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탈리 골드버그, 권진욱 옮김, 한문화2020
“왜 하필 야구를 좋아해서…” 야구 중계 화면에 잡힌 글이다.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입문하는 순간부터 고통에 시달리지만 들어오면 출구가 없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고통스러울 바엔 끊고 말겠다 싶어도 “내 신경은 온통 너였어.”라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 속 주인공의 고백처럼 내 신경은 이미 글쓰기 앞에 가 있다. 즐거움은 찰나요, 고통은 끝이 없는 야구와 글쓰기. 인내는 필수다. 하필 나는 야구와 글쓰기 둘 다 좋아해서 고통도 갑절이다.
글쓰기는 고통스럽다. 써도 안 써도 잘 써도 못 써도 고통스럽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 압박과 부채감에 시달린다. 고통받는 것에 비해 글의 수준은 한참 못 미친다. 겨우 이 정도 글을 쓰려고 이렇게 고통받는 것인가. 쓰면서도 의심이 끼어들어 한 번도 글쓰기에 몰입해 본 적 없다.
나는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엔 아직도 그럴싸한 답이 없다. 그래도 쓴다. 쓰고 싶고 잘 쓰고 싶고 쓰는 만큼 늘고 싶다.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들 하나도 놓치기 싫어 수시로 메모장을 연다. 가끔은 내가 글쓰기 인질이 된 것 같은 기분이다. 글을 안 쓰면 보이스 피싱이라도 당한 것처럼 아깝고 억울하다. 억울함은 내 글쓰기 동력이다.
나는 왜 글쓰기가 고통스러울까. 잘 쓰고 싶은 마음만큼 잘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잘 쓰고 싶은 욕심이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초고는 누구나 쓰레기라고 하지만 헤밍웨이의 초고와 내 초고는 수준부터 다를 테고, 재활용 불가능한 쓰레기를 쓰는 것 같은 기분을 견디기 힘들었다. 초고의 수준이 내 수준인 것 같아 초고를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빈 화면에 첫 글자 쓰는 것이 매번 두렵다.
“일단 써라, 무조건 써라, 멈추지 마라, 뒤돌아보지 마라, 오타가 있더라도 백스페이스를 누르지 마라.” 글쓰기 수업을 들을 때마다 듣는 말이지만 나에겐 매번 도전이었다. 꼼꼼하고 완벽하고 정돈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 글 쓰는 데 방해됐다. 한 줄 한 줄 쓸 때마다 내 안에 검열관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그러다 보니 마감을 앞두고 분량만 채운 글을 내기에 급급했고 계속 자괴감에 빠지는 상황이 반복됐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을 읽으면서 심리적 해방감을 느꼈다. 글 쓰는 행위에 대한 부담이 줄었다. 내 글의 수준이 어떠하든 부족함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지금 당장은 글이 이 모양이더라도 계속 훈련하다 보면 열매 맺을 날이 올 거라는 내 글에 대한 효능감이 높아졌다. 작가가 말한 것처럼 비옥한 토양을 만들기 위해 계속해서 비료가 될 만한 자료를 수집하고 발효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첫 생각’에 대한 작가의 메시지는 내가 두르고 있던 견고한 틀을 허물어주었다. 정말 나의 뇌신경망을 툭 건드리는 느낌이었다. 항상 첫 생각을 깎고 다듬어서 뭔가 그럴싸한 글을 만들려고 했지만 결국 그저 그런 글을 만들고 있었다. 강박과 결벽이 글쓰기와 이어지면서 참신함에서 멀어지고 언제나 더 넓은 세계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글은 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삶에서 나온다.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발품 팔아야 한다. 작가의 창의력과 상상력은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내 몸속에 체험된 수많은 경험에서 이미지화, 텍스트화되는 것이다. 나는 주로 노트북 앞에 앉아서 끙끙대기만 했다. 평소 하던 방법에서 글쓰기가 안 되면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봐야 함에도 내가 생각한 틀과 루틴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냥 시간만 낭비했다. 이 책은 나에게 틀과 루틴에서 벗어나도 괜찮다는 위로와 용기가 됐다.
왜 글을 쓰는가라는 질문엔 쓰는 내내 답을 못할 수도 있다. 그래도 쓸 것이다. 평생 아무도 보지 않을 글을 쓰고, 홀로 그냥 쓰다가 사라지고, 남의 글만 읽다가 지워지더라도 괜찮아, 이젠 정말 괜찮아, 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계속 글을 쓸 것이다. 내가 나를 방해하는 순간이 급습하더라도 얼른 정신 차리고 용기 있게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