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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준희 Sep 26. 2023

태안 예찬

후다닥 떠난 여행에서 얻은 행운

 멘탈이 붕괴될 것 같은 날이었다. 이런 날은 무조건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요새 나를 흔드는 걱정거리가 생겨서 여기저기 구조요청을 보냈다. 전문가의 도움이 절실했다. 혼자서 삭히며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는 병이 들고 만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다. 나쁜 일일수록 널리 나눠야 한다. 그래야 감당해야 하는 양이 줄어드는 것 같다.


 천리포수목원의 가든스테이는 누구에게나 한 번쯤 경험해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한국 최초의 사립수목원을 세운 민병갈 님은 한국으로 귀화한 첫 번째 미국인이다. 그는 한옥을 사랑해서 수목원안에 여러 채를 옮겨 놓았고 지금은 숙박시설로 운영 중이다. 그곳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에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눈앞에 펼쳐지는 수목원의 풍경이 그대로 나의 정원이 되는 환상의 체험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다른 숙박시설인 에코힐링센터의 큰 방이 하나 남아 있어서 당일예약 이벤트로 삼십 퍼센트 할인을 받아서 갔다. 꼭대기 층인 3층의 넓은 거실 창으로 천리포 해변과 작은 섬이 보였다. 기막힌 노을을 방에서 보았다. 안 좋은 마음을 안고 떠난 길이었는데 노을을 바라보며 안정을 찾았다.


 입실할 때 아침 정원 산책을 예약해 놓아서 일반 관람객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비밀의 정원을 숲해설사가 설명해 주며 두 시간 동안 안내를 해주었다. 그 안에는 민병갈 님의 거처였던 목련집이 있었는데 집 안으로 들어가서 보게 해주었다. 놀랍게도 한국의 고가구들이 가득했다. 그는 전생에 조선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 한복도 즐겨 입었다고 한다.


 산책이 끝나자마자 삼십 분 거리의 태안 성당으로 미사를 보러 갔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멋진 건축물이었다. 행복한 마음으로 미사를 드렸다. 앞, 뒤, 양 옆에 앉으신 연로하신 자매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기도문도 함께 보았다. 목요일에 성체조배를 하니 그때 오면 좋다고 하셨다. 아무 때나 와도 열려 있다고 또 오라고 하셨다.


 돌아오는 길에 '시골밥상'에서 점심을 먹고 식용유를 종이컵에 얻어왔다. 저녁엔 그 식용유로 옥도미를 노릇하게 굽고 상추와 치커리 쌈과 열무김치와 파김치를 푸짐하게 차려서 먹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더 잘 먹어야 한다. 그게 나의 삶의 방식이다.


 이틀 밤을 숲 속에서 보내니 생기를 얻었다. 다시 돌아가면 도로아미타불이겠지만 잠시라도 숲의 기운이 내게 머무른다면 그건 행복한 일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커피생각이 너무나 간절했다. 휴게소에서 맛없는 커피를 먹어야 하나. 길 옆에 어디 그럴듯한 카페가 없을까 하고 계속 생각을 하며 신호등에 걸렸는데 오른쪽에 '2세대 로스팅 장인 수제자 운영 / 태안커피집'이라는 현수막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핸들을 돌려 그리로 갔다.

 오전 열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이제 방금 로스팅이 끝났다고 잠긴 문을 열어주었다. 이 층으로 올라가니 마치 한남동의 어느 잘 나가는 카페에 들어온 것 같았다. 탁 트인 공간에 기다란 원목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고 마티스 그림이 걸려 있었다. 커다란 창 앞에 앉을 수 있도록 스툴이 가득 놓여 있었다. 안쪽으로 걸어갔더니 턴테이블과 마란츠 앰프가 놓여 있었다. 거슬리지 않는 음악이 흘렀던 것 같다. 젊은 주인장의 감각이 보통이 아니었다. 


 난 탄자니아를 너무 진하지 않게 드립으로 주문해서 한 모금 마셔보고 곧바로 반해버렸다. 물을 하나도 타지 않았다는데 이렇게 부드러울 수가 있나 싶었다.


   아까 만델링을 싫어하신다고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전에 만델링을 마셨을 때 심장이 쾅쾅 뛰었어요. 카페인이 많은 원두인가 봐요.


   아... 만델링은 단단한 원두라 고온으로 볶아야 하는데 온도가 충분히 높지 않았을 때 볶아서 카페인이 강하게 느껴졌을 거예요. 아주 예민하신가 봐요. 만델링을 카페인 때문에 싫다고 하시는 분은 처음입니다.

     ---난 예민하다는 말을 많이 듣고 살아요. 주변에서 다 알아요.


   예민한 거는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은 모르는 걸 아는 거니까 훨씬 많은 것을 아는 거잖아요.

   저도 예민한 편이에요. 그래서 조금 힘들어요.

   ---예민한 사람들에 대해서 정신의학과 교수가 쓴 책도 있어요. 예민한 사람들이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 

       성공한 경우가 많대요.


  브라질 커피가 카페인이 많고, 베트남 커피는 아라비카 원두가 아니고 로부스타여서 쓴 맛이 많이 나기 때문에 캐러멜등의 단맛을 첨가해서 먹는다는 것, 프랑스나 이탈리아가 다른 맛의 커피를 만드는 이유 등등 그는 커피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으며 맛보라면서 만델링과 코스타리카도 컵에 따라왔다. 사이사이에 지혜로운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을 던지곤 했는데 생각을 많이 하면서 사는 젊은이였다. 사실 지혜로움은 나이와는 무관하다. 

 난 드립커피를 맛있게 내리지 못해서 드롱기 에스프레소 머신으로 커피를 마신다고 했더니 갈 때 가져가라고 또 커피를 내리면서 드립커피 만드는 방법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난 얼른 핸드폰에 적고 사진도 찍었다. 드립커피를 즐겨 마시는 큰 아이를 위해서 분쇄한 만델링을 샀고 내 것으로는 킬리만자로 산 언저리에서 수확했다는 탄자니아를 골랐다. 그는 코스타리카 원두도 덤으로 주었다. 이야기와 커피를 함께 나누고 싶은 마음인가 보다. 유럽의 노상 카페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난 그에게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다. 좋은 이야기 많이 해줘서 고맙다고 태안에 오면 꼭 들러야 할 곳이 생겨서 참 좋다고 했다. 박이추 커피를 마시러 강릉에 가는 것처럼 '태안커피'로 사람들이 찾아오면 좋겠다고도 했다. 진심으로 한 말이었다.


 태안에 다녀오길 잘했다. 






#천리포수목원 #태안커피 #태안성당 #민병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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