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 AI의 시대’다. ChatGPT, Claude, Gemini 같은 생성형 AI가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온다. 아니, 이미 쏟아져 나와서 우리의 일상을 점유한 지도 꽤 된 것 같다. 사람들은 이제 검색창 대신 AI에게 질문을 던지고, 기획안의 초안을 맡기기도 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이력서나 누군가에게 보낼 메일의 문구까지도 대신 작성해 달라고 부탁한다.
확실히 놀랍다. 편하다. 그리고 빠르다. 나 역시 이 편리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편리함 속에는 위험한 함정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어디서 그것을 ‘생각의 외주화’라고 표현한 글을 보았다. 내 생각의 주도권을 기계에게 슬그머니 넘겨버리는 행위를 말한다. 무척 공감이 되는 표현이다.
많은 사람이 이러한 툴(Tool)을 잘 다루는 것을 실력이라고 착각하는 것 같다. 프롬프트를 기가 막히게 입력해서 그럴듯한 결과물을 뽑아내는 것에 희열을 느낀다. 하지만 이것에 의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머릿속의 ‘생각 근육’은 서서히 퇴화함을 느낀다.
얼마 전 맡았던 브랜드 네이밍 프로젝트가 딱 좋은 예가 될 것 같다.
당시 나는 AI의 능력을 시험해 볼 겸, 이 브랜드가 가진 제품의 물리적 속성들을 입력하고 그에 어울리는 네이밍을 뽑아달라고 요청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단 몇 초 만에 수십 개의 네이밍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수많은 후보 중 내 마음에 드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겉보기엔 꽤 그럴듯하고 세련된 단어들의 조합이었지만, 정작 그 안에는 브랜드의 ‘핵심 가치’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AI는 입력된 텍스트(물리적 속성)를 분석해 가장 멋져 보이는 단어의 조합을 나에게 던졌을 뿐, 이 브랜드의 지향점과 방향성에 대한 본질은 고민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브랜드의 핵심 가치는 누가 만들어야 할까? AI는 당연히 아니다. 그것은 사람인 ‘나’, 즉 기획의 주체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심어줘야 하는 영혼의 영역이다. AI가 내놓은 매끈한 답안지에만 의존한다면, 우리는 결국 남들과 비슷한 생각, 비슷한 기획, 비슷한 글만 양산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빚어낸 ‘평균의 생각’에 내가 끌려다니는 꼴이다.
아무리 좋은 칼이 있어도 요리의 맛을 결정하는 건 셰프의 손맛과 레시피이듯, 아무리 똑똑한 AI가 있어도 기획의 방향을 잡고 본질을 꿰뚫는 건 결국 사람의 생각이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AI를 사용할 때, 그들을 나의 대체자(외주)가 아닌 ‘깐깐한 서포터’ 정도로 활용하려 노력한다. 내가 먼저 깊이 고민하고, 나만의 핵심 가치와 전략을 우선 정립한 뒤, 그것을 검증하거나 변주하는 용도로 도구를 쓴다.
“이거 기획해 줘”가 아니라, “이 브랜드의 핵심 가치는 이것이고 타깃은 누구인데, 이 전략을 더 뾰족하게 다듬을 수 있는 아이디어가 있을까?”라고 묻는 식이다. 물론, 그렇게 물어봐도 돌아오는 대답이 평범할 때가 태반이다. 주체는 항상 나여야 하고, 도구는 철저히 나를 뒷받침하는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
당연히 기술은 계속 빠르게 발전할 것이다. 금세 더 놀라운 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본질에 집중해야 한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결과물이 나오는 세상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브랜드는 결국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브랜드일 테니까.
도구에 압도당하지 말자. 그들의 속도에 내 생각의 깊이를 희생하지 말자. 기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 즉 사유하는 힘을 놓지 않는 사람만이 이 거대한 기술의 파도 위에서 주도권을 쥐고 파도타기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