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타자기 Jan 27. 2022

[cine] 펑쿠이에서 온 소년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첫 번째 데뷔작.

* 이 글은 제가 2017년에 작성한 영화 감상글입니다.



세상이 좋지 않아 볼 영화도 없다. 그리고 나 역시 무언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느낌이다.

나에게 중요했던 영화들이 시시해져 가고 영화관에 가서 앉아 영화를 볼 체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이때, 나는 맨 처음의 자리로 돌아가기로 했다.

올바른 시작점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항상 허우 샤오시엔일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의 영화 '펑쿠이에서 온 소년'을 보기로 했다.




이 영화의 제목은 나에게 이렇게 들린다. 펑쿠이에 남겨진 사람들을 떠나온 소년. 펑쿠이로 갈 수 없는 소년.  

펑쿠이는 주인공 아칭이 나고 자란 고향이고 가족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정말로 소중한 것들은 우리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힘들고 아프다.

그래서 삶은 슬픔이고, 우리는 이것을 자주 망각한다. 시간은 흐른다. 필름이 돌아간다. 돌아가는 필름을 거꾸로 돌리지 않는 이상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저 과거를 추억하는 나를 다시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게 봉인된 펑쿠이에서 온 소년의 삶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을 한 자리에서 쉬지 않고 보았다. 이 영화를 만든 허우 샤오시엔은 기껏해야 삼십 대 중반. 너무 젊다. 이 나이에 이런 엄청난 영화를 만든단 말인가 조금 자괴감마저 든다. 펑쿠이에서 온 소년들이 행복할 수 있을까? 그들이 펑쿠이에서 찾지 못한 것이 가오슝에 기다리고 있었을까?


가오슝과 펑쿠이의 거리는 꽤나 멀다. 배로만 9시간이 걸리는 거리.



펑쿠이에서 가오슝까지는 배로만 9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지도 상으로도 펑쿠이는 우리나라로 치자면 울릉도만큼이나 외따로 떨어진 곳이다. 영화 상으로는 그냥 배 타고 다음 장면에 가오슝에 도착하지만 사실상 물리적으로 매우 먼 거리인 것이다.


가오슝과 펑쿠이는 먼 거리만큼이나 다른 곳이다. 이 차이를 영화는 소리를 통해 보여준다. 펑쿠이에서의 장면은 매우 조용하다 못해 적막하다. 화면을 꽉 채우는 것은 등장인물들의 목소리, 혹은 파도소리가 전부이다. 그러나 가오슝 장면이 시작되면 눈과 귀의 피로도가 높아진다. 특히 경적소리, 전차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가 뒤섞여 가오슝 장면과 대비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데. 화면을  채우는 건 바로 그 소리. 피로이다. 우리는 그 대비를 통해 주인공들이 느끼는 그 피로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또한 화면을 가득 채운 차, 사람들, 빌딩, 표지판 들 속에 세 소년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무언가가 가득 차 있지만 오히려 갇혀버리고 길을 잃어버린 듯한(이들은 실제로 길을 잃는다.) ‘고립감’을 관객으로 하여금 함께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가오슝 장면에서 실외지만 유일하게 조용한 장면은 바로 펑쿠이에서 온 세 청년(정확히는 네 명)과 황 친허, 그의 여자 친구가 사는 골목과 집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아칭은 대사를 통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문득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인서트 한다거나 먹먹하게 바다를 보는 아칭의 표정을 그냥 보여준다. 아칭의 감정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장면에서 조차 주인공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흘릴 수 없다.) 친구를 바다에 갑자기 밀어버리고, 먹던 밥그릇을 던져버리거나 박수를 치며 의자 위에 올라가서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사면 두 개 공짜를 외칠뿐이다.






하지만 보는 쪽은 이따금 숨이 막힐 정도의 먹먹함을 느끼게 된다. 보이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펑쿠이에서 온 소년의 깊은 마음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그 감정은 소리 내어 우는 슬픔이 아니라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 끈적해진 먼지가 불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은 오랜 슬픔이다. 특히 아칭의 슬픔은 무언가 ‘덧대어’ 진 것이 아니라 ‘사라진 것’에 대한 상처이며 ‘끝내 오지 않는 것’에 대한 슬픔이다.




무엇이 사라졌는가. 무엇이 메워지지 않고 있는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카메라는 직접적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경험하도록 안내한다. 어떻게? 나는 이것이 허우 샤오시엔이 위대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는 카메라를 같은 장소를 수없이 비춘다. 그리고 그 반복은 조금씩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 사이에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계속 흘러간다. 그리고 그 장소. 의자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사라지고. 식탁 위에 주인 없는 밥그릇이 올려지고,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사람들. 대신에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물들. 그 부재를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우리가 ‘경험’하게 함으로써 주인공 아칭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보다 더욱 확실하게 우리로 하여금 느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끝내 오지 않는 것 그리고 끝내 소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 장면을 떠올려보자. 네 소년이 파도를 등지고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춤을 춘다. 허우 샤오시엔은 그 장면을 세 번 나누어 보여준다. 한 번은 그 소년들을 당겨서 보여주고 다른 한 번은 소녀가 봄직한 거리에서 찍었다. 소년들은 분명히 즐겁다. 소녀는 아마 그 소년들을 못 말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즐겁지 아니할 이유가 무엇인가?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들의 감정을 넘어선 어떤 불길함과 무력함을 느낀다. 카메라는 마지막으로 그 장면을 가장 멀리서 보여준다. 방파제 위로 솟구치는 파도. 그리고 그 앞에 선 네 명의 소년들. 소년들의 키를 훌쩍 넘는 물보라가 춤추는 그들의 뒤에서 덮쳐온다. 그들이 가진 것은 젊은 뿐이고 그들은 기다리는 것은 더욱 험난한 세상이다.




원 자리의 상실과 부재, 그리고 험난한 세상. 아칭은 눈물조차 흘릴 수 없다. 영화의 처음은 펑쿠이의 조용한 버스정류장을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영화의 마지막은 가오슝의 시장이다. 아칭의 외침은 시장 속에서 점점 사라진다. 그는 이 시끄러움 속에 고립될 것이다. 피로한 가오슝. 펑쿠이에서 온 소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영화가 나온 지 35년이 지났다. 긴 세월이다. 우리의 삶은 변화했는가. 좋은 쪽으로? 모르겠다. 세상은 파도 앞에 선 네 청년들에게서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답할 수 없다. 지금 남국 재견이 너무나 보고 싶지만 조금 참고 다음으로는 연연풍진을 보아야겠다. 가오슝으로 떠난 소년들과 나란히 타이베이로 떠난 소년 소녀를 보고 그 후에 남국 재견에 대해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ps : 가오슝에 도착한 세 소년들이 머무는 집이 있다. 아무래도 저 당시에는 그리 좋지 않은 집이었던 것 같은데 세월이 얼마나 야박하게 변한 건지 지금 보니 와.. 저 정도 이층 집에 해도 잘 들고 나무도 보이고 크기도 크고 베란다도 있고...... 괜.. 괜찮은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더 살기 힘들게 변한 건 아닌가 생각해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