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력보다 중요한 현실 감각
관련 전공을 했다 한들, 어느 업계든 업직종 전환이 쉽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교육업계에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분야가 있지만 내가 학원 강사에서 연구 개발자로 업직종 전환이 가능했던 것은 수업 경력과 대학원 진학으로 인한 교원자격증 교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학원 졸업 후, 가장 먼저 몸담았던 곳은 이름만 들으면 모두 다 알 만한 교과서 출판사의 에듀테크 사업부의 콘텐츠 기획팀이었다. 이름만 듣고 ‘유명한 곳이니 월급은 밀리지 않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른 곳이기도 했다.
요즘 학생들은 태블릿 PC와 같은 탭을 활용해 학습하는 것이 매우 익숙한데, 이 탭에 담을 콘텐츠를 제작하는 것이 에듀테크 사업의 일환이다. 학교에서도 디벗(디지털+벗의 줄임말)이라는 스마트 기기를 활용하긴 하지만 교육청과 학교 재량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많아도 한 과목 정도 사용하는 게 일반적이다. 따라서 공교육 현장에서의 미래 전망은 알 수 없으나, 가정에서 자기주도학습용으로 활용도는 높은 편이다.
에듀테크 기업의 콘텐츠 기획팀에서 근무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기계 특성을 이해하고 기획하는 능력
준수한 PPT 활용 능력
태블릿 PC가 구현할 수 있는 교육 콘텐츠는 한정되어 있다. 생각보다 많은 걸 담지 못한다. 특히 전국에서 사용한다는 것을 전제하면 더더욱 난도와 전달 형태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러다 보니 기계를 잘 다루고 그 작은 화면 안에서 담아낼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기계까지 잘 다루지 못하면 애로사항이 생긴다. 이는 PPT 활용 능력과도 이어지는데, 콘텐츠의 흐름을 설명하는 스토리보드를 짤 때 동작 순서를 헷갈린다거나 아예 빼먹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또한 각 사항을 세밀하게 구성해야 하기 때문에 PPT 활용에 익숙해야만 업무 할애 시간이 단축된다. 따라서 IT 개발 직군과 관련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콘텐츠 기획 업무를 수행하는 데 유리할 수 있다. 내가 원하는 콘텐츠 구현이 가능한지 미리 생각해 보고 기획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 회사에서 일하기 전에는 내가 기계에 익숙하고, PPT를 제작하는 데 능력이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고 느꼈으나 실제로는 아니었다. 내가 개발하고 싶은 콘텐츠는 개발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고, 어렵다고 까이기 마련이었다.
특히 이미 정해진 틀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의외로 새로운 방식에 대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가 많았다. 이런 점이 나의 자존감을 떨어뜨렸고,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했다.
학원 강사 시절, 내가 근무한 곳은 자체 교재를 사용했기 때문에 나는 프로그램을 직접 연구, 수정한 경험이 있었다. 그때와 비교되어 에듀테크 사업부 안에서 온라인 콘텐츠를 개발하는 일이 나와는 더욱 맞지 않게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에듀테크 사업부가 아닌 지면을 활용한 교재를 연구, 개발하는 팀으로 이직을 했다. 이전에 학원 강사로 근무하며 작업했던 것처럼 학원에서 직접 사용할 콘텐츠를 만드는 업무였다.
오프라인 교재와 콘텐츠(수업 교안 및 운영 지도안)를 개발하는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수업 운영에 대한 이해력
학습자의 수준 파악 및 교과서 분석 능력
‘수업 운영에 대한 이해력’이나 ‘학습자의 수준 파악’은 결국 현장에서 직접 강의를 해 본 실무 경험에 의해 길러진다. 그렇기에 교재 및 콘텐츠 개발 업무를 수행하려면 실강의 경험은 필수적이다.
실제 우리 팀에 대상 연령대의 학습자를 가르쳐 본 적 없는 팀원이 있었는데, 업무 수행에 매우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마감을 항상 넘겨 다른 팀원에게까지 피해를 주기도 했다.
만약 강의 경험이 없지만 ‘교과서 분석 능력’이 뛰어나다면 이 업무를 고려해 볼 수 있다. 교육대학원이나 사범대를 다녔다면 교육과정상 교과서 분석이 딱히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교과서 분석 능력을 기르고 싶다면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 교과서를 살펴보거나 논문 등을 검색해 보길 추천한다. 이를 통해 연령대에 맞는 어휘를 사용하고 수준에 맞게 학습 활동의 난도를 조절해야 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그렇다면 교재, 콘텐츠 연구 개발자로 근무할 때 장점은 무엇일까?
평범한 근무 환경 및 복지
포트폴리오화할 수 있는 결과물
학원 강사로 근무한다면 일반 직장인들과는 다른 스케줄로 움직이는 게 대부분인데, 교재나 콘텐츠 개발 직군은 남들과 똑같은 시간에 출퇴근할 수 있다. 연봉도 학원 강사보다는 좋은 편이고, 안정적인 편이다.
또 내가 만든 교재나 콘텐츠가 세상에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포트폴리오화할 수 있는 결과물이 쌓인다. 교육업계 이직에서는 이 부분을 중요하게 보는 것 같다. 어떤 교재를 만들었는지에 따라 내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고 이직의 폭도 넓어진다.
하지만 교재, 콘텐츠 연구 개발자로 근무할 때에도 단점은 존재한다.
과중한 업무량
창의력보다 중요한 현실 감각
정규직으로 근무했을 때에도, 외주 프리랜서로 주 1회 다른 교육 기업에 출근했을 때에도 대부분의 교육업계 연구 개발자들이 과중한 업무량을 소화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치면 평범한 근무 환경과 연봉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냐는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다.
이 직군은 기본적으로 마감을 달고 살아서 그런 것 같다. 정해진 시일이 매우 타이트한데 일을 소화하는 인원이 많지 않다. 그러다 보니 야근을 하는 사람도 많고 퇴근이 늦다.
사람이 잘 안 뽑힌다는 이유로 인력 충원이 어려운 분야이기도 하다. 실무자는 마음에 들어 하더라도 임원 면접에서 많이 떨어지는 경우를 왕왕 보는데, 개인적으로는 인력 충원을 막기 위해 일부러 떨어뜨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연구 개발자라고 하면,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도출해 내는 창의력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 보면 가장 중요한 건 현실 감각이었다.
학습자를 교육하는 대상이 교사인지 학부모인지, 혹은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한지.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인지, 교육 소외 지역인지 혹은 전국에서 사용할 것인지 등 하나하나 세부 사항을 고려하다 보면 결국 창의력보다는 학습자가 소화할 수 있는 활동을 선정해야 했다.
너무 어려운 문제와 너무 쉬운 문제의 중간 정도를 찾아 프로그램, 콘텐츠를 개발해 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연구 개발자가 된 뒤에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