 산산조각 나서 뒹굴고 있고, 가스레인지 위에는 조림이 여지없이 자작자작 끓고 있는 오묘한 순간이다.


3초가량의 정적-

이후 나는 그 어떤 감정적 동요나 대사 없이 가스레인지 불부터 끄고 주저앉아 큰 조각부터 하나하나 깨진 그릇을 주어 담았다.

이 사고를 수습하는 데 딱 5분이 걸렸다.

그리곤 잠깐 식어버린 조림을 다시 데우는 동안 설거지를 치워 버린 뒤 비로소 숟가락을 들었다.


맛깔나는 스팸두부김치조림을 먹으며 6살 무렵의 나를 떠올렸다.

삼촌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들고 신이 나서 방방 뛰다가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다.

옷에 아이스크림이 스친 자국과 바닥에 철퍼덕 퍼질러진 아이스크림을 보자마자 나는 엉엉 울어댔다.


울음 속에는 잃어버린 아이스크림에 대한 허무함,

얼룩진 옷 때문에 엄마에게 혼날 것이란 두려움, 흘린 아이스크림을 어떻게 치워야 할지 당황스러움,

또 누군가에게 돌릴 수 없어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원망 외에도 수많은 고민과 감정들이 있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아이.

무력했던 아이는 이후로도 30년 가까운 세월동안 조급하고 덤벙대어 무수히 많은 것들을 깨고 부숴왔다.

셀프사고 뒷처리로 유구한 역사를 써온 내 머릿속에는 '아, 조림이 더 식으면 안 되는데. 빨리 먹고 싶다'는 생각만 가득했을 뿐 어질러진 락앤락 파편 따위 당황스러운 일도, 거슬리는 문제도 아니었다.


30대의 나에게 깨진 유리 파편처럼 혼자서 수습할 수 있는 실수나 사건은 

그저 완성작을 만들어가는 과정 중 하나일 뿐이다.

실수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스스로를 자책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는 것만큼 무의미한 것이 없다.

어차피 그 일은 누군가가 대신해주지 않으며 결국 내가 해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존 목표의 근사치로 해낼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언제나 있었다.


책임이 커지면서 어른이 되는 것인지,

어른이 돼서 책임이 커지는 건지 모르겠으나

어떤 문제가 생겨도 결국 해내야 하는 것들이 바로 어른의 책임이다.


깨진 유리 파편을 다 수습하고 나서야 먹었던 이날의 끼니는

회사에서도, 코딱지만 한 집구석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한 몸 건사할 책임이 있는 1인 가장이 차려낸 밥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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