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입가에 초고추장을 묻히고 따라 나왔다. 오른손엔 나무젓가락이 들려 있고 내 손에 돌돌 말린 지폐 몇 장 쥐여 주셨다.
“아나, 이거 차비 해라.”
“됐다. 차비 있다.”
차비를 쥐여준 엄마 손을 보지 않았다. 때마침 엄마 가게 앞에 택시 한 대가 섰다. 손님이 내렸다. 이렇게 빨리 갈 생각은 아니었는데.
“갈게.”
택시에 탔다. 엄마 아빠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채. 코트에 손을 넣었는데 엄마 손에 말려있던 돈이 들어있다. 급하게 나가는 딸 뒤따라 나오느라 부랴부랴 꺼낸 돈 사만 천원. 엄마 호주머니에서 나온 돌돌 말린 지폐 몇 장의 꾸깃꾸깃함을 보자마자 눈물이 줄줄 흘렀다. 서러웠다. 외할아버지 장례식 내내 울지 않았는데 택시 안에선 참아지지 않았다.
지난주 월요일이었다. 운동을 끝내고 샤워하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씻는 중이어서 받지 못했다. 몇 분 뒤 다시 전화가 왔다. 쿵, 하는 느낌이 왔다. 떨리는 엄마 목소리.
“은희야, 할아버지 돌아가셨다.”
“아… 지금 내려갈게.”
월요일 저녁 9시쯤 돌아가셔서 화요일 하루 조문객을 받고 수요일 낮에 모든 장례 일정이 끝났다.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엄마 옆에 오래 있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이번에는 마지막 날까지 엄마 옆에 있었다. 여러 번 눈물을 참았다. 외할아버지의 관이 화장터로 들어갈 때 무서웠다. 미리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장면이 떠올라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화장 중, 수골 중. 모르는 이의 이름이 컴퓨터 화면 가득 떴고 대기실에 수십 명의 유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많이 뜨거운가요?”
유골함을 든 삼촌에게 장례지도사가 물었다. 질문이 너무 묘했다. 이걸 표현할 수 있는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 장례식 내내 생각했다. 입관할 때나 화장할 때, 장례가 끝나면 그때마다 엄마를 꼭 안아줘야지 하고. 하지만 한 번도 안지 못했다. 엄마와 내가 안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터질 거라는 걸 알아서. 일단은 함께 있는 것으로 참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날 몰아서 안아야지 생각했다.
일이 터졌다. 장례식을 마치고 가족들 모두 모여 밥 한 끼 먹고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때부터 화가 났다. 밥 한 끼 먹는 장소가 엄마 가게였기 때문이다. 다리와 허리가 불편해 앉고 일어섬도 불편한 엄마 가게에 몇십 명이 온다니. 가게 와서 쉬지도 못하고 고추를 써는 엄마를 보니 화내지 못해 화가 나서 속이 뒤틀렸다. 엄마는 분주하게 음식을 차렸다. 물론 이모들이 도와주긴 했지만.
“은희는 지금 엄마 고생시킨다고 영 얼굴이 안 좋네.”
내 맘을 알아주는 이모가 고마웠지만, 그 말에 내 투정 같은 마음이 극에 달했다. 애도 아니고. 그토록 좋아하는 회를 몇 점 집어먹다가 말았다. 좁은 가게 안에 사람도 대화도 환기되지 못한 채 숨 막히듯 들어차 있는 것 같아 답답했다. 핸드폰 앱을 열어 버스표를 예매했다.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내다 서울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일찍 일어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30분 뒤에 출발하는 버스를 예매하고 백팩을 둘러메고 가게에서 나왔다. 밥 먹다가 갑자기 간다는 나를 보는 엄마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생에게 인사도 못 하고 나왔다.
서둘러 나온 내 뒤에 언제 따라 나왔는지 엄마 아빠가 계셨다. 엄마는 걸음도 느린데. 엄마의 입가엔 초고추장이 묻어 있었다. 장례를 치른 엄마를 결국 한 번 안아주지 못하고 돌아섰다. 엄마가 고생하는 게 싫은 건데. 엄마한테 화가 난 게 아닌데. 애먼 엄마한테 투정 부렸다. 그것도 가장 그러지 말아야 할 순간에…. 택시 안에서도 버스 안에서도 울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안한 사람이 된 것처럼 부끄러웠다. 그날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답이 없는 엄마, 아무 일 없는 듯 잘 도착했냐고 묻는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배려에 얼렁뚱땅 쑥스러움을 넘길 수 있었다.
사랑하는 우리 엄마. 엄마를 생각하면 짠해서 마음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