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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동현 May 29. 2022

「하류인생」을 둘러싼 이야기

05월 27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마테리알》 편집부 동료들과 함께 「하류인생」에 대한 GV를 함께 했다. 내가 말한 부분을 옮긴다.





안녕하세요. 앞에서 하윤 씨와 연선 씨가 하류인생 대한 두터운 해석과 새로운 시선을 풀어주셨는데요. 저는 하류인생 둘러싼 경계선에 있는 이야기들을 풀어놓고 싶습니다. 하류인생 별로 거명하지 않으면서도, 하류인생 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류인생 ‘영화()’ 대해 이러한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류인생 처음 보고 가장 이상하게 느꼈던 점은, 철웅이 영화관 바깥만을 맴돈다는 점입니다. 철웅은 영화관 앞에서 싸움을 걸고, 제작 일을 하잖아요.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싸움 : 임권택 감독의 증언(1972) 상영되고 있는 극장에서 싸울 때는 정말로 발에 차여 극장  앞까지 밀린단 말이에요. 그러나 절대 극장 안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없습니다. 태흥의 이전 깡패영화 장군의 아들. 장군의 아들 2 인상적인 영화관 장면이 나오는 것과 대비하면, 이러한 금지는 마치 영화의 규칙처럼도 느껴지면서, 하류인생 암시하는 영화()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거든요. 아무튼 이런 맥락에서 하류인생 둘러싼 이야기들을 시작해보겠습니다.


 

한국의 액션 영화에 대해서

 

최근 손희정 평론가가 「범죄 도시 2」에 대해 쓰며, 배우 마동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그(마동석-인용자)는 한국사라는 과거를 짊어진 기존의 남성 캐릭터들과 달리 이해받아야 할 구구절절한 사연이 없다.” 이것은 물론 적확한 지적입니다. 그런데 저는 마동석이라는 영화-형상이 무언가를 은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해왔어요. 한국 액션 영화의 근원에서부터 존재하는 어떤 결여를, 마동석의 우락부락한 신체-얼굴이 은폐하고 있다고요. 그 무엇은 뭘까요?

 

10년대 가장 탁월한 한국영화 무뢰한(2014) 감독이며, 가장 재미있는 영화-글의 필자인 오승욱이   한국 액션영화 서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더욱 웃긴 것은 한국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검객영화나 권격영화 모두가 중국 옷을 입고 중국식으로 싸우니, 아무리 어렸어도 중국  입고 한국말로 떠드는 그런 영화들을 마냥 좋아할 수는 없어서 ‘ 우린 저런 말도  되는 흉내만 내지?’하며 뒤에서 구시렁댔지만, 정작 한복을 입고 싸우는 영화가 가뭄에  나듯 나와도 역시, ‘저것도 뭔가 개운치 않아하며 재미없어 했다.”(4) 그렇다면 오승욱이 재밌어한 영화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다음 쪽에 명시되는 ‘기상천외의 불온한 액션영화: 깡패영화입니다.

 

그리고 오승욱은 「팔도 사나이」, 「협객 김두한」 등을 위시한 깡패 영화들을 늘어놓습니다. 저는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여기서 뭔가 이상한 결여를 느꼈어요. 그것은 바로 한국의 나-오승욱이 일본의 검객영화, 즉 찬바라 영화와, 중국의 권격 영화, 즉 무협 영화에 느낀 ‘개운치 않음’을 깡패영화로 해소했다는 점입니다. 찬바라 영화, 무협 영화, 깡패 영화, 이렇게 한 번 발화해보세요. 그럼 여기에 무엇이 결여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기(國伎)의 부재입니다. 물론 오승욱은 같은 책에서 이두용이 1974년에 만든 ‘태권 시리즈’ 영화들을 언급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이 영화들은 어떤 계보를 만들지 못했죠. 대중영화에 태권도가 언급되는 경우…를 떠올리실 수 있나요? 「돌려차기」같이 흥행에 실패한 영화 말고요. 저는 당장 「범죄와의 전쟁」(2012)의 ‘태권도 7단’ (그때는 다소 왜소했던) 마동석이 생각나네요. 그 말은 당연 웃음거리입니다.

 

「장군의 아들」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임권택 민족영화 만들기』에서 90년대 「장군의 아들」 시리즈 흥행 이전 한국영화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80년대 후반 영화관은 ‘하드바디’ 미국 영화와 홍콩 권격 영화를 통해 폭력성을 해소하고, 내부-한국에서는 ‘벗기기 영화’를 통해 성욕을 해소했다, 뭐 이런 이야기였는데요. 그러니까 (다소 지젝을 따라하자면) 80-90년대 영화에 ‘한국 남성은 없’었던 거죠. 아무튼 이런 환경에서 그 틈새를 돌파한 한국 액션 영화가 「장군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도 국기(國伎)의 흔적 따위는 없죠.

 

여담이지만, 저도 오승욱과 마찬가지로, 이런 것이 ‘한국 액션’이다! 했던 게 있는데요. 그 영화는 공교롭게도 옴니버스 영화 「명동잔혹사」(1973)에서 임권택이 연출한 에피소드 「대결」인데요. 여기서 김희라가 자동차를 앞에 두고 싸우다가, 자동차를 붙잡는…뭔가 그런 처절함(?)에서 이것이 한국 액션이다! 같은 아무 맥락 없는 정서를 느낀 적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제 돌아가서 계속 한국 액션 영화에서 국기(國伎)의 결여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문학평론가 조영일은세계문학의 구조에서 재밌는 주장을 하는데요. 그는 근대문학의 성립 여부를 “해당 국가가 내셔널리즘을 거쳐 제국주의까지 경험을 했느냐 못했느냐에 달려 있”다고(76쪽) 썼습니다. 이러한 결여는 실로 무(武)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국기(國伎)에 더욱 적용 가능해보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습니다. 한국 근대화 과정의 상처가 한국 액션 영화에 기술을 제거했다고요. 「아수라」, 「무뢰한」 같은 느와르 영화들을 전문으로 제작하는 제작사의 이름이 순한국어 ‘사나이 픽쳐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액션에 전통으로서 ‘한국적’인 것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동석이라는 우락부락한 형상은 기술의 부재를 은폐하는 좋은 수단입니다. (저는 아직 못 봤는데) 「범죄도시 2」에서 마석도가 베트남으로 나간다고 하는데, 이는 그가 기술의 결여까지 은폐할 수 있는 강력한 신체를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것은 윤아랑 평론가를 통해 알게 된 것인데, 마동석이 종종 ‘귀요미’ 캐릭터를 수행하는 것은 은폐하며 메워버린 남성성의 부재가 다른 성질로 집중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기실 「장군의 아들」에서도 섹스를 한 김두한이 너무 빠른 사정 이후 등을 돌리고 위로를 받는 장면이 있잖아요? 이런 맥락에서 국기(國伎)의 부재로서 깡패 영화-남성성의 어떤 정수(?)가 「장군의 아들」에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하류인생」은 어떤 자리에 있을까요. 이 영화에는 분명 액션 씬이 나오지만, 이걸 ‘액션 영화’의 맥락에서 볼 수 있을까? 할 정도로 적(enemy)이 없습니다. 물론 세세하게 살펴보면 그때그때 태웅의 적은 있죠. 그렇지만 「하류인생」이라는 제목처럼 흐르듯 영화를 본다면, 태웅은 그냥 쫓기기만 하고 어떤 주동 행동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 학교 짱으로 나오는 걸 빼면)힘의 우위 같은 걸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하류인생」은 「장군의 아들」 같은 한국의 액션-남성 주인공 영화와는 궤가 다릅니다. 「하류인생」에서 태웅은 전혀 ‘멋’있게 나오지 않아요. 조승우가 연기를 했는데도 말이에요. 태흥의 이태원이 건달에 의리 같은 게 전혀 없다고 했던 것처럼 말이에요. (물론 「하류인생」의 액션 씬이 매우 훌륭하지만) 「하류인생」에는 어떤 남성성을 회복코자 하는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류인생」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김규리 배우가 분한 혜옥입니다. 아시다시피 임권택은 민족성을 여성 신체에 대한 폭력으로 체현한다는 비판을 자주 받아왔습니다. 「서편제」에서 한(恨)을 위해 딸의 눈을 멀게 하는…뭐 그런 거요. 그런데 임권택의 영화가 꼭 이런 맥락에서만 읽힐 수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가령 「짝코」(1980)의 행려병자를 외면하거나, 「길소뜸」(1985)의 신성일을 화면 바깥으로 빼버리거나, 하는 등, 임권택 영화에서 ‘남성’도 그다지 추앙 받고 있지는 않거든요. 이런 맥락에서 저는 「하류인생」에서 오직 혜옥만이 ‘보는’ 주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태웅은 화면 안에 거의 갇혀서 치닫으며 살지만, 혜옥은 창밖을 보고 태웅의 인간적 몰락을 지켜보거든요. 이 시선의 존재가 임권택의 다른 영화들과 어떻게 연결되며 연결선을 그을지는, 앞으로 함께 풀어나갈 과제로 남겨둬야 할 것 같습니다.

 

임권택의 다른 영화

 

그런데 임권택의 다른 영화들을 우리는 얼마나 볼 수 있을까요? 93년 태흥영화사에서 출판했고 임권택이 엮은  서편제 영화 이야기에는 1993년 「서편제」 개봉 전까지 임권택의 태흥영화사 작업에 대한 약사(略史)가 실려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보겠습니다. “임권택 감독과 이태원 사장은 83년 태흥영화사의 창립 작품으로 기획된 「비구니」의 촬영 건으로 처음 호흡을 맞추었다. 그러나 불교계의 반대로 제작계획은 무산되었고 6년 후인 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로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모스코바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탄 「아제 아제 바라아제」가 두 사람에게 명예를 주었다면 90년대 이태원 사장이 ‘쉬는 기분으로 만들자’던 「장군의 아들」은 두 사람에게 ‘돈’이라는 실리를 준 작품이다.”(78쪽) 이 소개에 의하면 태흥영화사는 임권택에게 예술성을 민속물에, 상품성을 액션물―다찌마와리물―에 할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이와 같은 구분은 만 4년 8개월의 「장군의 아들」 시리즈 이후 이태원이 임권택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는 점, 그리고 그 후 “이왕이면 예술적이고도 알뜰한 작품을 한번 해봅시다. 내년 깐느 영화제에 한 번 내보내게 한국적인 것을 소재로…”라고 해서 만든 작품이 「서편제」였다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서편제」는 94년 한국 최고의 흥행을 하면서 예술성에 할당해둔 민속물이 최고의 상품성을 가져버리면서 이러한 구분을 모호하게 했지만요.

 

「서편제」의 의외의 흥행과 별개로, 근 10년 동안 ‘상업’에 할당된 임권택의 작품들이 재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장군의 아들」(1990)에서 ‘무드’를 봤다는 류승완의 평가를 정성일 평론가가 전하는 등의 일이 일어났던 것이죠. 이로써 주로, 아니 거의 전적으로 정성일 평론가를 중심으로 임권택 감독이 진지하게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고백한 「잡초」(1973) 이전의 영화들도 ‘재발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재발견의 요청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임권택 영화를 대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그 구분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는 임권택의 이전 영화들을 검토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현재 임권택의 영화 102편 중 부분적으로라도 필름이 남아있는 영화는 제가 셌을 때 81편이었는데요. 이 영화들 중 물리매체로 구매할 수 있는 임권택 영화는 모두 「잡초」(1973) 이후의 영화입니다. 자료원을 방문하지 않고, 법외 다운로드 등 가용 가능한 방법을 총 동원하면 비공개 트래커 등 인터넷에 밝은 사람들이 구할 수 있는 영화는 총 55편이에요. 이중 「잡초」 이전의 영화는 11편 밖에 없습니다. 「욕망의 결산」(1964)부터 「잡초」(1973) 이전까지 만들었다는 다찌마와리 영화들은 8편 밖에 볼 수 없고요. 이로써 구분이 낡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작동해버리는 것입니다.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가 훌륭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도, 그 영화의 무엇이 훌륭한지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잠깐 새어나가: 임권택의 전작 비평을 진행하고 있고 전작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한 정성일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정성일이 1986년 11월 둘째 주 화요일 남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임권택을 만났다고 합니다. 「공포의 외인구단」(1986)으로 돈을 번 이장호 감독이 ‘한국 영화감독 총서’를 제안했고, 정성일이 임권택을 택한 게 계기였습니다.

 

여담이지만 영화 흥행에 성공한 감독이 평론가에게 ‘한국 영화감독 총서’ 같은 시리즈를 제안한다는 게, 지금으로서는 굉장히 낯선데요. 이러한 충무로 의식(?) 혹은 한국영화인들의 공동체(?) 같은 게 지금은 매우 낯설게 느껴집니다. 한 평자는 「기생충」(2019)의 국제영화제 수상에 대해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80년대에 미국영화 직배 반대 투쟁이, 90년대에는 스크린쿼터 수호 투쟁이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다 같이 모여서 무언가를 지키려고 하는 공동체 의식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기생충」에 대해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작이라는 평가가 많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기생충」은 시작이 아니라 하나의 끝을, 무언가 끝나는 모습을 보여준 게 아닐까 싶다.” 저는 이 공동체 의식의 바탕에 세계영화로의 성장이라는, 성장서사가 공유되었던 게 아닐까 하는데요. 그리고 그 성장서사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한 게 바로 태흥제작사와 임권택인 건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평자의 말처럼 「기생충」은 성장 서사를 마무리하는 끝(end)이라, 우리가 그 시대를 볼 수 있는 시계가 마련된 것도 같습니다. 참고로 제가 말한 ‘이 평자’는, 이제 한국영상자료원장이 되신 김홍준 감독님입니다.


아무튼 정성일은 「길소뜸」의 한 장면에 대해 임권택에게 물었는데, 임권택은 “그게 한국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정성일은 그날 몸이 안 좋다고 거짓말을 하고 인터뷰를 끝낸 후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 길에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내가 이제까지 영화를 보고 책을 읽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도대체 내가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다고 해요. 정성일 평론가에게 임권택은 그의 영화觀을 바꾸는 ‘사건’이었던 거죠. 그런데 정성일 평론가는 임권택의 ‘영화’에 대한 질문을, 모두 사회인 임권택의 인격에서 답변을 찾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영화의 문제를 묻고 삶의 문제에서 답변을 받는 거죠. 이러한 측면은 정성일 평론가가 감독한 「녹차의 중력」(2019)과 「백 두 번째 구름」(2019)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거든요. 임권택이 차를 내려주는 장면을 기다려야 한다거나, 다큐멘터리의 종반부에 “영화는 살아온 만큼 찍는거요,” 같은 임권택의 말을 삽입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저에게는 뭐랄까 정말 관념을 흔드는 사건으로서 정성일의 임권택에 대한 에로스처럼도 느껴지는 한편, 정성일 평론가가 길을 잃는 계기가 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물론 「백두 번째 구름」(2019)이 임권택 영화에서 리듬의 중요성을 일깨우고는 있지만, 인격이나 한국 사람의 도덕 같은 측면이 임권택 영화를 임권택으로부터 못 구해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여하간 이제 임권택의 볼 수 없는 영화들로 되돌아가봅시다. 한편으로는 임권택의 「잡초」(1973) 이전 영화가 그리 많이 배포/공개되지 않았다면, 왜 그럴까요? 하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게 그러한 구분을 흩트리는 작품, 장면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소위, ‘작가’ 영화로 발견되기 쉬운 ‘조건’ 일반에 해당하는 것에 가깝겠으나, 많은 평론가들이 임권택 영화의 특권적인 쇼트 혹은 쇼트의 연계를 찾을 때, 그 특권성을 인격성에서 찾습니다. 가령, 「짝코」(1980)에서 두 행려병자를 무시하는 카메라의 패닝이라던가, 「길소뜸」(1985)에서 신성일을 따라가지 않는 카메라의 고정, 「춘향뎐」(2000)에서 춘향의 고문 장면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지는 카메라 같은 거죠.

 

이처럼, 주로 인격성과 연결되는 임권택의 특권적 쇼트는 「잡초」(1973) 전해에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명동잔혹사」(1973)에서 임권택이 연출한 「대결」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는 등장인물 희가 강간을 당할 때, 카메라는 평심을 잃고 흔들흔들 거리거든요. 생각해보면 「명동잔혹사」의 「대결」 앞에 위치한 두 영화 변장호 감독의 「시끄러운 것잉께」와 최인현 감독의 「갖고싶은 여자」의 결말에서 여성은 쓸 데 없이 죽습니다. 남자를 지키려고 몸을 던져 총알을 막지만, 바로 다음 탄환에 남자가 죽어버리고. 자신을 갖기 위한 두 남자의 싸움을 막기 위해 자살하지만, 바로 두 남자가 싸움 끝에 죽어버려요.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1971)와 「돌아온 자와 떠나야 할 자」(1972)를 통해 ‘손을 씻는’ 인물을 등장시킨 임권택은 무엇이 부끄러웠던 걸까요? 「시끄러운 것잉께」와 「갖고싶은 여자」와 달리, 「대결」에서 강간을 당한 희는 자살을 하지만, 상(김희라)는 조직을 일망타진하고 경찰에 자수해버립니다. 덕분에 소영은 평화로운 명동에서 이제 꽃집을 할 수 있게 되지요.




사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모두 임권택의 유명하지 않은 영화들이 더 유통되었으면 하는 제 사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임권택! 하면 「서편제」(1993), 「만다라」(1981)! 하지만, 저는 작년 ‘나도 프로그래머’ 이벤트를 통해 이해윤 의상감독님이 소개되면서 웹에 공개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1984)를 임권택 감독 영화중에 제일 좋아하거든요. 그 후로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를 극장에서, 혹은 최소한 좋은 컨디션의 파일로 보고 싶은 게 제 큰 소망이 되었습니다. 저는 어떤 영화를 어떤 환경에서 보고 싶다거나, 하는 소망이 없는데요. (「만추」(1966)를 보고싶다거나 신상옥의 북한 영화들을 극장에서 보고 싶긴 하지만) 「흐르는 강물을 어찌 막으랴」만큼은 극장에서 혹은 블루레이로 볼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이 GV를 계기로 바람이 이뤄지면 좋겠네요.

 

임권택의 세계는 넓어서 탐사가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한국 고전 영화의 새로운 감독들 찾고 싶기도 하지만, 우선은 임권택의 과대 대표되지 않은 다른 영화들도 보고 싶다는 생각을 소박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발표의 서두에서 일렀듯이, 저는 「하류인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풀어보고자 햇습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하류인생」의 형상조차 못 그릴 만큼, 아주 조금만 이야기한 것 같네요. 그것은 제 능력의 불찰이기도 하지만, 임권택의 세계가 제가 탐사할 수 없을 만큼 너무 광대하며 또 어떤 부분은 벽으로 가로 막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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