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등원을 한 아이의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전의 나였다면 놀랐을지도 모르지만, 나 또한 항우울제를 비롯한 여러 항정신성 전문 의약품을 처방받고 있었기에 알려주셔서 감사하다, 염두에 두고 있겠다고 대답했다. 실제로 아이는 나와 반년 넘도록 수업을 하고 있다.
아이는 항상 ‘저 집중하고 있나요?’라고 물어본다. 그럼 나는 잘하고 있다고 격려한다. 아이가 스스로 수업을 열심히 듣겠다는 의지가 있어도, 뇌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게끔 잠자코 놔두지 않는다. 마치 내가 울지 않으려 해도 눈물이 주룩주룩 흐르던 날처럼, 몸을 일으키려 해도 움직일 수 없어 자기혐오가 넘치던 날처럼 말이다. 아이는 수업 중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춘다. 내 목소리를 차단하고, 자기만의 상상으로 떠난다. 노래를 부를 때도 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아이를 혼내거나 나무라지 않는다. 천천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고 기다린다. 하지만 그룹 수업이다 보니 결국 뒷말이 나온다.
엄하지 않은, 착한, 그래서 아이들을 컨트롤 하지 못 하는 강사. 그게 지금 내 이미지일지도 모른다. 종종 학부모님들께 전화가 온다. 몇몇 아이들의 성향으로 수업에 지장이 갈까 걱정하시는 마음에서다. 그때마다 갈등에 선다. 나는 교사가 아닌 강사이며, 시간당 돈을 받고 아이들에게 해당 과목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서비스직이다. 좋은 결과를 내고, 나의 업적을 만들어 줄 아이를 붙잡는 게 훨씬 이익이다. 내 책임감은 아이가 아니라 학원 이익에 머무름이 당연하다.
다행히 학원은 나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었다. 학원 측의 배려 덕분에 최선의 선택으로 일대일 수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그룹 수업에 큰 영향을 주는 아이들에게 일대일 수업을 제안했다. 의외로 상당 수의 학부모님들이 일대일 수업을 거절하셨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일대일 수업을 하게 된 아이들은 자신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울적한 얼굴로 등원한다. 그러나 수업 중 간간히 웃고, 즐겁게 집으로 돌아간다.
단둘이 있으면 아이를 더 기다려줄 수 있다. 아이에게 ‘시끄러워’, ‘너 때문이야’, ‘선생님, 쟤 또 춤춰요.’하고 질책하는 친구들도 없다. 일대일 수업은 아이가 그룹 수업에 적응할 수 있게끔 하는 데 목적을 둔다. 절대 아이를 얌전하게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나는 장난꾸러기예요.’, ‘나는 다른 학원에서 쫓겨났어요.’, ‘나는 문제아예요.’ 같이 주변에서 만든 낙인을 지우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