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대한 선입견을 버려요
초등학생 때, 처음으로 집에 컴퓨터가 생겼다.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오빠가 아버지께 조르고 졸라서 산 컴퓨터. 그때는 도스 시절이라 플로피디스크와 CD가 있던 때였고, 오빠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컴퓨터에 여러 게임을 깔았다. 마리오나 바이킹, 페르시아의 왕자, 고인돌 등 여러 게임을 하는 오빠를 보고 나는 자연스레 컴퓨터 전원을 켠다 - 게임을 한다는 순서를 익혔다.
그중에서도 가장 재밌었던 건 오빠랑 함께 플레이했던 테트리스였다. 그 외에 다른 게임들은 캐릭터가 죽어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왜 꼭 게임을 하면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는 건지 이때부터 의문을 품었는지도 모른다. 이상하게 오빠가 하는 게임의 대다수는 그런 것들이 많았고, 나는 굳이 직접 플레이하고 싶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게임을 한 건 집에 인터넷이 들어오면서부터였다. RPG게임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이면서부터 나의 게임 경력은 시작됐다. 그때부터 나는 집구석에 앉아 아주 먼 곳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경험을 하기 시작한다. 그 게임에서는 피를 흘리거나 잔인한 묘사가 나오거나 하진 않았다. 그때 당시 성별을 숨겨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는데 성희롱 발언을 듣고, 여러 경험이 쌓이면서 여성임을 밝혀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라인상에서는 더더욱. 정모나 번개라는 용어로 오프 모임이 잦아지던 시기에 인터넷상의 만남으로 오프라인의 성추행, 성폭행 사건이 수도 없이 많았으리라는 건 굳이 적지 않아도 다들 알 것이다. 많은 모임에 참가했었지만 별일 없이 안전하게 성인이 될 수 있었단 게 다행이다.
그 사이 학교 컴퓨터 시간에 할 만한 걸 찾다가 야후에서 서비스하던 리듬 게임을 알게 됐다. 리듬 게임은 어디서 지원합니다 하며 연결되어 있는 링크를 따라 들어가니 별도 사이트가 있었고, 나는 자연스레 음악에 맞춰 키보드를 누르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피아노를 치는 것보다도 어려웠는데, 점점 더 속도가 빨라지고 박자를 맞추고 이런 걸 어떻게 하지 싶은 곡들도 연주할 수 있게 됐다. 그래도 혼자 하는 게임은 어딘가 재미가 없었다.
게임을 좋아한다 한들 절대 하지 않는 콘텐츠가 있는데 그게 바로 PvP다.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 간단히 말해 이 세계 어딘가에 있는 누군가가 플레이하는 캐릭터를 죽이지 않으면 승패를 가리지 못하는 그런 게임. 나는 그런 게임을 절대 하지 않는다. 가장 처음 컴퓨터를 잡으면서 했던 RPG게임에도 PvP 시스템이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 캐릭터에게 가장 딜을 잘 할 수 있거나, 가장 힐을 잘 할 수 있거나, 가장 방어를 잘할 수 있는 장비를 맞추고 각자 소속된 길드가 성을 차지할 수 있도록, 또 성을 빼앗을 수 있도록 다른 유저와 싸워야만 했다. 기간제로 운영되는 PvP를 통해 길드는 점차 거대해졌고, 거대 길드는 게임 시장에서 수수료를 가져가는 등의 이익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의 PvP를 통해 나는 '난 이런 종류의 게임을 하면 안 되겠다'고 느꼈다. 지면 너무 화가 났기 때문이다. 재밌자고, 다 같이 즐겁자고 하는 게임인데 기분이 상하면 무슨 소용인지 이미 초등학생 때 알았던 거다.
승부욕이 매우 강하면서도 PvP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알 거다. '내가 왜 그렇게 화를 냈지?', '그때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는데' 하는 후회들. 그런 쓸데없는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아 나는 PvP에는 손대지 않기로 했다. 내가 즐겁자고 하는 게임인데 짜증이 난다? 안 되지, 안 돼.
그리고 그런 PvP게임의 특성상 채팅 기능이 있으면 부모님 안부를 묻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다. 너는 태어나서부터 게임을 잘했니? 자기들도 초보자 시절이 있을 텐데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하물며 그게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 일정 난이도 이상의 고오급 콘텐츠라면 모를까. 레벨이나 등급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게임에서 '그럴 거면 죽어'라는 말을 왜 그렇게 하는 건지. 남남에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만날 일도 없을 사람일지 모른다는 이유로 욕하는 사람들이 많다. 익명 뒤에 숨어 사회성을 저버리는 걸 왜 당연하게 생각하는지부터 의문이다. 물론 요즘은 채팅으로 욕할 경우 캡처해서 신고하거나 차단하는 등 여러 기능이 생겼지만 그래도 욕하는 사람이 사라지진 않는다. 겜방에서 노는 커플이나 집에 계셔서 심심하신 어르신께 게임을 알려드리는 경우도 있을 텐데 우리 모두 즐겜하면 너도 좋고 나도 좋지 않을까? '겜 존나 못하네, 손가락이 없냐?'같은 발언은 진짜 손가락이 잘린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하는 말이다.
여튼 그런 이유로 유저끼리 싸우는 게임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유저가 아닌 몬스터와의 전투, 스토리와 기타 컨텐츠 위주로 즐기는 것뿐이지.
개인 PC 보급으로 인해 RPG게임의 시대가 열린 후에도 역시 혼자 하는 게임보다는 누군가와 함께하는 게임을 좋아하기 때문에 손이 더 많은 건 PC게임이었다. 어둠의 전설부터 라그나로크와 타르타로스, 그라나도 에스파다(bgm이 진짜 끝내 준다), 블레이드소울 같은 게임들을 거쳐 지금 하고 있는 파이널판타지14(이후 과관14)에 정착했다.
과관14에는 유저가 해야 하는 컨텐츠가 상당히 많다. 메인 퀘스트는 스토리를 보고 확장팩 전체와 설정에 대한 이해, 던전 진행을 위해 필수로 해야 하는 퀘스트이고, 부가 퀘스트는 직업별 클래스/잡 퀘스트, 24인 레이드, 일반 레이드 등 패치되는 확장팩 순서를 따라 수도 없이 많은 퀘스트가 있다. 거기에 한 캐릭터로 18개가 넘는 전투직을 비롯해 채집/제작 직업까지 모두 키울 수 있으니 24시간 게임을 하라고 하면 나는 24시간 게임을 할 수 있을 만큼 방대한 양의 즐길 거리가 존재한다.
과관14는 업데이트 주기별로 그 패치 버전의 레이드 영웅편을 가야만 가장 딜을 잘할 수 있는 장비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영웅편 레이드는 하드 컨텐츠에 속한다. 인스턴스 던전의 경우 난이도 순으로 치자면 이 정도로 나뉜다.
일반 던전(메인스토리용 던전+부가 던전) - 일반 레이드 - 연합 레이드 - 토벌전(메인스토리 위주) / 극 토벌전 - 영웅 레이드 / 절 토벌전
하드 컨텐츠의 기준 역시 모두가 다 다른데 대략적으로 극토벌전 이상부터 하드 컨텐츠라고 하고 극도 가지 않는 유저를 라이트 유저라고 한다. 이 밑으로 라이트 유저 중에는 메인만 밀고 게임 캐릭터 외형과 룩템으로 꾸미기를 즐기는 사람, 스샷 찍는 사람, 풍경 찍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수다 떠는 사람 등 각자 자기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컨텐츠를 즐긴다.
난 게임 속 내 캐릭터를 강하게 만들고 싶어서 영웅 레이드를 가기 시작했다. 방어 역할(탱커) 2 / 회복 역할(힐러) 2 / 공격 역할(딜러-물리/마법과 근딜/원딜로 나눠져 구성) 4, 총 8명이 모여야 한 파티가 꾸려진다. 클리어를 하고 각자 장비를 맞추기 위해 8명이 함께하는 파티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걸 과관14에서는 공대라고 한다.
[우리는 화수목 저녁 9시부터 12시까지 영웅 레이드 1-4층을 트라이, 클리어하는 공대입니다.]
위처럼 쓰고 홍보를 해서 사람을 모으고 8명이 차면 전혀 모르는 8명이 모여 함께 클리어를 위해 같은 시간에 모여 해당 레이드 던전을 깨기 위해 트라이를 한다는 소리다. 부모님들은 이런 게임의 시스템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서 '게임을 몇 시간이나 했는데 컴퓨터를 안 꺼?'라고 하실 수 있겠지만, 게임 내에서도 친구들이 있고, 사람이 있어서 못 끄는 겁니다. 시간 약속을 해둔 거라 그 시간이 되면 무조건 집에서 컴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거예요. 제가 참가를 못 하면 7명에게 피해가 갑니다. 아시겠어요?!
8명이 함께하는 비즈니스 회사 게임 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보통은 음성채팅을 하면서 게임 리딩(이후에 광역 와요, 뎀감 / 넉백 와요, 거리유지, 견고마)하거나 잡담하거나 일정 조율, 아이템 분배 등 무엇 하나 허투루 해서는 안 되는 사회생활이 게임 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 게임을 한다고 해서 '그거 해서 뭐가 남니'라든가 '어차피 섭종되면 끝이야' 같은 이야기는 말해 봤자다. 저 게임으로 친구도 만나고 전혀 다른 분야를 배우고 일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만나볼 수 있거든요.
우리 부모님도 내가 게임하면 그만하라거나 시간을 정하고 게임하라거나 하는 말을 많이 하셨다. 이해한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것만 보고 있으니 사람이 이상해 보이겠지.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혼자가 아닌데. 오히려 엄마가 마음껏 게임하게 해 줬더라면 알아서 자제하고 게임을 좀 끊었을 수도 있겠다. 고3쯤에 그랬듯이.
온라인에서 만난 친구들의 오프모임은 위험하기도 했지만 당시 동네에 국한되어 있던 내게 더 넓은 세상을 알게 해 준 계기가 됐고, 그 친구들과 같은 게임을 하다가 다른 게임으로 넘어가는 식으로 게임 유저들은 계속해서 다른 게임을 찾아 돌게 된다. 학교에, 회사에 사회가 존재하는 것처럼 게임 내에도 그들만의 작은 세계가 있다. 어렸던 초등학생이 나이를 밝혔을 때, 다정하게 삼촌 혹은 이모라고 해도 된다며 식사를, 음료를 대접해주었던 어른들을 나는 아직 기억한다.
독립 전까지 나는 게임하다가 그래픽카드도, 메인보드도 날려 먹은 전적이 있는 게임광이었다. 혼자 살면서부터 게임 그만하라는 소리를 안 들으니 얼마나 좋던지. 정말 하루 16시간씩 게임을 하면서 보낸 날도 많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와 통화하면 "뭐해? 또 게임해?"라고 말씀하시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타투를 한 멋진 할머니가 되겠다'는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이렇게 답한다. "나 할머니 돼서도 게임 할 거야."
편집자니까 결국은 '콘텐츠'를 찾아 헤매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스토리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게임 중에는 '게임'이라는 이유로 영화나 드라마보다 하위 취급을 받는 경우도 있다.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면 훨씬 훌륭한 것들이 있을 수 있는데도. 오래전부터 게임은 하면 안 되는 것으로만 여겨졌지만, 단순한 킬링타임이 아니라 문학작품만큼이나 메시지를 전하는 것들도 많다.
그러니 게임에 대한 편견은 거두고 할머니 돼도 같이 게임하실 분 구합니다.(4/8) 과관14 하시면 제가 이것저것 도와드릴 수 있음. 문의는 댓글로(?
+거 같이 좀 먹어 주세요. 특히 칠흑 확장팩 스토리를 꼭꼭 같이 보고 얘기를 나눠 보는 게 어떻습니까? 절찬 구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