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다니
나는 삼성라이온즈 팬이다. 시즌 초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약팀 삼성이 2015년 이후 9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정규시즌을 2위로 마감하고 플레이오프에서 제발 업셋(하위 팀이 상위 팀을 꺾는 것) 당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그러니까 나는 이번 시즌 삼성이 한국시리즈에만 진출해도 충분했다는 말이다.
LG와의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강민호가 솔로 홈런을 쳤을 때 집에서 손뼉 치며 방방 뛰었다. 타석에서 내내 잠잠하다가 한국시리즈 냄새라도 맡고 싶다던 강민호가 제 손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 짓던 순간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다. 1-0으로 앞서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라도 역전될까 봐 9회 경기는 떨려서 보지 못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달달 떨며 다시 채널을 돌렸다. 삼성 선수단이 "팬 여러분 한국시리즈에서 뵙겠습니다!"라는 푸른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몇몇 선수는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삼성라이온즈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자막에 정말로 뛸 듯이 기뻤다. 내게도 이런 순간이 오다니. 삼성을 응원한 지 9년 만에 한국시리즈 진출을 본 것이다. 나는 삼성의 암흑기부터 함께 했다. 사상 첫 통합 5연승을 달성할 수 있었던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선수들의 도박 사건으로 두산과의 시리즈 전적 1승 4패가 되어 준우승을 하게 된 그때부터 팬이 되었다. 삼성이 거둔 1승. 하필 그날 야구를 보게 되었다. 지인이 삼성 팬이었기에 자연스레 삼성을 응원하다가 거둔 1승이 너무 짜릿해서 출구 없는 세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욕하고 스트레스받고 욕하고 스트레스받고 그렇게 9년을 보냈다.
정말 한국시리즈 진출만으로도 충분했다. 정규시즌 내내 삼성은 기아에게 유독 약했고 이번 시즌 통합 우승은 누가 봐도 기아였다. 기아가 우승하겠거니 하고 마음을 비웠는데 한국시리즈 1차전을 보고 너무 억울해서 생각이 확 바뀌었다. 한국시리즈 1차전이 열린 21일 광주에는 시작 전부터 비가 쏟아졌다. 경기가 취소되어야 맞았다. 방수포를 세 번이나 덮었다가 걷었다. 저녁 내내 비 예보가 있었지만 경기를 강행했다. 66분이 지연된 오후 7시 36분에 경기가 시작되었다.
5회 말까지 0-0이었다. 6회 초 삼성의 선두타자 김헌곤의 솔로 홈런으로 1:0이 되었고 이 홈런으로 기아의 네일이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장현식이 구원 등판한 이후 삼성은 무사 1, 2루 찬스를 잡았다. 비는 계속 내렸다. 원태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비가 경기 시작 때보다 더 많이 내린 것도 아니었기에 경기를 끝까지 마무리 지었거나 아예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날 컨디션이 너무 좋았기에 선배인 강민호도 너의 날이 될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말했다고 한다. 계속된 비에 심판진이 우천 중단을 선언했고 결국 서스펜디드 게임(일시정지 경기, 뒷날 속행하는 게임)이 선언되어 23일 더블헤더(같은 날 연속 두 경기를 치르는 것)와 마찬가지인 경기를 치르게 됐다.
야구는 분위기 싸움이다. 삼성라이온즈 팬으로 아쉽고 억울한 점은 5회까지 삼성의 선발 원태인이 5이닝 2안타 무실점으로 막고 있었다. 투구 수도 66구밖에 안 됐다. 어쩌면 완봉승(한 명의 투수가 9회까지 한 점도 내주지 않고 경기를 끝내는 경우)도 기대할 만한 투구 수였다. 분위기와 경기 흐름이 삼성 쪽으로 넘어온 그 시점에서 경기가 중단되었다. 추가점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비가 오는데도 시작했으면 끝까지 마무리했어야지. 아니면 6회 말까지는 했어야지(강우콜드조건 성립 가능). 아무튼 1차전은 그날 끝냈어야 했다. 야구가 분위기 싸움이라는 걸 모를 리 없는 심판진의 결정에 화가 났다. 분위기만 문제가 아니라 삼성의 투수 운용도 완전히 꼬여버렸다.
전문가들과 야구팬들은 삼성에 불리한 결정이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1, 2차전이 열린 23일 수요일. 삼성 팬들에겐 최악의 하루였다. 하루에 2패를 떠안았다. 어차피 우승은 기아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과정이 너무 화가 났다. 기아도 삼성도 1차전은 찜찜함만 남은 경기가 됐다.(아, 삼성만 찜찜할 수도 있겠다). 어쨌든 아무리 억울하고 불리하니 뭐니 해도 삼성은 1차전을 어떻게든 이겼어야 했는데 역전당하고 말았다. 1차전을 지고 2차전까지 와르르. 만약이라는 가정이 꼬리를 물고 물었다. 1차전이 그렇게 중단되지 않았더라면. 1차전을 아예 미뤘더라면. 선발도 불펜도 아끼고 지금의 결과와 침울한 분위기까지는 아니었을 텐데.
KBO의 잘못된 결정으로 엄한 팬들끼리 싸우고 있다. 따지고 보면 KBO 잘못이지 기아 잘못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기아가 밉다.(기아 팬분들 죄송합니다;;) 어쨌든 이번 시즌 생각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삼성이다. 준우승도 정말 잘했다. 운도 따랐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어떨지 모르겠다. 준우승으로 올 시즌을 마감한다고 해도 삼성에겐 손해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져야(?) 더 독기 품고 내년에도 잘하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해야 조금 위안이 되기에. 아무튼 마지막 남은 경기는 삼성이 좀 더 힘내주길 바란다. 4연패로 준우승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