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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May 13. 2023

내 발등 위엔 할머니가 있다


쌍둥이 동생이 태어나고 여섯 살까지 외가에 살았다. 노아의 방주처럼 커다란 배가 만들어지던 거제 앞바다, 조선소 옆이 나의 외가였다. 집으로 돌아오던 날부터 매일 방학을 기다렸다. 엄마 아빠보다 할머니가 더 좋았다. 죽고 못사는 친구가 있었던 것도,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는데 외가에 대한 향수는 꽤 오래갔다.


거제에 있을 때 내 유일한 친구는 할머니였다. 동네 친구들은 나와 놀아주지 않았다. 할머니는 밭에 일하러 가기 전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으셨다. 수박 한 덩어리를 쟁반 가득 잘라주시곤 은희랑 사이좋게 놀라며 몇 번이나 당부하셨다. 하지만 아이들은 수박만 먹고 가버렸다. 


웬일로 친구들이 놀자고 한 날이었다. 구멍가게 앞에 데리고 가더니 과자를 갖고 오라고 했다. 훔치는 게 아니라 갖고 오는 거라고, 우리도 다 해봤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같이 놀고 싶은 마음에 한참을 머뭇거리다 새우깡 한 봉지를 들고나왔다. 친구들과 노는 시간은 새우깡 한 봉지, 딱 그만큼이었다. 숨바꼭질하다가 재래식 화장실에 숨었을 땐 밖에서 문을 잠그고 가버려서 갇힌 적도 있었다. 밭에서 돌아온 할머니가 많이 속상해하셨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친구들의 발길이 뚝 끊겼는데 내 왼발에 생긴 화상 흉터 때문이었다. 


외가의 부엌은 부뚜막이 있는 재래식 부엌이었다. 미닫이문 하나로 작은 방과 연결돼 있어 할머니가 밥상을 차릴 때면 늘 방문에 걸터앉아 구경하곤 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할머니, 가스레인지 위에서 팔팔 끓고 있는 콩나물국, 부엌의 풍경 보는 것이 좋았다. 국이 끓어오르자 할머니는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디딤돌 위에 냄비를 내려두셨다. 그때 내가 왜 그랬는지 부엌으로 내려가려다 아직 끓고 있는 콩나물국에 왼발을 담가버렸다. 발을 빼지도 못하고 자지러지게 울었다. 놀란 할머니가 나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나를 업고 뛰기 시작하셨다.


마을에서도 가장 외딴 곳에 있던 외가는 보건소까지 걸어서 30분 거리였다. 버스도 없었다. 내 발은 금세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풍선껌처럼 발 앞뒤가 다 부풀었다. 그날 쉬지 않고 뛰던 할머니 등이 내 발만큼 뜨거웠다. 발이 나을 때까지 나를 업고 매일 그 먼 길을 다니셨다. 언덕도, 계단도 많았는데 한 번도 쉬지 않으셨다. 내 발을 본 친구들은 징그럽고 이상하다며 더는 나와 놀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할머니는 물집과 진물로 징그러운 내 발에 할아버지의 양말을 신겨주셨다. 


친구들이 놀아주지 않아도 거제도가 참 좋았다. 할머니 옆에서 고구마줄기 다듬고 멸치 똥 떼는 일이 즐거웠다. 바닷가를 헤집고 다니며 소꿉놀이 장난감을 줍는 것도 신났었다. 종종 꽤 쓸 만한 것을 주워 와서 할머니의 살림이 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더 좋은 걸 주워 와야지 하는 마음에 얼른 내일이 왔으면 했다. 시내로 장 보러 나가는 날은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었다. 길가에 핀 들꽃을 쓰다듬으며, 엄마 아빠가 다녔던 아담한 중학교를 지나며, 마을에 하나밖에 없던 문구점을 구경하며 할머니 손잡고 걷는 그 시간이 행복했다. 진돗개 사납게 컹컹 짖어도 무섭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장에서 사 먹는 우뭇가사리 콩물 생각에 전날부터 가슴이 떨렸다. 할머니는 내 유년 시절의 전부였다. 


그렇게 좋아하던 할머니였는데 사는 게 바빠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다. 십 년 정도 지나서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폐암에 가벼운 치매까지 와서 누워계신 모습으로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나도 쉽게 업을 수 있을 만큼 작고 약했다. 이 조그만 등에 업혀 다녔구나 싶어 할머니를 한참 쳐다봤다. 


엄마가 흰죽을 끓여 오셨다. “할머니” 하고 몸을 살짝 흔들었더니 눈을 뜨자마자 나를 보고 웃으셨다. 내 입에 수없이 맛있는 것 넣어주던 할머니 입에 겨우 흰죽 한 그릇 먹여드렸다.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 때마다 말없이 웃으시던 할머니.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 때문인지 나를 보며 웃던 미소 때문인지 할머니 모습이 너무나 곱고 환했다. 죽 한 그릇을 비울 동안 그렇게 미소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그 환한 얼굴을 마지막으로 할머니와 이별했다. 내 발에 흔적을 두고 떠나셨다. 외가도 할머니도 이제 없지만 내 발등 위엔 여전히 할머니가 남아있다.




아무도 없는 외가 > 내가 살 땐 없었던 버스 정류장 > 새우깡 훔쳤던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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