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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모리 Nov 23. 2020

불행 배틀

내 불행은 어디서 오는가

사람은 저마다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 6살 난 어린이는 오늘 먹은 젤리를 내일 또 먹을 수 있을지 고민이고, 80세 노인은 하루 해가 지는 게 고민 일 수 있다. 어떤 고민이 더 무겁냐 가볍냐는 당사자가 아니라면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사춘기 때는 얼마나 고민이 많았던지, 고민에 고민이 꼬리를 물어 밤새도록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그때 주위를 둘러보면 나 말고도 내 친구들 모두 그런 시간을 보냈더랬다. 우리는 자랐고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면서 그동안 했던 고민들은 일부 해결이 되기도, 전혀 해결이 되지 않기도, 혹은 애초에 시작이 되지 않기도 했다.


오랜만에 연락이 온 동생 F는 고민이 많은 친구다. 그도 그럴게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안타깝게도 이해가 된다. 아버지는 그가 학생일 때 돌아가시고 위로는 형제가 있지만 모두 출가 해 본인들 인생을 살고 있다. 어머니는 철이 없어 여러 가지 사고를 치고 다니시는데 최근에는 아파 수술을 해야 하는 지경에 와 있다. 이런 것에서 오는 모든 경제적, 정신적 부담 F가 홀로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다.(본인 피셜)

물론 그를 이해한다. 그가 얼마나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지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F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최선을 다해 들어주고 공감해주며 밥을 사고 위로 해 주었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감정적, 물질적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F는 대화를 할 때마다 이렇게 자신의 불행을 끊임없이 성토했다. 처음 몇 번이야 물론 나도 그의 어려운 상황에 마음이 아파 충분히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이 가능했으나, 사람인지라 같은 푸념이 세 번 네 번 반복되면 리액션에 영혼이 점점 빠지는 것이다. 기계같은 리액션을 반복하다가 종국에는 그에게서 오는 연락을 슬그머니 피하기도 하고 말이다.


몇 번에 걸친 그와의 대화에서 나는 기시감 같은 것을 느꼈다. 그의 불행은 멈추지 않고, 연속적으로 찾아오며 온 세상의 불행 중 본인이 겪고 있는 상황이 가장 어려운 것처럼 이야기하는 듯했다. 얼마나 힘든지를 수치로까지 이야기한다. 그는 본인의 불행을 나에게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불행을 과시하며 뭔가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통상적으로 사람은 스스로의 성과를 통해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본인의 성과를 칭찬받고 싶어 과시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가 불행을 통해 인정받고자 하는 부분은 과연 무엇일까?


나는 두 가지 정도로 그 이유를 추측한다.

첫 번째, 나의 희생의 숭고함을 알아달라.

성과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가 불행을 통해 과시하려는 성과는 일반적인 것과는 조금 다르다. 불행에서 오는 본인의 희생. 스스로가 얼마나 희생했는지를 어필하는 것이다. 이렇게 큰 역경 속에서 내가 포기해야만 하는 경제적인, 정신적인 이점들이 얼마나 컸던지 알아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당신이 나와 같은 불행을 겪지 않는데서 오는 죄책감 느껴지니?

그는 본인의 불행을 털어놓을 때, 화자는 그의 상황보다는 좀 더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가정을 한다. 그래서 화자가 얼마나 행운아인지, 같은 불행을 겪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지를 은근히 표출한다. 래서 나는 내 상황에 관계없이 그에게 은근한 죄책감을 강요받는 것이다. 어릴 때 반찬 투정을 하거나 밥을 남기면 부모님이 아프리카(선입견이 포함됨) 어린이들을 생각하라 던가 하는 맥락과 같다고 본다. 물론 나는 내 행복한 상황(있던 없던)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음에도 죄책감을 강요 받으니 더욱 기분이 좋지 못하다.


그의 행동을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아니다. 나 또한 내 불행을 과시했던 과거가 있었다. 인의 현재 상황이 혼자 해결하기 벅차다고 생각이 될 때 타인과 대화를 통해서 마음의 짐을 나누려는 시도를 한다. 따뜻한 공감과 격려가 필요해서다. 그런 따뜻함을 처음에는 너무나 감사하게 받다가 점차 그것에 중독되고 나면, 현상황을 탈피할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위로를 받는 것이 우선시 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위로를 여러 번 받고 나면 감정적으로 충족되어 생각은 둔해지고 오히려 앞으로의 상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만 같기도 하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해결된 문제는 아무것도 없다.

요즘은 문제가 생기면 앞으로의 계획이 서지 않는 이상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는다. 조언이 필요할 때는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에게만 종종 나누지만 불필요한 감정에 대한 토로는 자제하는 편이다.


내 방법이 무조건 정답 일 리 없지만, F가 감정적인 충족만을 위해 불행을 과시하는 방법은 그의 인간관계와 앞으로의 발전을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왜 그에게 직언하지 않는가 누군가 물어본다면, 어떤 부분의 겻들은(혹은 어떤 성격의 사람들은) 때론 스스로 깨닫지 않으면 전혀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애써 한 직언이 독이 되어 서로의 감정을 소모하고 할퀴기도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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