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에 올렸던 「임창정, 설사도 참아서 변비로 만드는 남자 」와 「탄핵과 임창정」을 이어 붙인 글임.)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는 더글라스 서크의 〈슬픔은 그대 가슴에〉를 보면서 울었던 일을 말하며 이렇게 밝혔다. "두 사람[영화의 주인공들]을 도울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세계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한 말이다. 이 점에서 극장에 있던 우리는 모두 울었다. 왜냐하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우니까." 파스빈더의 말은 장르로서 멜로드라마를 관통한다. 하나의 도덕극인 멜로드라마: 세계는 주인공들을 핍박하는 구조로 단순화 되고, 그 단순화된 세계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에 비해 주인공들과 이를 보고 있는 "우리"는 너무 작고 무력하다.
지난 12.3 계엄을 통과하면서(통과 했을까?) 사석에서 유독 많이 말한 주제는 자연히 계엄과 그 여파였다. 다만 사회인이나 자연인으로서는 그 주제에 대해 말하길 삼갔다. 열심히 말을 한 것은 '영화평론가로서의 나'였고, 그때 '계엄과 그 여파'는 '볼거리로서 윤석열/김건희의 매혹'이었다.
그 계기는 25년 1월 3일 체포영장을 집행하러 윤석열의 관저를 공권력이 둘러싼 상황에서 '고양이 뉴스'가 찍은 위의 영상이다. 이 영상이 실시간으로 공개된 방식은 아래와 같은 비디오 형식이 아니라 트위터에 업로드된 gif였다. 배경으로 깔린 소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영상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멜로드라마/영화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뉴스에 실시간으로 송출되고 있는 관저의 소리--확성기의 전자음, 경찰과 시위대의 악다구니, 리포터의 다급함--와 이미지--체포 팀의 일사분란, 이를 좇기 위한 카메라의 다급함, 콘크리트의 회색--와 대비되는 세계 같았다. 그 강렬한 대비를 알면서 보게 되는 스코프로 비친 조용한 세계, 나무는 울그락 불그락 하고, x-y-z 축의 계산도 조형적으로 이루어진 쇼트는 다시 보아도 감화력이 있다.
영화평론가 윤아랑이 여러차례 지적한 것이지만 윤석열도 자신의 (카메라로서도) 노출을 놀랍도록 잘 장악했다. 12.3 계엄 이후 정말 오랫동안 윤석열은 녹화된 이미지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동안 국민people들이 볼 수 있었던 건 빼꼼 나온 뒷통수 뿐. 이렇게 이미지의 노출을 조정하는 윤석열은 그의 지지자에게 '영웅'이 되어 있었다. 그는 공화정의 위기를 직면하고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가 되었고, 속옷바람으로 체포를 거부하는 마지막 화신이기도 했다. 영웅이란, 주변을 비극(悲劇)으로 만든다. 김건희는 구속 후 첫 소환조사를 받았을 때 변호인단에 돌연 "내 남편과 다시 살 수 있을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레거시 미디어를 건너뛰고 유튜브[라는 외설적 민의民意]와 직접 접촉하는 그들의 이미지의 힘은 대단하다.
그리고 정반대의 판본이 있다.
계엄 다음 날 아래 인용한 글을 적었다가 지웠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우발적이라 느꼈던 계엄이 아주 장기간 계획되었음이 속속 밝혀졌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런 방식의 유추가 '정치'에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뉴스에 떠도는 것처럼 조현병이니 알코올 중독이니 뭐니 하는 말들은--탄핵 정국이 '7공화국'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어쨌거나 정치에 무용할 터니까.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에게는 공공의 언어로 사유할 수 없는 개인적 특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리고 그 개인적 특성을--사후적이다만--비범하거나 웅장한 악의 모습으로 묘사하기는 요원해 보인다. 엉(덩이)탐(정) 피규어처럼... 거기에는 부인하기 어려운 우스꽝스러운 부분이 있다.
"실천적 정치철학 교육이라고 우스갯소리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공포와 걱정을 거둘 수 없었던 어제의 소동이 한풀 꺾이고 나니, 합리성 이전에 최소한의 전략적인 요건—가령 지역구 위원들이 서울에 있지 않은 금요일에 계엄을 선포한다는 방식의—도 갖추지 못하고 세 시간 만에 그르친 이 계엄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생각하게 된다. (현장에는 육중한 사실성과 알려지지 않은 영웅적 결단들이 무수했을 터지만) 곰곰이 생각해보아도 이 계엄의 배경은: 샤머니즘과 알코홀릭, 술자리에서나 할법한 동창 간의 모략 그리고 무엇보다 애인의 사수다. 코스프레를 방불케 하는 옷차림의 그녀를 지키기 위해 나라와 함께 동귀어진을 택하고는 하루종일 얼굴도 비치지 않는 그(중국 관영매체는 이를 두고 “자신의 여자를 지키기 위해 세계를 적으로 돌렸다“고 말했다. 아! 협이여!), 이 삼류 로망스의 효과로 발생한 위뷔왕적 소극 앞에서… 정말로 얼굴을 일그러뜨려 웃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까 계엄 이후 윤석열/김건희의 이미지가 누군가에겐 비범하고 비장하며 비극적이라면, 누군가에겐 범박하고 우스우며 하찮다. 하나의 표상으로서 윤석열/김건희를 대하는 온도는 이토록 차이가 크다.
임창정 역시 그러하다. 누군가에겐 임창정은 '창정이형'이지만, 누군가에겐 한남발라드 JOAT다. 그리고 그 임창정이 한국에서 처음으로 윤석열 역할을 맡은 배우(〈게이트〉)라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윤석열과 임창정은 모두 (한국인에게) 이미지의 갈림길이다. 나는 이것이 오늘날의 가장 비평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며 아래 글을 썼다.
https://ma-te-ri-al.online/archive/1517/
즐거운 추석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