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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Sep 05. 2022

비가 와도 걸을 수 있었지

청계천을 걷던 우리 가족. 근데 왜 다 떨어져서 각자 걸어? ㅎㅎㅎ




아빠 손을 잡고 등원하는 아이의 드레스가 화려했다. 단지 내에서도 핑크 공주로 유명한 아이는 내일은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는 아빠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 아빠 미워 아빠 미워 새침하게 굴면서도 아빠 손을 놓지 않는 아이 옆으로 왕벚꽃 잎이 흩날렸다.

젊은 아빠는 왼쪽 어깨에 아이의 유치원 가방을 메고 네이비색 반바지에 회색 후드티, 크록스 슬리퍼로 대디 룩을 완성하고선 토라진 딸 얼굴에 대고 아빠 미워? 아빠 미워? 하며 서운한 듯 계속 물었다. 둘의 드레스 코드는 전혀 맞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누가 봐도 잘 어울렸다.

산을 깎아 만든 숲의솔 아파트는 경사가 있긴 했지만, 사계절 자연 조경이 아름다운 곳이다. 아파트 입구에서 큰길까지 내려가는 길도 한쪽엔 빨간 벽돌담, 그 맞은편엔 잎이 무성한 나무들로 가득해 오가는 사람이 없으면 입주민들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아빠와 딸아이만 걷고 있는 그 길 위에 바람에 살랑거리는 왕벚꽃 나무가 화동처럼 꽃잎을 뿌려주었다. 둘의 모습을 바라보다 사진으로 찍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모퉁이를 돌아 둘의 모습이 사라지자 길 위에 내려앉은 꽃잎을 쓸기 아쉬워 오늘은 그냥 두기로 했다.

_ 좋으니의 미완성 소설 <수상한 경비원> 중     








온종일 비가 내렸다. 태풍 소식에 걱정이다. 창원 집은 괜찮을까, 내일 출근길은 괜찮을까. 아직은 얌전하게 내리는 비를 보며 큰 피해 없이 지나가 주길 바랐다. 빨간 신호등에 초록 불이 들어왔다. 신발에 물이 튀지 않게 조심조심 한 걸음 내딛는데 내 앞으로 꼬마 숙녀와 아빠가 걸어간다. 얇은 머리카락에 긴 파마 머리. 하늘하늘 살구색의 쉬폰 원피스. 핑크와 보라색이 예쁘게 그라데이션 된 레인부츠를 신은 꼬마 숙녀가 투명한 우산을 쓰고 자박자박 예쁘게도 걷는다. 그 뒤를 따라 걸었다. 우산을 꼭 잡은 조그마한 두 손, 우산 밖을 빠져나온 아빠의 팔 한쪽. 딸의 손을 잡지 않았어도 보였다. 아빠의 한쪽 팔이 허리까지 오는 딸을 따라다니며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참, 예쁘다.’ 하고 쳐다보는 것도 잠시, 자꾸 궁상맞은 생각을 한다. 먼 훗날 신부 입장이라는 소리와 함께 결혼식장을 걸어갈 둘의 모습처럼 보이는 건 왜인지. 예뻐서 쳐다보다가도 혼자 뭉클해질 때가 많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궁상은. 왕벚꽃잎이 흩날리던 출근길. 내 앞을 지나가던 딸과 아빠의 모습. 맞다. 아직 완성하지 못한 소설의 한 장면을 본 날, 그때부터였다.


비 오는 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축축한 느낌이 싫고 젖는 것이 싫다. 물놀이가 끝난 후 씻으러 갈 때까지의 그 축축함도 싫어서 물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이 나다. 나는 보송보송한 것이 좋다. 물론 차 안에서 빗소리를 듣거나, 카페 유리창으로 내리는 비를 보거나, 지금처럼 혼자 거실에 앉아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글을 쓸 때는 좋지만…. 아, 비 오는 날 생각나는 사람이 아빠라는 것 빼고는 비가 마냥 반갑지는 않다.


하지만 비 오는 날엔 어김없이 아빠가 생각나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을 들고 초등학교 정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던 아빠. 가족들과 청계천을 걷던 날, 한 방울씩 떨어지는 비. 우리 가족은 다리 밑에서 비를 피했고 아빠는 비를 맞고 차까지 달려가서 우산을 들고 오셨다. 아빠 덕분에 우리는 비가 와도 걸을 수 있었다. 아마 많은 날 그랬었겠지.



#라이트라이팅 #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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