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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Sep 30. 2022

아빠가 사 온 엄마의 돌 반지


나는 아빠가 참 재밌다. 엄마는 평생 철이 안 든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시지만. 내게 화를 낸 적이 있었나. 떠올려보니 초등학교 1학년 때 산수를 못해서 머리 쥐어박힌 것 말고는 기억나지 않는다. 경상도 사나이지만 참 다정하시다. 아빠랑 치과 가면 치료받기 싫다고 얼굴 한번 찡그리면 “죄송합니다. 다음에 올게요” 하고 그냥 나올 수 있었다. 아빠는 그때도 화를 내지 않았다. 산수 못할 땐 화를 내셨다. 그래서 내가 수포자 -수학을 포기한 이들- 가 되었을지도.


고등학생 때였다.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을 때였다. 아빠는 엄마 생일이라고 내 얼굴 네 개는 합친 것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사 오셨다. 연애 땐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아빠 손에 꽃다발이 들렸던 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꽃집에 들러서 엄마를 위해 어린나무 같은 꽃다발을 샀을 때 아빠 마음이 어땠을까. 안 그래도 빨랐던 아빠의 걸음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더 빨랐겠지.


“아나, 생일 축하한다.”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온 아빠가 엄마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내가 받는 것도 아닌데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뭐 하려고 이런걸 사왔노. 그냥 돈으로 주지.”

“.....”

“마. 대따. 때리 치아뿌라.”

아빠는 마당에 꽃다발을 던지셨다. 그리고 나무 대문을 박차고 나가셨다.

“아빠가 엄마 생각해서 사 온 건데 왜 그런 말을 해요. 그냥 받지.”

엄마도 미안했는지 마당에 내팽개쳐진 꽃다발을 말없이 주워 고이 챙기셨다. 그 이후로 아빠는 엄마에게 한 번도 꽃다발 선물을 하지 않으셨다.


지인의 졸업식, 연주회, 전시회, 공연 등 꽃다발을 많이 샀다. 그때 알았다. 꽃다발이 절대 싸지 않다는걸. 그냥 돈으로 주지. 엄마의 말을 곱씹어봤다. 그 돈이면 우리 가족 맛있는 거 한 번 더 먹을 수 있는데. 그 돈이면 은희 문제집 하나 더 사줄 수 있는데. 그 돈이면 천 원 한 장도 아껴 쓰던 생활비에 여유가 생길 텐데. 그냥 돈으로 주지. 이 말엔 여자는 없었고 엄마만 있었구나. 아빠의 꽃다발엔 엄마가 아닌 여자가 있었구나.


나는 사실 아주 오래 아빠를 원망했다. 우리 집이 힘들어진 건, 엄마가 이렇게 고생하는 건 아빠 때문이라 생각했다. 내게 한 번도 소리 지른 적 없던 아빠에게 울면서 소리 질렀다.

“아빠! 진짜 왜 그래요.”

푹. 아빠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셨다.

“미안하다.”

마음이 아파, 고개 숙인 아빠를 더 볼 수 없어 이불 속으로 숨었다. 아빠는 그러고도 한참을 그 자리에 계셨다.

“은희야, 아빠랑 마트 갈래?”

아빠는 저녁마다 정확히는 문 닫기 30분 전에 마트에 가셨다. 동생과 내가 먹을 과자를 사러. 맥주와 안주를 사러. 아빠는 병아리색 3단 찬합에 과자를 종류별로 차곡차곡 쌓아놓으셨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채워 놓으셨다.

그날 저녁 아빠와 동네 마트에 갔다. 서로 말이 없었지만. 아빠 걸음은 여전히 나보다 빨랐지만. 그게 아빠와 딸의 화해였다.


몇 해 전이었다. 아빠가 엄마 생일에 반지를 선물하셨다. 그동안 조금씩 조금씩 돈을 모으셨단다. 이번에 엄마 환갑인데 아빠가 엄마 반지 하나 해주려고. 굳이 내게 예고하셨다. 나는 아빠의 귀여운 예고가 안부로 들린다. 우린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일상의 어떤 투정도 어떤 사소한 사건도 내겐 안심이 되는 말이다. 잘 지내도 되겠다는 마음 가벼워지는 말이기도 하고.


집에 내려갔는데 엄마 손에 반지가 없었다. 음식 장사하시니까 아까워서 못 끼는 줄 알았다.

“은희야, 아빠한테 엄마 반지 좀 보여달라고 해봐라.”

엄마의 웃음이 심상찮다. 엄마에게 선물한 반지를 보여달라고 했더니 아빠의 뒷모습이 잔뜩 신이 나셨다. 씩 웃음이 났다. 그리고 아빠가 조심스레 반지 케이스를 여는 순간 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아빠, 무슨 돌 반지에요?”

“이기, 아빠가 디자인해달라고 해서 돈도 더 줬다 아이가.”

투박하기 짝이 없는 금반지였지만. 엄마도 웃고 아빠도 웃고 나도 웃고. 그 웃음의 의미는 서로 달랐지만. 좋았다. 쪽팔려서 못 끼고 다니겠다는 엄마 말은 비밀로 해야겠다. 나는 아빠가 지금처럼 영영 철이 없으면 좋겠다. 엄마도 그랬으면 좋겠다.



반지가 촌스럽지, 사랑이 촌스럽냐! 아빠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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