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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은달 Jun 13. 2024

너는 나에게로 와서

지난주까지 개식용 종식 특례법에 따라 신고받은 개농장을 다녔다.



누군가에겐 이 일이 생업이자 밥줄이요 생계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함부로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농장에 다녀온 날은 드니 빌뢰브의 영화를 보고 난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개농장의 개들은 앉기는커녕 제대로 서기도 어려운 뜬장에서 태어난다. 가로 1.2m 세로 0.8m 케이지에 20kg에 가까운 잡종견들이 적게는 한두 마리 많게는 5마리씩 갇혀 살아간다. 개들은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처럼 산다. 수컷들은 기운 없이 자빠져있거나 하루종일 암컷 등에 올라타 있고, 암컷들은 전부 교배 중, 임신 중 아니면 수유 중이다. 사형수에게 특식이 허락되는 날은 죽기 전 날이라고 하던가, 개농장의 개들이 뜬장을 떠나는 날은 그들이 죽는 날이다.  



어떤 농장의 개들은 사료를 먹지만 대부분은 짬밥을 먹고 그조차도 못한 개들은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다. 음식물 쓰레기를 끓여서라도 주는 곳은 양반이다. 부패한 쓰레기 그대로 먹는 개도 있으니 말이다. 한평생 뜬장에 갇혀 폐기물을 먹은 개를 잡아 보신탕을 끓인다. 단 한순간도 건강하게는커녕 정상적으로 살아보지 못한 개다. 그런 고기를 먹고 보신을 바란다니 어불성설이다.



온종일 도사견들의 짖는 소리와 지독한 악취에 시달리다 집에 가면 하얗고 작은 우리 집 개가 있다. 1포에 33,000원씩 하는 알레르기 사료를 먹고, 계절에 맞춰 옷을 갈아입으며, 짱짱한 매트리스가 깔린 침대에서 나와 함께 자는 우리 집 강아지 말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는 김춘수 시인의 시가 떠올랐다.


아무리 불공평한 것이 세상이라지만 불릴 이름이 없다는 것만으로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한다. 이 정도의 불공평함은 불의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싶어 진다.



엄밀히 말해 이런 불공평함이 개농장만의 문제는 아니다. 닭농장의 닭들도, 돼지농장의 돼지들도, 불행하기는 매한가지다. 도축되기 위해 길러지는 동물들은 결국 다 마찬가지이다. 한평생 제대로 햇빛을 쬐지 못하고 맘껏 걷지도 뛰지도 못한다. 신선한 바람을 맞으며 바깥구경이 허락되는 유일한 순간은 도축장으로 실려가는 순간이다.





동물복지라는 말은 왠지 유난스럽다. 인간복지도 완전히 실현되지 못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당장 고기를 먹지 말자고 주장하기엔 야식으로 시켜 먹은 치킨은 달콤했고 회식 때 구워 먹은 삼겹살은 고소했다. 일단 나부터 비건이 되지 못하는 판에 가축의 사육과 도축에 대해 무작정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현재의 축산 산업을 바꿔야만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이 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인간이 약자를 대하는 방식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식용 개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있다. 이 날갯짓이 어디에 토네이도를 일으킬지는 아마 위정자들도 다 알 수 없으리라. 이미 나비는 날아올랐고 세상은 변해간다.




나는 아직도 자연을 알고 있는가? 나는 나를 알고 있는가? -- 더 이상 말하지 말자. 나는 사자(死者)들을 내 뱃속에 장사 지낸다. 외침, 북소리, 춤, 춤, 춤, 춤! 백인들이 배에서 내리던 시간조차 보이지 않는다. 나는 무(無) 속으로 떨어지리라.
배고픔, 갈증, 외침, 춤, 춤, 춤, 춤!


아르튀르 랭보,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다섯 번째 시 '나쁜 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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