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작교_책이 되는 에세이_3주차 프리라이팅
나는 가족에게만 무뚝뚝한 경상도 여자였다. 친구, 친구의 친구, 교회 사람들, 회사 동료 등 주변 지인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했다. 그 말을 하면서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너무 가볍게 사용하는 것 같아 마음이 찜찜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한다고 말하는 게 어려웠다. 꼭 번지점프를 앞둔 사람처럼 엄청난 결심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렇게 머뭇거리다가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돌아서곤 했다. 가볍게 사랑한다고 말했던 사람 중엔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많다. 나는 좋으면 최선을 다해 표현하는 사람이지만 가족에게는 아주 작은 표현도 어색하고 조금은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정말 사랑하는데도 속상하고 답답해서 사랑을 짜증으로 표현했다.
스무 살이 되면서부터 가족과 떨어져 지냈다. 처음 일 년 정도는 친구들이랑 노는 게 즐거워서 가족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 년에 겨우 몇 번 만나는데 이 만남을 시간으로 계산하면 얼마나 될까. 앞으로는 계속 이렇게 떨어져 지낼 텐데. 전화도 부모님이 주로 하는 편이었고, 집에 내려가더라도 고등학교 친구들 만나러 간다고 집에 있는 시간은 잠 잘 때밖에 없었으니. 갑자기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엄마 아빠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친구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을 잘도 하면서 정작 엄마 아빠에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게 너무 후회스러웠다. 지금 용기 내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못 할 것 같았다. 엄마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다짜고짜 사랑한다고 말했다. 순간 당황해하시더니 곧 크게 웃으셨다. 그리고 나도 멋쩍게 웃었다. 그 이후로는 나뿐 아니라 엄마 아빠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기 시작하셨다. 어느 날 밤엔 아빠가 내게 전화하셨다. “자나, 아빠가 맥주 한 잔 마시니까 딸이 보고 싶어서.” 그날 밤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은 수동적 감정이 아니라 활동이다. 사랑은 참여하는 것이지 빠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본래 주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사랑은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감정의 영역으로만 놔둔다면 사랑은 더욱 어려워지고 더는 사랑이 자라지 못하게 된다. 사랑은 정말이지 활동이고 참여하는 것이며 주는 것이다. 내가 먼저 사랑을 표현하고부터 우리 가족에겐 늘 어렵고 어색하던 사랑의 표현이 조금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졌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니 안고 싶어졌다. 집에 내려갔다가 서울로 돌아올 때 엄마, 아빠는 버스 문이 열릴 때까지 내 옆에 말없이 서 계셨다. “조심해서 가고 도착하면 전화해라”, “갈게요. 어서 들어가세요”라는 말로 버스가 사라질 때까지 서로 쳐다보는 것이 우리의 인사였다. 그러다가 다시 용기 냈다.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먼저 엄마 아빠를 안아드렸다. 처음엔 뻣뻣하게 서 있기만 하던 엄마 아빠가 이제 등도 두드려주시고 자연스럽게 안아주신다. 사랑한다는 말도 어색하던 우리 가족이 이젠 서로 안아 주기까지 하다니.
최근 TV 프로그램에서 김성근 감독이 이런 말을 했다. “최강야구는 승리 7할이 목표이다. 이 숫자가 좋다. 이 목표가 사람을 움직이게 만든다.”라고. 목표는 사람을 움직이게 한다는 말을 생각하면서 왜 사랑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사랑과 목표는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최근 지인이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아버지를 껴안으며 이마에 입 맞추는 모습을 보면서 살아계실 때 꼭 엄마, 아빠 볼에 입 맞춰 드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목표가 나를 움직이게 만들면 좋겠다.
김한솔이 작가님과 함께하는 세작교 책이 되는 에세이에서 <사랑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제로 쓴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