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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nkwell Apr 18. 2023

구원자들

3월, 영화일기

03/06 <더 웨일>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점

찰리(브렌든 프레이저)와 리즈(홍 차우). 두 사람의 2인극이라면 어땠을까. 혹은 리즈의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되는 극이라면 어땠을까. 일주일 내 죽어도 이상할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찰리와 그 사실을 매섭게 일러주면서도 찰리의 품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정크푸드를 안겨주는 리즈. 두 인물의 관계성만으로도 <더 웨일>이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차고 넘쳐 보였다. 다방면으로 보아도 찰리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식음을 전폐하다 세상을 떠난 애인과는 정반대로 과도한 식음으로서 자신을 파괴하는 이력까지 빈틈없이 이기적이다. 반면 리즈는 오빠의 죽음에 이어 오빠의 애인이었던 찰리의 다가올 죽음까지 수습해야 하는 사람이다. 위태로운 관계의 결말을 예측하면서도 오빠를 함께 애도할 사람이 리즈에겐 더 절실했던 걸까. 찰리에겐 바이블과 같은 딸이 쓴 에세이라도 있었지, 리즈에겐 무엇이 남아있었던 걸까. 리즈의 일상과 마음을 궁금해하지 않는 건 관객으로서 뭔가 놓치는 게 아닐까. 직업인으로서 찰리 외에도 돌봐야 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을 리즈의 삶이 나는 더 궁금하다. 영화를 한 번 더 보고 싶다기보다는 원작 연극이 보고 싶어졌다. 볼 수 있다면 그땐 리즈를 중심으로 <더 웨일>을 따라가고 싶다. 영화의 말미, 찰리와 엘리(세이디 싱크)를 위해 리즈가 잠시 자리를 비웠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어떤 인물은 퇴장과 동시에 존재감을 드러낸다. 내겐 리즈의 빈자리가 고래가 지나간 자리처럼 보였다.


03/09 <스즈메의 문단속>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점

다짜고짜 폐허의 위치를 묻는 소타(마츠무라 호쿠토)를 보면서 언젠가 주워들었던 책 제목이 떠올랐다. 레베카 솔닛의 <폐허를 응시하라>. 읽고 싶어 다가가기보다는 모른 척 지나가고 싶은 제목에 가까워 여태 읽어본 적은 없다. 그 책의 원제는 <지옥에서 세워진 낙원>이라고 한다. 아직 <날씨의 아이>는 보지 못했지만 <너의 이름은>부터 이번 작품까지,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재난을 직간접적으로 겪으며 떠올렸던 낙원들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곳에 관객들을 초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마운 일이다. 스즈메(하라 나노카)는 다사다난한 여정 중에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중 한 친구는 스즈메에게 이런 말을 했다. "스즈메는 비밀투성이에 마법사 같아. 그래도 왠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이 말은 감독에게 그대로 돌려줄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의 마법 같은 작화는 폐허도 자칫 아름다워 보일 만큼 언제나 눈부시고 그가 창조한 세계의 메시지는 점점 더 살갑게 다가온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오늘 하루도 별일 없을 거라고 믿기에 숨 쉬듯 내뱉는 말, "다녀올게"와 "다녀와" 같은 말들이 세상에서 사라지질 않길 바라는 간절함이 담긴 수작이다. 예술이 세상을 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다친 사람이 간직한 원망의 불씨를 소화시킬 수는 있다고 믿는다. 나는 신카이 마코토가 예술가로서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고, 그냥 믿고 싶다. 아뢰옵기도 송구한 히미즈의 신이여, 의심 따윈 문밖으로 던져버리겠습니다.


03/23 <소울메이트>_메가박스 상암월드컵경기장점

민용근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을 보기까지 이토록 오랜 시간이 걸릴 줄 몰랐다. 리메이크 작품일 줄은 더 몰랐다. 그 작품의 원작이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일 줄은 더더욱. 그래도 우려보다는 기대가 앞설 만큼 작품의 성격과 감독이 잘 어울려 보였다. 내게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리메이크된다는 소식에 반색보다는 반감이 들었었다가 김종관 감독이 연출한다는 소식에 왠지 모를 안도감이 들었을 때와 비슷한 경우다. 감독의 이름을 먼저 언급하긴 했지만 사실상 <소울메이트>는 캐스팅이 제일 중요한 영화였고 결과적으로도 캐스트밖에 보이지 않는 영화가 되었다. 어쩌다 보니 여태 김다미 배우가 연기하는 것을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는데, 왜 그가 꾸준히 화제작들에서 주요한 배우였는지 알아차리는 계기도 되었다. 특히, 하은(전소니)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을 감지한 순간에 미소(김다미)의 얼굴에서 온갖 감정들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칠월(마사순)과 안생(주동우), 두 사람의 이야기임에도 안생 쪽으로 다소 치우친 것처럼 보였던 원작 영화와 달리 한국 버전은 균형감을 잘 유지했다. 이 지점에선 전소니 배우의 공이 크다. 배분이 뛰어났다기보다는 배우의 역량으로 메꿔진 안정감으로 보였다. 네가 되어 그리는 자화상. 원작 영화를 보면서는 떠올릴 수 없는 문장이다. 미소와 하은이 그리는 아름다운 그림들을 보면서 살면서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나의 소울메이트를 머릿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잘 지내나요... 대체 어디 계시죠...


03/31 <길복순>_넷플릭스

그렇게 어머니가 된다. 2023년 1분기 전도연의 활약을 굳이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일타 스캔들>의 남행선과 <길복순>의 길복순은 여러모로 같이 두고 얘기할만하다. 내게 전문가적 필력이 있었다면 행선과 해이(노윤서), 복순과 재영(김시아) 혹은 영지(이연)가 보여준 관계성을 엮어서 평론 하나를 완성하고자 시도했을 것이다. 그래봤자, 이동진 평론가가 <무뢰한>을 보고서 남긴 한줄평을 이길 순 없었을 테지만. "전도연이다. 전도연이다. 전도연이다." 배우의 이름만을 세 번이나 언급한 이 한줄평은 언뜻 게을러 보이지만 사실 이보다 적확할 수 없으며 나는 <길복순>을 보면서 속으로 "전도연"을 세 번이 뭐냐, 삼십 번은 외쳤던 것 같다. <무뢰한>의 김혜경과 <불한당>의 한재호(설경구)를 두고서 쓴 변성현 감독만의 팬픽 같기도 한 이 작품은 <너는 내 운명>의 은하와 석중(황정민)을 두고서 쓴 팬픽처럼 짓궂게 시작한다. 가벼워 보이지만 감독의 으름장이기도 하다. 이런 영화니까 볼 테면 보고 말라면 말라는 감독의 도발에 넘어가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나뉠 것으로 보인다. 킬러 전도연이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나는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갑작스레 달려든 동료들의 단체 "피 묻은 칼"로부터 겨우 살아남은 복순이 귀가 후 재영과 대화했던 장면에선 울기까지 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인물이 상대방 모르게 눈물을 훔칠 때마다 늘 속수무책이 되고 마는데, 이번에도 당했다. 장르적으로만 봤을 땐 모녀 간 갈등 및 해소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게 누군가에겐 반감 요소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성격이 달라 보이는 드라마를 이만큼 산뜻하게 섞는 것도 능력이다. 변성현 감독은 배우를 특정 장르에 적극 끌어들이면서도 배우가 가진 강점을 드라마로 잘 풀어낼 줄 아는 연출가 같다. 그가 앞으로 어떤 영화를 내놓을지 보다 어떤 배우와 작업할지가 더 궁금할 지경이다. <길복순>을 계기로 그와 작업하고 싶은 여성 배우들이 많아졌을 거라고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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