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야, 나를 견뎌라.
사람은 누구나 어느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사회에서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행동하고 일한다.
내 역할은 이렇다.
회사: 출판 편집자 + 팀원 + 기획자
가정: 막내딸 + 독립한 가장
출판 편집자는 흔히 아주 많은 일을 한다. 일단 시장의 트렌드를 읽고 팔릴 만한 책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자기가 만들고 싶은 책과 결합하여 그러한 아이템을 만들어낸다. 콘텐츠 기획과도 아주 비슷한데 편집자는 작가를 핸들링하고 작가에게서 원고를 받아내고(혹은 작가에게 커다란 원석을 받아 직접 가공해 보석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아는 베스트셀러 도서 중엔 작가의 이름만 빌리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 교정, 교열과 배치, 구성을 바꿔 가며 보기 좋게 글을 다듬어 책의 꼴로 만들어 낸다. 이 과정에서 짧으면 1-2개월 길면 수년이 넘는 세월이 걸리기도 한다. 원고가 오가면서 짬짬이 손이 비는 동안 다른 아이템을 발굴하고 또 원고를 다듬으며 담당한 도서의 마케팅 방안과 보도자료 작성, 카드 뉴스 작성 등 홍보와 마케팅에 대한 영역까지 손보기도 한다. 소규모 출판사의 편집자는 직접 영업을 뛰는 경우도 있으며, 아무리 마케터가 열과 성을 다한다 한들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고도 시장의 반응이 잘 나오지 않으면 마지막까지 그 책을 놓을 수 없는 담당 편집자만이 남는다.
팀원으로서의 나는 팀장님의 말을 듣고, 팀장님께 배울 점을 찾아내고 팀장이 지시하기 전에 알아서 일을 찾아하며 무언가 물어보면 딱딱 맞춰 보고하는 등의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니 일할 때는 성실히 임해야 하고 직업의식이 투철해야 하는 등 사회에서 요구하는 모범적인 모습으로 일하려 애쓴다. 가령 이렇게 업무 시간 중에 키보드를 두드리는 것 또한 타인에게는 '아, 탄산 일 열심히 하는구나'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가정에서의 나는 사랑받는 딸이다. 부모님께 반항한 적도, 맞아본 적도 없이 곱디 곱게 자란 늦둥이 막내 딸. 그런 내게 주어지는 의무, 특히나 부모님께서 내게 기대하시는 바는 아래와 같다.
독립한 성인으로서 경제적 여유를 확보
별일 없이 평범한 직장생활을 할 것
남들처럼 적정한 연령대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릴 것
부모님께 애교를 부릴 것(아버지피셜)
두어 달에 한 번 정도는 부모님을 알아서 찾아올 것
30대 아가씨다운 옷을 입을 것
물론 이 중에 내가 실질적으로 하는 일은 첫 번째 정도밖에 없다.
그나마도 백수 생활을 청산하면서 직장에 들어가 경제적 여유가 생기긴 했으나 부모님의 경제적 여유에 비하면 새끼손톱 수준이다.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기에는 직장 내 빌런 때문에 늘 괴롭다, 힘들다는 말을 토하고 있어 여기서 버텨야 할지, 이직할지를 고민하고 있다.
좋은 사람이 있다면(여성 혐오를 하지 않고, 그릇된 커뮤니티적 사회 인식에 찌들지 않았으며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에 내 성격을 받아줄 수 있는 천사 같은 인성과 적어도 우리 집만큼의 경제적 수준을 가진 집안 등의 조건) 결혼을 고려할 만하겠지만, 사회 상황도 그렇고 X일 확률이 높아 보인다.
'다른 집 딸들은 다 애교도 부린다는데'하는 말을 듣고 나서 나는 대체 어느 집 딸이 어떻게 애교를 부리는지 너무 궁금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애정 표현은 가끔 부모님께 안부차 연락을 하고, 집에 갈 때마다 부모님을 안아드리는 정도가 고작이다. 대체 무슨 애교를 더 부리길래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현실적으로 파워 I인 나는 대중교통을 타는 것만 해도 너무나 힘들며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기가 빨리기 때문에 상대를 쉽게 마주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와 관계되지 않은 사람의 정보(오늘 하루 보고 말 처음 가는 카페 직원)는 차단하듯이 눈을 잘 마주치지 않고 얼굴도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는다.
나이대에 맞는 옷을 입으라는 말인데. 하늘하늘한 원피스에 하이힐이나 구두가 어울릴 것 같은 샤랄라한 옷을 입길 원하신다. 정작 새로 옷을 사려는 나는 '아 편한 거 맨투맨, 청바지!' 이러고 있는데. 홈쇼핑에서 다른 색깔의 같은 디자인 옷 4-5개씩 묻지도 않고 주문하기에 다 안 입고 버리니까 제발 나한테 물어보고 주문하라고 신신당부해놨다. 그러자 어머니는 이제 톡으로 꼭 '이거 어때?'라는 질문을 보내신 뒤에 옷을 사주신다. ㅋㅋㅋ 엄마의 사랑은 참 좋고 엄마의 눈썰미도 좋은 편이지만, 그게 내가 입는 스타일이 아니라면...
사회적 역할에서 기대되는 바는 이렇고 친구와의 관계에서 나를 규정하는 말은 사람들의 말을 빌려왔다.
융통성 있는 원칙주의자 - 지각은 절대 안 되지만, 사정이 있었다고 하면 그럴 수 있지 하는 사람. 닫혔는데 열려 있단다.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사람 - 전혀 다른 전공이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밀고 나가 그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
의욕적이고 자신 있는 사람 - 매사 성실하며 열정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
일단은 나서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다가 답답해지면 어쩔 수 없이 나서는 리더형 - 답답한 걸 참지 못하고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는 사람
외강내유 - 약한 자신을 감추기 위해 더 강해지려 하는 사람
설거지하기 싫다고 울면서 설거지하는 참된 어른 - 진짜다.. 나는 설거지가 너무 싫다.. 너무너무 싫다...그치만 1인 가구니까 내가 안 하면 할 사람이 없어서 해야 한다................
최근까지 기억나는 건 이 정도다. 아무래도 친구들 사이에선 좀 더 본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에 여러 말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 엄마는 내게 성별에 따라 기대되는 역할을 수행하길 원해 왔다. 같이 집에 있어도 오빠에게는 수저를 놓으라거나 상을 차리라거나 엄마가 없으면 네가 식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명절에 제사를 지내러 가면 딸들은 꼭 며느리들과 같은 상에서 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도 남자 형제들은 상 치우는 일을 돕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뒤처리는 모두 엄마와 큰엄마, 그리고 오빠의 부인이 된 며느리들과 딸의 몫이었다.
그나마 이제 형제들이 결혼하고 조카들이 생기면서 오빠들은 와이프 눈치를 보면서 집안일을 돕기 시작했고, 조카들이 비슷한 또래로 모여 있어 아이들에게 따로 상을 챙겨 주고, 나는 다시 아버지들과 함께하는 상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그 구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렇게 나눌 필요가 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A남자아이가 B여자아이 머리를 잡아당기면 아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 'A가 잘못했다고 했으니까 B가 용서해 줄래?'라고 용서를 강요한다. 나는 용서하고 싶지 않은데. 이런 상황이 반복되면서 여자아이들은 내가 참아야 하고, 내가 넘어가면 아무 일이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신이 피해자가 되어도, 불이익을 당해도, 성추행을 당해도 침묵해야만 하는 것처럼 알게 된다.
초등학생 무렵까지 나는 나를 괴롭히는 남자애들에 대해 절대 참지 않았고, 매우 활발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극단적인 예시를 하나 들자면 남자애가 너무너무 화나게 하길래 커터칼을 들고 협박한 적도 있다. 자꾸 까불 거냐고. 적다 보니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덤벼라', '해 봤자 죽기밖에 더 해?'라는 이 마인드가 아주 오래전부터 내 안에 새겨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참지 않았다.
첫 회사에서도 그러한 역할이 있었다. 직원은 사장의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고, 그 말에 토를 다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며, 윗선의 말에 꼬투리를 다는 것 자체가 잘못으로 인식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때는 모두가 그러니까 나도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찍 소리도 못했다.
한번은 사장이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부잣집 딸이 크리스마스이브에 해외여행도 안 가?'라는 말에 나는 심드렁하게 '그럼 쉬게 해주시든가요'라고 답했다. 사장은 이제 정반대 상황으로 찍소리는 못 하고 허허 웃기만 했다[설명하자면 우리 집이 잘살긴 하지만 사장이 생각하는 부잣집의 기준은 내가 생각하는 기준과 조금 다르고 또 그때쯤 퇴사하고 싶은(죽고 싶은) 열망에 가득 차 있어서 얜 뭐지?란 생각으로 답했다. 나는 이 회사에서 15일 중 10일의 연차를 썼다고 실장에게 불려간 적이 있다].
그렇지만, 이제는 말한다. 몇천의 매출을 낸 후에 그 작은 회사에서 브랜드도 없는 불편한 사무실 의자를 쓰고 있기에 매출도 나왔는데 PDF 파일 열 때마다 버벅거리는 컴퓨터도 바꿔 주시고, 사무실 의자도 S 브랜드 보급형 의자라도 사 주시라고 사장에게 직접 말했다. 결과는 바뀌었다. 동료 중에는 이런 탄산이 있어서 자기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미운털 박히지 않고 넘어갈 수도 있다거나 탄산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쟨 언제든 잘려도 상관없나 봐 한 사람도 있겠지.
불이익을 받게 되면 목소리를 내야 한다. 현실적으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잘 알고 있다. 먹고사는 일이 급급해서 당장 회사를 나가는 상황에 놓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직장인에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안다. 그러니 개개인에게 그 선택을 강요하지는 않겠다. 그러한 힘듦을 감당하고 있다는 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로 인한 스트레스보다 경제적 이익을 생각해 아직은 더 버텨 볼 수 있다는 말이니까. 그러나 그게 나를 갉아먹고 '당장 차에 치이면 출근 안 해도 될 텐데'라는 생각까지 이어진다면 꼭 병원에 가거나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길 바란다.
그래서 나는 더 참지 않기로 했다. 이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지만, 일찍이 말했으니 준비에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떠한 변화가 생기길 바란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면 그땐 그때 가서 또 새로운 방법을 강구하면 된다. 입 밖으로 말을 내는 데 거부감이 없는 이유는 불만을 참지 않고 바로바로 말해 개선하는 과정을 반복해 온 덕분일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자를 거면 잘라.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너네 아니면 나 일할 곳 없는 줄 알아?'란 생각이 커졌다. 나는 비빌 언덕도 많으니까. 내가 나를 위해 준비해 둔 저축이 고스란히 내 뒷배가 되어주는 셈이다.
얼마 전에 꿈을 꿨었다. 엄마와 함께 전집에 갔었다. 막걸리와 전을 먹으면서 얼큰하게 취한 남자 어르신들이 나를 보면서 성희롱과 같은 농을 건넸다. '어르신, 당신 딸한테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라고 받아쳤다. 화를 내고 싶지만 말하는 족족 받아치니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 얼굴이 붉어진 어르신들을 보며 나는 밥 먹을 기분 아니니 나가자며 엄마와 함께 나왔다. 전집을 나와 걸으면서 엄마가 나를 걱정했다.
"탄산, 그러다가 진짜 칼 맞으면 어떡해. 엄마는 그런 게 제일 무서워."
나는 엄마에게 답했다.
"엄마. 저런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몰상식하고 경우가 없는 거잖아. 나는 내 행동에 아무런 부끄럼이 없어."
그렇다. 나는 내 행동에 아무런 부끄럼이 없다.
나를 받아 줄 수 있는 틀을 찾아 나설 것이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만 해도 시간이 모자라다. 더 이상 사회의 틀에 나를 맞추는 헛수고는 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