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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좋으니 Nov 22. 2021

동생의 도둑질

동생이 동네 슈퍼를 지나가다가 망설임 없이 귤 하나를 집어 들었다. 벌써 몇 차례는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보기 힘들지만, 90년대만 해도 슈퍼 앞 가판대에 귤을 가득 쌓아놓고 팔았다. 주인의 눈을 피해 각도만 잘 조절하면 귤 한두 개쯤이야 쉽게 훔칠 수 있었다. 동생의 도둑질을 몇 번이고 눈감아주던 슈퍼 아줌마가 참다못해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에서처럼 그땐 동네 사람들끼리 다 언니, 동생 하던 시절이었다. 아무 관계 없는 뒷집 사는 사람도 이모가 되었다. 슈퍼 아줌마랑 엄마도 그런 사이였기에 엄마에게 말하기까지 수없이 망설였을 것이다. 동생이 지적 장애였기 때문에 더 큰 문제가 생기기 전에 교육이 필요하다고 판단해서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날 엄마는 매를 들었다. 동생의 호주머니에는 귤도 있었고 새콤달콤 딸기 맛도 있었다. 나는 마당에 서서 안절부절못했다. 무척 밝은 대낮이었음에도 폐가 앞에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두려웠고 침울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고함에는 눈물이 섞여 있었고, 엄마의 눈물 때문인지, 매의 아픔 때문인지 동생 역시 소리 내 울고 있었다. 그 눈물들이 내 가슴에 뚝뚝 떨어져 패일 것만 같았다. 말리고 싶었지만 겨우 초등학생이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속으로 쉴새 없이 되뇌던 주문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며 엄마를 말리던 뒷집 이모 덕분에 용기를 내어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새콤달콤 딸기 맛은 내 친구가 사준 것이라는 거짓말을….


때마침 그 친구가 놀러 왔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 그 찰나의 순간 친구에게 거짓말을 부탁했다. 엄마는 정말이냐고 재차 확인했다. 그렇다는 친구의 거짓말에 엄마의 몸에서 큰 한숨이 빠져나왔다.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그때 한숨은 엄마의 몸을 삼킬 만큼 컸을 것이다. ‘도둑질은 나쁘다’라는 이해를 시키려고 매를 들고, 아픔을 줄 수밖에 없었던 그 날 엄마의 마음은 이중 삼중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이런 순간이 그때뿐이었을까. 쌍둥이 동생 중 영진이는 핸드폰 고리처럼 작고 귀여운 액세서리를 좋아했다. 중학교 시절 특수반에서 공부했던 동생은 친구의 액세서리에 손을 대었고 그날 특수반 선생님은 동생의 손바닥이 멍들 만큼 때렸다. 선생님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엄마는 죄인이 되었다. “그래도 그렇지…”라는 말을 꾹꾹 눌러 담으며 아무 말도 못 하셨다.


그 날 엄마는 매를 들지 않았다. 동생을 혼내지도 않았다. 다만 기억나는 건 동생의 퉁퉁 부은 손바닥이 너무 속상해서 뒷집 이모에게 하소연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것뿐이다. 엄마의 목소리도, 동생의 멍든 손바닥도 희미하지만 여전히 이 흐릿한 기억에 가슴이 생생하게 아파지는 것을 보니 마음의 멍은 쉬이 아물지 않나 보다. 40년은 족히 반복되었을 마음의 고통을 육신의 질병으로 표현한다면 엄마는 아마 중환자쯤 될 것이다.


엄마가 고단했던 만큼 동생들은 많이 성장했다. 성인이 되어 복지관을 다니면서 사회성도 생겼다. 지적 장애 아이들의 가족들이 전세 보증금을 마련해 집을 구한 다음 복지관 선생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개는 등 스스로 생활하는 방법을 조금씩 배우게 되었다. 막냇동생은 자신과 같은 장애의 친구들이 함께 일하는 회사에 취직하면서 버스 타는 방법도 배웠고 이젠 혼자서도 잘 타고 다닌다.


‘혼자 버스를 타고 다닌다…’ 나로서는 정말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다. 동생은 정상적인 발달의 단계를 거치는 아이들보다 아주 느리다. 동생의 성장에는 기다림이라는 인내가 필요했고 늙어버린 엄마의 긴 세월이 지금의 동생을 만들었다.


어떤 단어를 써야 엄마의 수고를 다 담을 수 있을까. 엄마는 아마 도둑질했던 동생에게 들었던 매를 끊임없이 자신에게 들었을 것이다. 모두 놔버리고 싶을 때마다 그렇게 자신을 붙잡았을 것이다. 마음 성할 날 없었던 꾸부정한 엄마의 모습이 또 내 가슴을 마구 때린다.


먼 훗날(정말 먼 훗날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과연 엄마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까. 나는 엄마가 아니니까 당연히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오지 않은 미래의 걱정을 이고 지고 살았다. 그러나 항상 다짐했다. 세 자매가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으며 살아갈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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