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소설 <대성당>, 김연수 옮김, 문학동네 2014
평온한 일상에 갑자기 들이닥치는 불청객,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내밀한 감정 묘사, 부사나 형용사 따위 없이 건조하고 간결한 문장. 시인이기도 했던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은 무심하면서도 골치 아프게 삶의 어둡고 불편한 모습을 수면 위로 드러낸다. 소설은 한 부부의 집에 아내의 오랜 친구인 맹인이 하룻밤 묵기 위해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분명 불청객은 맹인인 ‘그’가 맞다. 하지만 후엔 그 불청객이 ‘나’인지 ‘그’인지 경계가 모호해진다.
왜 제목이 대성당이었을까. 꼭 대성당이라는 제목이 아니었어도 이 소설에서 나올 수 있는 제목은 얼마든지 많았다. 대성당이라는 단어가 주는 엄숙하고 웅장한 이미지에 삐걱대는 일상이 중첩되면서 소설 전반적으로 묘한 분위기가 흐른다. 제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종교적인 해석이 따라붙었다.
예를 들면 “그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와 맹인은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라는 문장에선 대면할 수 없는 신과 그 신에게 끊임없이 의지하는 인간의 관계로,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의 설정은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바라보고 사는 종교인의 모습으로, 맹인이 여자의 얼굴을 만지는 부분과 남편이 맹인의 손을 잡고 대성당을 그리는 모습은 신과의 접촉으로, “내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먹어치웠다.”는 말에선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루치 식량으로 내리던 만나로, 남편과 맹인 사이에 앉아 “잠들면 깨워주세요.”라고 말한 아내의 말엔 등불 들고 신랑을 기다리던 성경의 열 처녀 비유로, 처음에 맹인과 그녀의 사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느낀 사람과 느끼지 못한 사람의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계에 대한 갈등으로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한 사람.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어떤 말로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 여자와 두 남편들 사이에는 세계라는 간극이 존재했다. 여자는 그녀가 겪은 모든 일에 대해 가장 가까운 남편이 아닌 만나지도 못하는 맹인에게 말한다. 온갖 종류의 일들을, 테이프를 녹음해서 담아 보내는 수고를 하면서까지. 죽기에 실패한 그녀는 맹인에게 더 의지한다. 그리고 그 맹인이 드디어 그녀의 집에 잠을 자러 오고 있다. 마치 예수께서 삭개오에게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듯 말이다.
남편은 시종일관 그의 방문이 달갑지 않지만, 아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맞이한다. 식사를 하고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노곤한 시간이 다가오고 아내가 잠들면서 맹인과 남편 둘만의 시간이 시작된다. 그 자리를 피하고 싶던 남편은 맹인에게 잠을 청하지만 그는 남편에게 좀 더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한다. 남편은 어색함에 텔레비전을 켠다. 마침 교회와 중세에 관한 프로그램이 시작되고 카메라는 우뚝 솟은 대성당의 모습을 보여준다.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남편은 뭔가 말해야만 할 것 같은 생각에 대성당의 외부에 대해 설명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이탈리아에서 리스본 근교에 있는 대성당으로 옮겨가듯 그 둘 역시 거실에서 대성당 안으로 들어간다.
대성당에 대해 보지 못하는 맹인이 말한다. “수백 명의 일꾼들이 오십 년이나 백 년 동안 일해야 대성당 하나를 짓는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중략…) 평생 대성당을 짓고도 결국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더군.”
실제로 보지 못하는 맹인이나 볼 수 있으나 보지 못하는 일꾼이나 대성당을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다. 누가 맹인인지 ‘그’인지 ‘나’인지 모호해지는 순간이다.
남편과 맹인은 대성당을 그리기 위해 손과 손을 접촉한다. 남편이 어떻게 대성당을 그리고 있게 된 건지 특별한 계기는 없다. 맹인의 주도하에 그도 모르게 갑자기 “평생 짓고도 결국 그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죽는다.”는 대성당을 함께 그리고 있다. “내가 자네 손을 따라 움직일 거야. 괜찮아. 내가 말한 대로 시작해보게나. 알겠지. 그려봐.” 그래서 그는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둘은 함께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있었다. 그들이 함께 그린 대성당 안에. 그들은 집 안에 있었다. 또한 그들은 그곳에 없었다.
번역에 오류가 많다는 논란이 있던데 문학동네에선 왜 개정판을 내지 않는 것일까. 며칠 전 @꼬솜 작가님께서 원서와 번역본을 비교해서 설명해 주셨는데 마지막 문장은 심각할 정도여서 좀 화가 났다. 오류가 많은 번역본도 역시 레이먼드 카버! 하며 감탄하며 읽었지만 어쩌면 원서의 느낌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지나간 부분이 많을 거라 생각하니 억울하다. 십 년이 지났으니 이제 책임지고 제대로 된 개정판을 내줬으면.
(김연수 작가님 글은 참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