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서점 구경을 하다가 전라남도 학우 문예지인 '재목영암학우회'에서 발간한 『천황봉』이란 잡지를 발견했다.
http://jangseogak.co.kr/ez/mall.php?cat=002000000&query=view&no=81750
내가 검색해 본 바로는 어떤 도서관도 이 자료를 보관하고 있지 않다. 꼼꼼이 뜯어볼 수는 없지만 장서각문고 사이트에서 미리보기로 사진 몇 장을 제공하고 있는 덕에 1960년 발간된 『천황봉』 2호에 실린 영화감독 임권택이 쓴 권두언은 볼 수 있다. 내가 알기로, 이 글이 지면에 실린 임권택의 가장 오래된 글이다.
그대로 옮겨 보자.
"여기,
둥그런 달이 솟는 천황봉이 있다
천만년이고 말이없는 천황봉 말이다
파란 새싹들을 가슴에 안은채
내고향 전설의 새로운 페지를
침묵으로만 엮어가는 - - -
여기
천만년이고 말이없을 천황봉이 있다
하이얀 달이솟는 천황봉 말이다
1960.12.
임 권 택"
마치 시 같은 권두언의 구조는 단출하다. 천왕봉을 묘사한 첫 행과 마지막 행 사이에 그것이 고향의 전설의 “페지”(아마도 페이지)를 엮어간다는 행을 삽입하고 있다. “달이 솟는”으로 시작하여 “달이 솟을”으로 끝맺는 이 권두언에서 천황봉은 일종의 신화적인 영토다. 천황봉은 고향의 전설[흔히 교과서에서 배우듯 전설은 역사에 근접하다]을 엮어가는 상위의 행위자로 과거부터 있어왔거니와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임권택 그 자신이 인본주의를 운운하고 강변하지만 종종, 이따금, 아니 그보다는 자주 저 멀리 배경에 위치한 산(山)들이 그의 영화의 주인공처럼 느껴졌다. 드라마에 몰두하지 않고 이야기를 뭉뚱 끊어내는 방법도 산의 (無--라는 괄호를 칠 수 밖에 없을 만큼 우리 지각의 폭을 넘는)시간성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사람들이 오르고 미끄러지고 숨고 도망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결코 서사(혹은 인간사라고 해도 좋겠다)에 연루되지 않는 [신화적] 풍경으로서 산. 이러한 맥락에서--비록 7-80년대의 '대표적 작품'으로 견강부회하는 것에 가깝겠지만--임권택의 이 권두언은 새삼 흥미롭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