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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준희 Dec 08. 2022

제주와 뒷산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서 벗어나 멀리 떠나 있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분리되어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바로 제주였다. 종종 내려가던 곳이었지만 며칠간의 여행이 아닌, 한 달 이상을 지내면서 제주 사람처럼 지내보기로 했다. 마침 미국 학교를 떠나서 집에 와 있었던 작은 아이도 아파트에서는 제대로 뭘 할 수가 없다고 제주로 가야겠다고 선언했다. 작은 아이의 전공은 작곡인데 시차 때문에 한 밤중이나 새벽에 줌으로 수업을 들어야 했고 과제곡도 써야 하는데 서로가 내는 소음을 공유해야 하는 아파트라는 공간은 모든 면에서 부적절했다. 나 또한 가족이 최우선이었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고 어떻게든 집이 아닌 곳으로 떠나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이렇게 한 마음이 된 작은 아이와 나는 눈부신 가을날에 제주로 갔다.


 남편의 친구가 할아버지 사시던 집을 말끔한 두 채의 펜션으로 재탄생시킨 곳에서 우리는 세 달 동안 묵기로 했다. 집 뒤 편으로 들어가면 이 천 평 정도 되는 귤밭이 있었고 집 앞에는 텃밭이 있었다. 주방 창문 앞에는 파라솔과 벤치도 있고 묵었던 사람들이 심어놓고 간 허브를 비롯해서 집주인 부부가 틈틈이 심어놓은 갖가지 꽃들이 만발한 곳이었다. 채송화, 금잔화, 장미 등등과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들이 집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화산암 사이사이에서 보기 좋게 피어 있었다. 오랜 세월 애정을 가지고 가꾸어 온 것이 드러나는 곳이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키 큰 팽나무에서는 동박새가 날아다니고 익숙한 모습의 이웃들이 늘 비슷한 시간에 오고 갔다. 텃밭에서 파와 고추를 가져와서 찌개를 끓이고, 담 옆에 있는 무화과나무에서 열매가 익었을 때를 기다리며 쪼아 먹으려는 새보다 간발의 차이로 먼저 따서 입에 물고는 무화과의 달콤함에 젖기도 했다.

 집주인은 왕사슴벌레를 잡아서 주기도 했다. 가을 지네가 기승을 부려서 집전체에 소독약을 뿌렸더니 못 견디고 죽은 것이었다. 숨은 끊겼지만 모습은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슴벌레를 앉은뱅이책상에 올려놓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책상 위의 물건들 중에 제일 멋진 사슴벌레는 윤기가 자르르 흘렀고 가는 다리에 실처럼 가는 발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집에 있을 때의 내 모습 같아 보이기도 했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죽어있고 발버둥 치며 벗어나길 바라지만 꼼짝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태말이다.

 나를 더 이상 방치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박제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었다.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걸 하면서 살아보기로 한 것이다. 더 이상 가족들에게 나의 시간을 다 내어주며 나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었다. 난 할 만큼 했다. 건강에 심각한 적신호가 깜빡였고 더 이상 미룰 수 없었다. 나에겐 쉼표가 필요했다.


 제주까지 내려왔으니 나의 삶은 바뀔 거라고 잔뜩 기대하며 제주에서의 나날을 즐겼다. 구경삼아 오일장에 가서 푸짐하게 장을 봐 와서는 유튜브 요리 채널을 보며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하고 밭에서 딴 싱싱한 귤과즙을 입안에서 터뜨리며 즐거워했다. 귤 따는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카톡으로 여기저기 보냈더니 신선 놀음 하고 있다고 눌러 살 생각이냐는 반응들이었다. 생각해 보니 제주에 집을 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귤밭입구의 후박나무 아래 화로에서 군고구마를 구워 먹을 때는 불멍의 시간을 보냈고 저녁에 동네산책을 나가면 반딧불이가 주위를 맴돌았다. 가끔 걸어서 곶자왈에도 다녀왔는데 온통 카메라로 담고 싶은 소중한 곳이었다. 먹고 걷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된듯했다. 유명한 독립서점에 가서 책을 여러 권 사 왔지만 방 안에서 책을 읽기보다는 바다에 가거나 동네를 걸어 다니는 것이 훨씬 좋았다. 책이 필요 없게 돼버리다니 집에서는 책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내가 변한 것도 같았다. 저녁 여섯 시만 되어도 온 동네가 잠에 빠진 듯 조용해서 우리의 취침시간이 빨라졌다. 그렇게 하루가 금방 지나갔다. 

 작은 아이는 자연의 소리만 들리는 곳에 있어서인지 예민함은 가라앉고 여유를 얻은 것 같았다. 새벽에 줌수업을 끝낸 날은 자전거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왔다. 줌으로 하는 레슨에도 이제 적응이 된 듯 곡 쓰는 것이 수월해진 것 같았다. 우리는 파라다이스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하지만 한 달이 넘어가면서 이제는 집에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하는 다른 색깔을 띤 생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집에 두고 온 야옹이 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고 시골의 고요가 점점 지루해졌다. 두 달이 되었을 때 예정보다 당겨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시 제주생활이 몹시 그리웠지만 이런저런 편리함과 쾌적함을 누리는 것으로 위로하며 마음을 잡았다. 제주생활이 아무리 좋아도 그곳은 우리 집이 아니고 집이 꼭 편하고 행복이 가득한 곳이어야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에서 지냈던 꿈같던 기억이 또 나를 흔들기 시작했다. 난 제주로 가버릴 궁리를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제주에서 지낼 때 그 앞을 지나며 부러워했던 바로 그 단지에 일년살이 집이 저렴하게 나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난 용감하게 일 년 살기를 실행에 옮겼다. 이번에는 차도 가지고 내려갔다. 불행히도 이런 들뜸은 잠시였다. 혼자서 지내려니 밤만 되면 무서워서 생전 없던 불면증으로 힘들었고 수시로 출몰하는 갖가지 벌레들에게 시달렸다. 개미떼가 집전체를 둘러싸기도 하고 악명 높은 제주 지네와 손가락만 한 야생 바퀴벌레 때문에 매일 비명을 질렀다. 게다가 여름으로 넘어가면서 태풍이 시작되었는데 서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바람이 불어대기 시작했다.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고립되어 지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잠시 날씨가 안정기가 되었을 때 도망치듯 차를 가지고 제주를 빠져나왔다. 일 년은커녕 두 달 만에 나의 찬란한 계획은 참패했다. 제주는 타지 사람에게 그렇게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의 제주병은 치유되었다.


 제주에 대한 로망이 사라져 버리니 나는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가라앉았고 몸이 불편해졌다. 어디로 또 도망치듯 갈 수는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든 여기 이 집에서 살 궁리를 찾아야 했다. 매일 바다를 가거나 전원 속을 누비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어쩌다가 아파트 뒷산에 다녀오면 몸이 가벼워졌던 것 같았다. 그래서 한 시간 코스인 뒷산과 아파트 단지 안을 거의 매일 걸었다. 미세먼지가 심한 날을 빼고는 비가 조금 내려도 걸었다. 작은 아이가 있는 동안 내내 함께 해주었다. 대단하게 아름답거나 특별한 곳은 아니지만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을 매일 걷는다는 것은 소중한 일인 것 같다. 매일 하는 묵주기도처럼 매일 같은 곳을 걷는 것은 단순해 보이지만 세월이 쌓이면서 나의 마음과 몸에 견고한 성벽을 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나를 지켜주는 성벽이 되어줄 것이다.

 까치산이라고 불리는 나의 산책길은 볼거리가 많다. 봄에는 벚꽃나무가 터널을 만들고 꽃비를 뿌린다. 새들도 종류가 많은 것 같았다. 특히 긴 청회색 꽁지를 가진 새의 이름이 늘 궁금하다. 오늘도 난 까치산에 다녀왔다. 귀를 막지 않고도 뼈의 진동을 통해 달팽이관에 소리를 전달한다는 헤드폰을 귀에 살짝 걸치고서 음악을 듣고 새소리도 들으며 골치를 썩이던 이런저런 생각의 해법을 찾아내었다. 처음 걷기 시작했을 땐 헉헉 대면서 올라갔지만 요새는 평지를 걷는 듯 편하다. 어떤 날은 띠를 매고 산책 나온 고양이도 만났다. 젊은 부부가 키우는 표범같이 생긴 고양이였다. 난 너무 놀라서 다가가서 양해를 구하고는 사진을 찍었다. 산책하는 고양이라니. 난 매일 같은 곳을 걷지만 매일 다르다. 만나는 사람과 강아지들도 다르고 꽃들도 다 다르다. 난 이제 제주가 필요 없다. 우리 집 뒷산이 나의 파라다이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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