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인 복희가 가녀장 슬아 같이 살아갈 날이 오기도할까

가녀장의 시대 - 이슬아 소설

by 여행하듯 살고

아끼는 동생이 집에 놀러 와서 자기가 읽던 책을 추천해 주었다. 이슬아의 소설 가녀장의 시대. 젊은 여성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한다.


잘 나가는 이십 대 작가가 엄마 아빠를 고용해서 작은 출판사를 운영해 나가는 중에 생기는 작은 에피소드들을 모아 놓은 소설이다. 요즘 힙한 작가답게 시트콤처럼 유쾌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출판사 사무실이 집 안에 있고 직원들도 슬아와 엄마 복희, 아빠 웅이가 전부라서 직장과 가정의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슬아는 글 쓰는 고양이고, 복희와 웅이는 주로 그 고양이를 위한 노동을 담당하는 집사이다. 복희는 정규직으로 고용되어서 먹는 것을 책임지고, 출판사 이메일에 답장을 쓰기도 한다. 웅이는 비정규직으로 주로 청소를 맡고 있다.


복희와 웅이는 다른 수입원이 없기 때문에 딸인 슬아가 가장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익힐 알고 있던 보통의 가장은 아빠들이기 때문에 가부장제도라고 불렸는데 슬아네는 딸이 가장이니, 가녀장의 시대를 살고 있는 셈이다.




마음은 슬아처럼 살고 싶지만 현실은 복희 비슷한, 슬아와 복희 그 중간 어딘가를 살아가고 있는 나는 단숨에 그 책을 읽었다. 젊은 작가의 재능에 감탄하면서. '부엌에 영광이 흐르는가'라는 챕터 중 복희가 짓는 밥이랑 슬아가 쓰는 글이랑 연결 짓는 대목에서 아, 이 친구 천재구나 싶었다.


매일 세 명이 먹고 없애버릴 밥을 짓는 복희의 가사 노동은 가벼이 여겨질 때가 많았다. 고양이 슬아는 밥이 다 되었다는 말에 좀처럼 빨리 움직이지 않는다. 그 식사 준비를 위해 슬아는 정당한 대가를 지불했으니 따뜻할 때 먹으나 식은 뒤에 먹으나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슬아가 무언가를 깨닫는다. 직원 이상의 관계이기에 그랬을까?


슬아는 곧 복희가 짓는 밥에 대해, 그리고 그 밥을 소비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리고는 복희가 요리를 만들어내듯 자기가 만들어내는 글과 그를 소비하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한번 쓰면 적어도 몇십 명, 몇 백 명, 많게는 수천 명 이상에게 가 닿고, 먹어 소화될 글을 생각하며 복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


그래서 복희에게 요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주인공을 소재로 한 소설을 추천해 준다. 복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자기 전문 분야인 요리를 통해 풀어내는 소설에 푹 빠져버린다.




수빈이의 방문과 그 책의 만남이 나에게는 모두 선물이다. 원래 참 아꼈는데 책을 추천하는 친구가 되었다니, 맙소사. 정말 귀하다. 나도 신나서 책과 여러 창작물들을 소개해준다. 파친코와 이민진, 그레타 거윅의 영화 Little Women, Never Enough 책 등등.


어제 오후 수빈이는 시애틀로 떠났고, 나도 일상으로 돌아왔다. 함께 있는 5일 동안 잠시 떠나 있었던 현실에 대한 염려들이 다시 몰려온다. 밀린 일들을 처리하고, 아이들을 여기저기 라이드 해주고 가족의 밥을 짓는다.


그러면서도 읽었던 책 생각을 떨쳐내기 힘들다. 슬아와 복희 사이의 어디선가 방황하는 내 모습을 발견하면서. 슬아처럼 살고 싶지만 아직 그런 준비는 안 되어있어 조금 슬퍼지려 한다. 그래도 복희의 것을 닮은 내 삶을 충실히 살아낸다.


허리케인 노스쿨이라서 아이들은 이틀 동안 학교에 안 간다. 덕분에 도시락 싸 보내면 끝이었던 식사준비를 늘어지게 한다. 요리라도 해야 심란한 마음을 잠시 합법적으로 모른 척할 수 있으니까.


냉장고에 재어 놓은 소고기가 있고, 애호박, 콩나물, 무도 있다. 그래 비빔밥을 만들자. 비빔밥을 한번 만들면 몇 끼니를 맛있고 든든하게 먹을 수가 있다. 찬장 구석엔 항상 건나물이 대기하고 있다. 요리를 하는 동안에는 잡생각이 없어진다.


심지어 가벼운 노동으로 건강한 끼니가 완성된다. 잠깐... 그런데 내가 자주 까먹는 사실을 반시간도 안 되어 떠올리고 약간의 후회를 한다. 비빔밥은 사실 가벼운 노동으로 끝나지 않는다.


애호박을 썰고, 무를 채치고 무치고, 표고버섯 불려서 썰고, 건나물을 불린 후 삶아서 다시 불려야 한다. 콩나물이 빠지면 비빔밥이 아닌 것 같으니 그것도 찌고 무쳐야 한다. 이미 재어 놓은 고기가 있다고 해도 그걸 굽고, 계란도 부쳐야 한다.


그 모든 과정이 마쳐갈 때쯤엔 내가 왜 아무도 시키지 않는 이런 노동을 하는 걸까 하고 후회한 적이 많다.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었는데. 그러다가도 혹시 가족들이 비빔밥을 맛있게 먹어주면 노동의 고됨은 금세 더 없는 보람으로 바뀐다.


그런데 가끔은 가족들이 비빔밥을 그다지 반기지 않을 때도 있다. 또 비빔밥이야? 그럴 땐 음식 냄새를 내내 맡고도 없어지지 않는 내 식욕에, 허무한 마음까지 더해져 나만 꾸역꾸역 더 많이 먹게 된다. 항상 다이어트 중이라는 사실이 무색하게.


그 사실이 표고버섯이랑 건나물을 물에 담그자마자 떠올라서 그냥 다음 끼니에 하자고 스스로에게 명령한 후에 꺼내 놓은 재료들을 다시 냉장고에 쑤셔 넣는다. 소파에 가서 눕는다. 아직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엄마 "복희"가 떠오른다. 나는 복희처럼 살고 있는데, 이슬아처럼 글을 쓰면서 인정을 받고 싶다. 당당하게 나를 표현하면서 살고 싶다. 타인들의 시선 속에 나를 가두지 않고. 마감의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원고료와 마드레날린이 충분히 치료해 줄 테니까.




그 책 속의 복희는 슬아처럼 작가 또는 어떤 전문적인 일을 하며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 같은 건 먹어본 적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진짜 그랬을까? 여러 종류의 블루칼라 노동자로 살아가면서, 노동 후의 넷플릭스로 만족한 걸까?


별생각 없는 듯이 항상 잘 웃고 넉넉하게 맛난 밥을 차려주는 복희는 다른 선택에 대한 미련이 없는 걸까, 꿈꿔본 적도 없는 걸까, 아니면 한 때 꿈을 꿔 보았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에서 그걸 전혀 잊고 살았을까.


요즘의 나는 꿈을 계속 꾸지만 꿈을 현실로 만들기 어려우니까, 단순히 현실에 만족하면서 순간의 행복이라도 잔뜩 누리면서 살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차라리 그냥 복희 같은 모습으로 잘 웃고 많은 순간 행복하다고 감사하면서.


그런데 그러기엔 나한테 너무 잡생각이 많은 게 문제이다. 원하지 않아도 생각의 생각의 꼬리가 물고 끌려온다. 타고나길 넉넉한 복희 같지 않고 까칠한 슬아에 가깝게 태어났나 보다.




어제 얼핏 유튜브에서 이슬아가 얼마 전 이훤이라는 사람과 결혼했다는 걸 봤다. 이슬아만큼 이나 독특한 사람으로 보였는데 시인이라고 한다. 그냥 겉멋만 많이 든 친구처럼 보였고 별 관심 없이 넘겼었다.


그런데 음식 만들기를 미뤄 놓고 소파에 누워 유튜브를 켜니 이슬아 이훤 결혼식 비디오가 뜨는데, 한번 보고 싶어졌다. 역시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내 생각을 다 읽는 듯하다.


그 비디오 속의 이슬아는 가녀장의 시대에서 보던 모습 그대로이다. 현실의 일간 이슬아는 사실 더 따뜻하고 웃음이 많아 보였다. 그리고 복희 모습도 보였다. 훌라를 추는 복희는 책에서 나온 듯해 보였다.


관중석에서 숨기지 못하고 드러나는 팬심, 즉 복희의 인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 나도 복희한테 무한 매력을 느꼈었지. 넉넉하고 유쾌하고 다 받아 줄 것 같은 이모 같은 복희는 상상했던 것보다 젊고 예뻤다.


시아버지가 축가를 부르고, 친정 엄마 복희가 축무를 하고, 친구들이 끊임없이 편지를 읽는 그 결혼식이 참 따뜻하다. 가녀장의 시대 에필로그를 비디오로 읽는 것 같았다. 책에서 느낀 분위기 그대로다.


가수 장기하가 부케를 받은 게 뭐 그리 대단해 보이지도 않게, 결혼식의 모든 이벤트들이 특별하고 진정성이 가득해 보였다. 어떤 픽션 드라마를 보고 있는 듯하기도 했다. 친구들의 편지 하나하나는 완성된 작품이다. 끼리끼리라는 말은 진리구나.


훈훈한 장면을 보니 나도 슬아처럼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오늘을 복희로 살아가는 내가 언젠가는 슬아처럼 글을 쓰며 인정받을 수도 있을까?


오늘도 나는 가사 노동을 잠시 멈추어 놓고,

간단한 글을 쓰면서

일간 이슬아 같이 살아갈 날이 오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