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며
(이 앞의 스토리인 신입사원 교육 때 일을 기록한 글을 실수로 삭제해 버렸네요ㅠㅠ)
3개월의 그룹 신입시원 교육+3개월의 IT법인 교육을 마치고, 악명 높은 SAP* FCM팀으로 배정이 되었다.
그 팀은 가장 많은 야근을 하기로 유명했다. 다행히 7명의 동기 중 나와 또 다른 동기 한 명이 같은 팀으로 배정이 되어 많은 의지가 되었다.
* SAP ERP는 대부분의 전 세계 대기업에서 사용하는 시스템으로, 전사의 업무 프로세스(자재/상품관리, 제조, 물류, 영업/판매, 재무회계)와 데이터를 관장
팀장님은 우리에게 1년간의 신입사원 육성계획안을 전달해 주셨다. 목표는 우리를 1년 내 한 모듈을 담당할 수 있는 주어니 컨설턴트 급으로 키우겠다는 것이었고, 그렇게 키우기 위해 어떤 자격증과 강의를 듣고, 어떤 계열사의 어떤 모듈 영역의 운영 업무를 어떤 단계로 담당하게 될지 플랜이 짜여있었다.
그리고 부서장님은 나와 동기에게 한 달간 밤 9시 전 퇴근 금지라고 공식적으로 못 박으셨다. 한 달간 우리에게 배정된 업무는 없었지만 낮에는 선배들의 교육을 듣고, 무슨 말인지 1도 이해할 수 없는 미니 프로젝트 미팅에 간간히 참석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나머지 시간은 지루하고 지루한 SAP동영상 강의를 주구장창 들었어야 했고, 회사 지원금으로 학원수강을 하며 3개월 내에 회계관리 2급 자격증을 따야 했다.
나에게 '듣는 강의'는 완전 수면제나 다름없었는데 그 SAP강의는 듣다가 정신줄을 놓쳐서 같은 구간을 수차례 반복해서 들어야 했다. 아마 15년~20년 전쯤 SAP동영상 강의를 들어본 적이 있는 분들을 알 것이다. 그 아저씨가 얼마나 무미건조한 톤으로 졸리게 강의를 하는지... 거기다가 팀장님은 성격이 급한 분이었다. 우리에게 내용을 속사포와 같이 설명을 한 뒤, 항상 그 끝에 "이해했지?"라고 묻곤 했는데 기세에 눌려 감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답할 수 없었다. 그러고 나서 나와 동기는 서로 '이게 무슨 뜻이야', '이게 이 말이었냐'라며 머리를 맞대어 이해해보려 했지만 '나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라고 끝나는 경우도 많았다.
해당 팀은 이미 많은 선배들이 줄줄이 퇴사를 한 상태였다. 한 달 정도 지나고 나와 동기에게 TR(자금) 모듈 운영 업무가 할당되었다. 이유인즉슨, 해당 업무를 담당해 왔던 선배가 2주 뒤에 퇴사를 한다는 것이었다.
SAP도 익숙하지 않은데, 실제 돈거래가 오가는 가장 민감한 자금 모듈 운영이 고작 부서배치받은 지 한 달 된 신입사원 2명에게 맡겨졌다. 2주간의 인수인계는 터무니없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인수인계와 실전은 다른 것이기에 시스템 교육이라는 건 대응해야 하는 과업이나 이슈가 생길 때마다 붙어서 제도식으로 배워나가야 했지만 그럴 상황이 되지 못했다. 한동안은 퇴사한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하다가 퇴사 2주 후부터는 선배도 우리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나는 이슈가 생기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우리 쪽 SAP와 연결된 펌뱅킹이나 금융사 IT 운영담당자에게 다짜고짜 전화를 걸곤 했다. 그게 그 사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기에. 처음엔 나를 측은지심으로 도와주다가 언젠가는 밑도 끝도 없이 전화한다는 말도 들었다.
다들 퇴사해 버렸기 때문에, 전 계열사 재무 시스템 운영과 프로젝트를 모두 대응하기에는 남아있는 2명의 선배는 너무 바빴고, 우리에게 가르침을 줄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룹 계열사 재무팀에서 발의한 프로젝트는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끊임없이 들어왔기에, 우리 팀은 6개월 이상되는 구축 프로젝트들은 비싼 PwC컨설턴트를 계약했다. 그래서 나는 SAP의 모든 것을 PwC컨설턴트로부터 배웠다. 컨설턴트가 곧 내 사수였고, 컨설팅회사에서 작업하는 모든 문서와, 컨설턴트가 일하는 방식을 그대로 흡수했다.
당시 나는 CO(관리회계) 모듈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FI(재무회계)와 달리, 관리회계는 SAP의 온갖 모듈의 데이터가 파이프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종점'이었다. 다른 모듈 영역에서는 개별 프로세스 단계에서 프로세스가 오류로 막히는 일 없이 처리되었는지 위주로 관리하다 보니 해당 프로세스 단계에서 데이터 오류가 있는 부분은 그냥 통과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발견되지 않은 데이터 오류로 정합성이 틀어지는 이슈는 월말에 CO모듈 담당자가 결산작업을 할 때 무조건 드러난다.
문제는 이 회사가 M+1일 오전 9시에 경영자에게 결산마감 실적 리포트가 올라가도록 KPI를 세팅해 두었다는 것이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매월 마지막 일자 매장 POS가 밤 10시~11시에 마감이 되면, 각 POS시스템으로부터 판매 데이터가 SAP시스템으로 수집되고, SAP에서는 그 데이터를 기반으로 말일자 매출 데이터를 생성한다.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지 않으면 매출량에 따라서 새벽 2시경에 마무리가 되고, 문제가 생기면 새벽 3시까지 진행된다. 이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관리회계 모듈 담당자 홀로 감당하는 업무 영역이다. 전월 1일부터 말일까지 수불부 집계까지 새벽 5시, 수불원가 결산까지 새벽 6시, 현업 재무팀의 데이터 검증/확정이 아침 7시까지, BI리포트 업로드 8시까지, BI리포트 조정/검증이 끝나면 9시가 되는 프로세스이다. 이 사이에 그 어떤 데이터 오류가 없어야지만 M+1 오전 9시 결산리포트 보고가 가능하다.
모든 대기업의 결산 담당자들은 저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정인지 모두가 안다. 하지만 이 회사는 그걸 KPI로 두고 있었다.
이슈는 모든 단계에서 발생한다. 수불집계를 했는데 수불부가 맞지 않다. 기초재고+입고재고-출고재고=기말재고여야 하는데 등호 양쪽의 값이 다르거나, 수불부의 기말재고 금액이 회계 장부의 기말재고 금액과 다르다. 프로세스를 담당하는 어떤 모듈에서, 한 달 중 어느 날, 사전 협의되지 않는 수불 유형으로 거래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90%다. 수불을 맞추고 원가결산을 한다. 수불부 결산원가와 회계장부 원가가 다르다. 어떤 거래에서 프로그램 설계 시 미처 파악하지 못한 변칙적인 원가 차이가 발생했거나, 수불부에서 세팅한 원가차이유형과 회계계정의 원가차이 유형이 딱 떨어지는 관계로 서로 상쇄되지 못하는 경우다. 이 경우는 오히려 수월하다. 회계계정으로 조정할 수 있는 부분이기에. 실컷 다 해결했다고 생각하고 재무팀에 확인해 보라고 넘겼는데, 재무팀에서 잘못처리한 무언가를 발견한다. 이 경우 어떨 때는 모든 걸 원복하고 수불집계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BI에 데이터를 올리면, BI리포트에서 또 어떤 이유로 값이 SAP와 맞지 않는다. 수불부에서 한번 틀어졌으면, BI에서도 틀어질 확률이 높다. 왜냐하면 앞의 모듈이 동의되지 않는 거래유형으로 처리한 데이터가, BI의 룰세팅에도 반영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여하튼, 위의 내용은 매우 넓은 관점에서 이슈가 발생된다는 것을 설명한 것이며, 한 달간 어느 모듈에서, 어떤 프로세스에서 잘못 처리한 데이터를 월말에 찾으려고 하면 어느 날, 어느 단계의 데이터부터가 문제였는지 바로 알 수가 없다. 새벽 3시부터 일이 틀어지면 건초더미 속에 바늘을 찾는 기분으로 온갖 데이터들을 뒤진다.
모든 모듈의 파이프라인을 결산 깔때기까지 연결해서 볼 수 있는 사람은 결국 IT결산 담당자밖에 없다. 문제해결의 key를 쥔 사람이 자기 영역이 아닌 곳까지 문제 시야의 영역을 확장해서 들여다보게 되기 때문이다.
새벽 5시가 되어도 원인을 알 수 없으면 부서장들도 초조해져서 내 등 뒤로 와서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물어보고, 지켜보니 등 뒤로 압박감이 느껴진다. 원인을 발견해도 문제 데이터만 손댈 수 없고 잘못 처리된 단계까지 프로세스를 거꾸로 취소해서 재처리해야 하는 경우들도 있다. 모든 이슈가 해결되고 M+1 저녁 6시에라도 결산 리포트게 경영진에게 발행되면 나쁘지 않은 하루다. 어떤 월은 M+1일을 넘기고 그다음 날 새벽까지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거진 30시간은 잠을 못 자게 된다. 악명 높은 팀답게, 그런 운영성 업무는 기본으로 깔고 가는 것이고, 신규 구축 프로젝트들도 동시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5년간 평균 수면시간은 4시간 30분이었다. (이놈의 M+1은 평일과 주말의 구분도 없었다.) 고작 20대의 나이에 매년 진행하는 건강검진 때마다 마음이 불안했다.
1년에 12번, 5년간 60번, 가끔 해외 프로젝트를 하고 돌아오면 한국 결산에 이어 시차가 뒤집어진 미국결산까지 매월 새벽에 내 생명을 갈아 넣는 작업을 해왔다. 덕분에 결산뿐만 아니라 다른 직무로 전환했을 때에도 데이터 상의 오류가 발견되거나, 새로운 프로세스를 집어넣을 때 머릿속에 잉크방울이 거미줄 같이 얽힌 프로세스로 퍼져나가는 이미지가 그려지고, 문제의 근원이 될 가능성이 높은 영역을 빠르게 짚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남들보다 오류를 더 잘 발견하고 더 잘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만큼, 시스템 오류라는 놈이 지긋지긋하고 넌덜머리가 났다. 특히 SAP라면 아주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5년을 버틴 것은 이것이 시작점이었다. 처음 부서배치를 받고, 며칠 뒤 팀장님과 1:1 면담 때 한 대화다.
나: "팀장님, 저는 SAP를 제 커리어로 가져가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팀장: "그래? 알았어. 그래도 최소 5년은 너가 이 직무에서 끝까지 가볼 수 있는 데까지 간다고 생각하고 해 봐"
SAP를 커리어로 가져가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대학생의 취업 준비 여기서 언급한 것처럼 특별히 IT영역을 타깃으로 정했을 때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기업 전용의, 기업 내부 프로세스를 관리하는 시스템에 커리어를 쌓아나가고 싶진 않았다.
그리고 5년의 마지막인 홍콩 프로젝트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곧바로 인사담당자를 찾아가 내년 조직개편 관련해서 새롭게 신설되는 정보전략기획팀으로 가고 싶다는 면담을 했다.
그러자 인사담당자는 5년 동안 쌓은 커리어를 버리는 게 될 텐데 아깝지 않냐고 물었고,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뇨, 아깝지 않습니다. 전 미련 없어요"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