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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산 Sep 19. 2022

12. 모두가 권고사직을 원하는 회사

흔한 출판 편집자 이야기3

   

https://brunch.co.kr/@liketansan/12 

지난 글에서 이어집니다.


한 달도 못 견딘 회사를 뒤로하고 나는 또다시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일반 기업은 쳐다보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 평하는 회사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자면 다른 세계 이야기 같았다.


‘그래도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 하잖아.’


이 한마디가 날 버티게 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도 읽었다. 집에 있는 책이란 책은 다 봤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책을 읽었다. 책장 서너 개를 다 독파하고 나서는 기억이 안 나고 궁금한 책들 위주로 다시 한번 읽었다. 침대 위에 엎드려 책 한 권을 피고 술술 읽으면 내 마음은 이미 가보지 못한 전 세계의 이야기들을 떠돌고 있었다. 책은 내게 풍부한 경험을 제시하고, 세상을 보게 해준 창문이었다(80-90년대에 하얀색 책등에 전 세계의 설화, 전설, 민담 등을 실은 전집이 있었는데 혹시 어느 출판사 책인지 아시는 분이 있다면 제보 부탁드립니다. 전체 적어도 30-50권 이상이었던 것으로 추정, 책등은 하얀색에 검은 글씨만 있음, 본문 내용에 간혹 삽화 등이 있으며 북유럽부터 아랍권, 아프리카 등 지역을 가리지 않고 각국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담은 전집입니다).


출판 일을 고집한 이유는 그게 다였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면 아마 질릴 때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배운 재주가 이것밖에 없다기엔 또 짧은 경력이었다. 3년을 약간 넘긴 경력에 비해 연봉이 조금 높았기 때문인지, 이력서를 제출해도 돌아오는 소식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연봉을 조금 낮춰서 적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 한다고 제안했던 B사보다는 더 높은 연봉이었다.


합정 근방에 있던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고, 그쯤 전 직장동료도 구직 중이라 같은 곳에 면접을 봤다. 기존에 하던 분야와는 또 전혀 다른 책들을 내는 곳이었는데, 사장이 괜찮아 보였다. 합격인데 연봉은 좀 더 낮추고, 대신 내일채움공제로 2년을 일하면 1,600만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그중 300은 어차피 들어가는 내 돈이니 회사와 국가의 지원금 1,300만을 버는 셈이었다. 회사 역시 내가 2년을 채우면 300쯤의 돈을 받았던 것 같다. 


더 올려달라는 말에 사장은 너와 비슷한 연차의 편집자가 이미 다니고 있는데, 그럼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했다. 당장 경력이 끊기는 게 가장 무서웠던 나는 수락하고 다니기로 했다(저는 상황상 어쩔 수 없었지만 이런 형평성 운운하면 도망가세요. 어차피 연봉 공유도 하지 말란 식으로 계약서에 적어두면서 개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대신 다음 해 연봉은 200을 올려달라고 했고 사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면접을 보고 잠깐 회사에 들렀을 때 봤던 편집자 한 분이 도망치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 말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사장 마음대로 돌아가는 회사였다. 합당한 업무 지시가 아니라 사장이 그렇게 하라고 했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들. 담당자로서의 의견은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제안을 공격으로 받아들이고 당신이 하는 것은 모조리 시장에 먹힐 것들이지만, 직원들이 말하는 것은 씨알도 안 먹힐 기획과 마케팅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버텼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괜찮았다는 점이었다. 대표는 편집과 마감 기한 사이의 정도를 고민하다가 말했던 내 이야기를 고스란히 팀장님께 전했다. 그것도 ‘탄산이 너 때문에 회사 다니기 힘들대’라는 이간질하는 말로. 다행히 팀장님이 좋은 분이셔서 오해 없이 잘 넘어갔다. 함께 일하는 팀원은 종종 바뀌기도 했지만 어디 한군데 모난 사람 없이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자유로운 분위기와 매출 압박이 적어 계속 다니기엔 좋아 보였다.


이 회사의 유일한 문제는 사장과 그의 끄나풀이었다. 영업팀장은 서점에 배본만 나가는 사람이지 할 줄 아는 일이 없었다. (이 회사에서) 마케팅은 오로지 편집자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었는데, 금전적인 지원을 해주지도 않았다. 인터넷서점 배너광고도, 인스타 광고도, 무엇 하나 책을 알리기 위한 노력이 없었다. 베스트셀러가 전부 꽁으로 되는 줄 아는 건가?


사장은 퇴근 후 바로 집에 가기 바빴다. 근무 외 시간은 그럴 수 있지. 하지만 근무 시간에도 예비 저자를 만나러 가거나 새로운 아이템을 물어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냥 출판계의 모든 사람과 연을 끊고 사는 것처럼. 사람과 교류 하나 없이 혼자 이 회사를 일궈낸 것처럼. 모 출판사 출신이라는 소리를 듣고 알아본 바로는 그 출판사 내에서도 사장의 평판이 딱히 좋지 않았다는 말뿐이었다. 편집자는 교정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획하는 사람이라고 누누이 말하면서 국내 기획에 대한 의지를 보이면 ‘국내 기획은 돈이 너무 많이 들어’라는 말만 했다. 아무런 투자 없이 책을 팔고 싶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래서 매출 압박이 딱히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매출 압박이 없다는 점은 직원들에게 ‘회사 사정이 힘들어 연봉을 올려주기 힘들다’는 말로 돌아왔다. 보고 싶은 사람에게는 회사 재정을 모두 공개한다는 말이 있었지만, 총무 쪽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전혀 확인할 수 없었다. 회사 통장을 사장 혼자 보고 관리하는데 어떻게 깨끗이 확인하겠는가. 매출이 안 나온 근거는 판매량이 적다는 것뿐이고, 그때 얼마나 투자해서 얼마나 벌었는지, 순이익은 얼마인지 확인하는 시스템 자체가 불가한 곳이었다. 오죽하면 책의 단가를 매길 때도 손익계산서가 아니라 ‘이러면 너무 비싼가?’라면서 그때그때 가격을 바꾸기 일쑤였고, 출간 후에 가격만 바꾸겠다고 바코드 스티커를 붙인 사례도 있었다.


총무 팀 직원에게 확인한 결과, 대략 한 달에 1억을 번다 치면 그중 반 이상은 대표 혼자 가져가는 게 맞고 그 나머지가 직원에게 떨어지는 돈이었다. 월급을 다 계산해 봐도 연봉을 올려줄 만큼의 이득은 충분히 있었다. 그런데도 사장은 연봉협상 전마다 회사 사정이 힘들다는 밑밥을 깔고 올려준다면서 제시하는 금액은 50만 원이었다. 월 50만 원 아니구요, 연봉 50만 원 맞습니다. 살다 살다 이런 연봉 인상은 처음 들어봤다. 이건 나가라는 거 아닌가?


그래도 동료들은 너무나 좋았다. 지금은 모두 다 다른 곳에 다니고 있지만, 그때를 회상하며 다른 동료는 이렇게 말했다. ‘점심시간에 수다 떠는 게 너무 좋아서, 떠들고 싶어서 회사 가고 싶었다니까.’ 나도 그와 같다. 나는 이 직장에 다니는 동안 학교에 간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일은 하지만, 언제든 마음 놓고 떠들 수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돈이 들어가는 것만 제외하면 하고 싶은 일을 해 볼 수 있었다는 점. 그게 큰 메리트였다. 마포구에 있는 회사라 ‘퇴근하고 생면파스타 먹으러 갈 사람?’하면 그날 시간 되는 사람들이 모여 같이 밥을 먹고 카페에 가고 수다를 떨었다. 시간이 안 되면 그냥 안 가면 된다. ‘오늘 망원 소품샵 가볼 사람?’ 구경이나 전시회, 원데이 클래스 등 우리는 많은 것들을 함께했다. 모이는 사람은 늘 바뀌었지만 제주도, 남원, 속초 등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추억들이 쌓여 지금의 관계를 만들었다.


그럼에도 이 회사를 뜨기로 생각한 건 발전도 없거니와 연봉 50만 원 인상을 제시하는 대표 때문이었다. 문제에 대해 지적하면 ‘그렇게 말했다면 미안해. 그런데 내가 더 서운해’라고 말하는 대표였다. 나는 대표의 감정이 궁금한 게 아니다. 발언하고 사과할 때 진정성 있는 사과와 이에 대한 개선, 해결책을 요구하는데 대표는 자신의 감정만을 피력했다. 오래 일하던 동료가 결국 이직으로 퇴사를 결정했을 때, 그는 ‘배신자’라는 표현을 썼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냐’고. 그 직원은 7년간 회사에 근무한 사람이었다. 왜 나가기로 마음먹었을까요? 자기 잘못은 생각도 안 하고 직원 탓은 오진다. 직원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까? ‘7년을 다녀도 저런 대접이구나’ 하지 않을까? 후에 들어보니 ‘네가 하는 일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할 수 있어’에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로 대체할 수 있다’는 발언까지. 아주 명언이 아니라 망언 제조기다.


코로나가 터지면서 직원 한 명이 나갈 때마다 하던 송별회와 생일자가 있을 때 케이크를 놓고 즐기던 다과 시간을 없애 버렸다. 코로나 때문에 모이지 않을 거라면 재택을 하는 게 맞는데. 재택의 ㅈ자도 못 꺼내면서 밥은 모여서 먹지 말라고 했다.


이렇게 3년 넘는 시간을 일했는데, 내게 돌아온 건 권고사직이었다. 글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사장에게 제법 할 말, 못 할 말 가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문제가 생기면 즉시 보고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찾아 해결하려 하지, 땅을 파거나 숨죽여 끙끙대고 앓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그래서 사장과도 자주 부딪혔다. 위처럼 말하는 사장인데 내가 참고 싶겠나?


경력이 6년을 넘어가고 있으니 연봉도 올려줘야 했고, 때마침 터진 코로나로 인해 매출이 별로 안 좋으니 사람을 줄인다는 명분도 너무나 완벽했다. 소위 말해 사장의 눈밖에 났기 때문에 권고사직을 당했다. 그때쯤, 편집팀의 모든 사람이, 아니 편집팀뿐 아니라 사장의 끄나풀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어차피 회사 매출 안 좋다고 연봉 인상 못 한다는 얘기할 텐데, 그럴 거면 그냥 권고사직 시켜 줬으면 좋겠다’란 이야기할 때였다.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건 좋은데, 네까짓 게 뭔데 나를 자르냐는 생각도 했다.


너무너무 열이 받아 대화 내용을 저장해 두고 캡처본도 따둔 후에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살펴보고 있는데 가관이다. 이 사장을 보면서 느꼈다. 아 진짜 이런 사람은 되지 말자. 이런 못난 어른은 되지 말자.


2020년 12월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회사를 나왔다. 몇 가지 애착이 가는 책을 남기고 회사에서 받은 책들은 알라딘중고서점에 팔아버렸다. 짭짤했다. 사장이 자식에게 받은 편지라며 내게 보여 준 적이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짤막했다. ‘아빠,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편지를 읽고 깔깔대며 웃는 사장을 보고 나는 한숨이 났다. 이 아저씨의 자식도 아버지의 문제점을 알고 있는데 정작 아버지란 사람은 이 편지를 웃고 넘길 일이라고 생각하는구나.


권고사직은 처음이었는데, 그래서 그런가 마음이 여유로웠다. 잘린 사유는 열받지만, 노동청에 구제신청을 할 경우에는 내가 그곳에 다시 다니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러고 싶진 않았다. 8개월 정도 실업급여를 탈 수 있고, 그동안 일단 푹 쉬고 정리하는 시간을 가진 후에 다시 일하는 것. 그게 목표였다. 가고 싶은 회사의 조건도 대강 정리했다. 국내 기획을 할 수 있는 곳, 내가 배우며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나에게 필요했다.


내가 퇴사하고, 곧이어 다른 사람들도 줄줄이 퇴사했다. 연봉을 맞춰주지 못해서, 이직해서. 편집자 자리가 비니 사장은 아는 인맥을 동원해 쫓겨나듯이 나갔던 사람을 다시 불러왔고, 편집팀은 바뀌었다.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도 또 나가고, 총무팀 직원들까지 다 바뀌어 이제는 그곳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사장과 사장의 끄나풀을 빼고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직원들이 나간다고 말했더니 미안하다고 했다며? 어이가 없다. 정작 쫓아낸 나한테는 왜 사과를 안 하셨는지. 쨌든 실업급여 줘서 땡큐!


이후로도 그 회사 동료들은 자주 모였다. 경주 여행을 가기도 했고, 놀이공원에 가고, 에어비앤비를 빌려서 같이 놀고, 가까이 들를 일이 있으면 연락하는 등 계속해서 이 관계는 이어지고 있다.


최근 결혼을 앞둔 친구(이 회사 동료)가 회사에 다시 들렀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내가 애들한테 너무 못되게 굴어서 그냥 다 미안하다. 연락되면 미안하다고 좀 전해 줘.’ 

나 번호 안 바꿨다. 진짜 미안하면 자기가 알아서 연락해야 한다. 혼자서만 사죄하시고 당신이 믿는 신께 '회개했으니 천국에 보내주십시오' 할 요량이신지?

또 가장 최근까지 그곳에 다녔던 디자이너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래도 탄산 걔가 글은 참 잘 썼는데.’

기가 찬다. 

능력만큼 대우해 줬으면 다들 나갈 생각을 했을까? 

좋았던 회사 분위기 망친 게 누군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브런치에서는 5,000자의 글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다. 너무 길면 사람들이 안 본다나 뭐라나. 하지만 웹소설 한 편인 5,000자 기준이 나는 최저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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