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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탄산 Dec 08. 2021

5. 생리 말고 정혈


냅다 쌍욕을 갈기고 싶은 기분이 든다. 한 달에 한 번 여성에게 찾아오는 그 시기가 온 것이다.


PMS 증상에 대해 밝혀진 바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또 주변 친구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증상들이 매우 많다.


심각하면 정말 방바닥에 쓰러져 꼼짝도 못할 만큼 묵직한 통증이 지속된다. 아파서 울어본 적이 딱 두 번 있는데 한 번은 치료기로 어깨 염증을 끝장낼 때였고, 한 번은 침대에 누워 정혈통을 앓을 때였다. 진짜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다. 놀랍게도 2시간 자고 일어나니, 잠들기 전 먹은 정혈통 약 덕분에 통증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정말 죽다 살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정혈통이 심해지기 전에 미리 약을 먹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누가 언제 정혈이 터질 줄 알고 미리 진통제를 먹는단 말인가. 


가장 기분 나쁜 점은 이러한 증상이 길면 2-3일 어쩌면 일주일까지도 이어진다는 점인데 사람에 따라 그 강도도 심한 날짜도, 또 정혈 하는 기간도 모두 다 다르기 때문에 어떻게 평균을 내기도 힘들고 사람 바이 사람이라는 철칙에 따른다는 점이 또 큰 문제다.


아주 극단적인 예로 정혈 도중 출근길에는 '아 지금 당장 지하철에서 내 자리 안 내놓으면 다 부숴버릴 거야'라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만 한다. 나는 넘쳐나는 불만욕구를 남에게 표출하고 피해를 입히며 풀어내는 사이코패스가 아니니까. 그러다 누가 자리라도 양보해주면 마음속으로 감동받아 울면서 자리에 앉는다. '역시 세상은 따듯해!! 감사합니다!!!' 하지만 자리가 나지 않고 가야 할 목적지까지 서서 가게 된다면 '이 망할 세상'을 외친다.


여성들이 수도 없이 겪어본 상황이다. 누군가가 정혈대 있어?라고 물으면 이 사람이 정혈대가 필요한 상황이고, 그렇다면 하나쯤은 선뜻 줄 수 있는 게 당연했다. 정혈대를 주면 그냥 쓰라고 주지, 그걸 굳이 갚으라고 하는 사람들은 없다. 혹시 새기라도 하면 가디건이라도 허리에 매서 가릴 수 있게 도와주고,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서는 대신 사다달라고 부탁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 상황을 직접 겪어보지 않고 왈가왈부하는 사람들 때문에 상당히 화가 날 수밖에 없다. 배에 힘을 주면 정혈이 안 나온다는 얼토당토않은 개소리들은 애시당초 생물학적 여성이 아닌 자들이 하는 말이다. 그들은 정혈을 겪어본 적도 없으면서 정혈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모 소설가의 소설을 보고 사람들이 비웃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한때는 괜히 성질을 부리는 여성을 두고 '생리 중이냐?' 하는 밈 같은 상황을 보고 뭔 염병을 떤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정혈 중에는 기분이 날뛰며 오만 증상이 다 나타나기에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나이가 들수록 이건 인간이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호르몬의 노예일 뿐인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정혈 전후로 올라오는 뾰루지와 일주일 전에 미친 듯이 당기는 식욕과, 정혈 도중 소화불량에 이은 편두통, 허리 아픔, 복통, 몸살기 등 이 오만 증상들을 다 설명할 수 없으니까.


아주 아주 특이한 점은 생물학적으로 찾아오는 이 고통의 순간(=정혈)을 온전히 아이를 낳기 위해 있는 과정이라고 한국의 교육과정에서 가르쳤다는 점이다. 또한 정혈은 축복이니 출산을 위한 과정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볼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볼 때마다 정말 ㅈ같다. 그렇게 좋으면 좋은 사람들이 애를 낳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궁이 없는 사람이라면 인공자궁 시술을 하든 기계로 하든 아이도 낳아 주시면 한국의 인구 감소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부디 꼭 낳아주시길.


나는 정혈을 생리라고 배우며 자란 세대다. 생리한다고 말하는 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했고, 생리대 있냐고 큰 소리로 묻지도 못했다. 생리대는 꼭 파우치 안에 넣어서, 주머니 안에 넣어 남들에게 보이지 않게 숨겨야만 했다. 생리를 시작하면 다들 꽃다발을 주며 여성 됨을 축하한다는데 정작 생리는 너무 불편하고 기저귀찬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생리를 한 달에 한번 하는 것이라고 돌려말해야만 했다. 머리가 크면서 '왜?'라는 의문이 점점 더 커져갔고, 이제 파우치에 굳이 생리대를 숨기지도 않는다. 월경, 달거리 등 여러 단어가 있으나 정혈을 사용하는 것이 맞다 생각해, 이 글에서 '정혈'이라 적었다. 


대다수의 젊은 여성층도 정혈을 끔찍하다고 생각한다. 정혈통도 문제거니와 육아와 출산에 대한 제도, 사회의식 역시 아직까지 너무나 미미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데 출산만 장려하고, 한국의 주거정책 역시 신혼부부만을 장려할 뿐이다(SH LH분들아........... 1인 가구도 10평대 집에 좀 살고 싶다. 20평까진 안 바란다. 14-15평이면 충분하다. 아님 동반자법 좀 빨리 통과시키고 2인 가구 이상 받아줘라).


2017년도인가? 예전에 정부에서 가임기 지도를 만든 일이 있었다. 그 지도를 보는 순간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마 예상하기 쉬울 것이다. 

'이 지도를 만든 이유가 뭐야? + 여자를 애 낳는 도구로만 보네?'


정부는 인구 문제 때문에 출산을 장려할 수밖에 없고, 신혼부부에 대한 지원을 많이 해주는 것이 그 해결책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는 임신과 출산을 거친 후 육아 문제의 해결이다.


현실적으로 아이는 출산 후, 4-5살이 되기 전까지 부모 중 한 사람의 보살핌을 바라며 자라야 한다. 그리고 그 육아 노동의 강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한국은 여-전업주부와 남-돈을 벌어오는 가장이라는 형태로 오랜 시간 동안 사회를 유지해왔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맞벌이 부부가 늘고(어쩌면 맞벌이를 하지 않으면 돈을 모을 수 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경력을 끊지 않으면 육아마저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운이 좋게 친정이나 시댁 등 할머니가 아이를 봐줄 수도 있지만, 그마저도 안 된다면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할 수밖에 없게 된다. 국가에서 시터를 붙여주는 등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전해 들은 프랑스의 육아 환경과는 전혀 다르다. 프랑스에서는 아이를 셋이나 낳고도 육아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국가적 제도가 잘 되어 있다고 한다. 경력이 단절되는 일도 일절 없으며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회사에 눈치를 보고 해고당하지 않는 사회적 제도가 잘 마련되어 있다.


왜 이렇게 육아에 대해 설명하고 있냐면, 결혼하지 않았어도 1년 미만의 아이를 돌보는 언니의 고충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었기 때문이다. 


신생아는 시도 때도 없이 몇 시간 간격으로 일어나 밥달라고 울고 기저귀 달라고 울고 집안일 할 새도 없이 엄마를 찾는다. 누워 있을 땐 양반이었다. 뒤짚고 기어다니기 시작하니 혼자 기다가 여기저기 부딪히고 서랍장은 왜 그렇게 열고 아이한테 위험한 건 왜 그렇게 많은지. 혼자 아이를 보면 화장실에 다녀올 새도 없이 엄마를 부르며 울어댄다. 껌딱지라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닌다. 잠든 줄 알고 눕혀놨는데 내려놓자마자 다시 우렁차게 우는 아이를 안고 있자면 내 인생의 의미는 무언지, 이렇게까지 해가면서 애를 키워야 하는지 현타를 맞이하기엔 충분할 것이다. 육아는 자신의 밑바닥과 마주하는 것이라는 언니의 말이 절실히 마음에 와 닿았다.


어린이집에 가는 시기가 오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이쯤되면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질문 폭격을 한다. 왜? 왜??? 이걸 대충 대답해도 안 되고 아이의 자존감을 키워주면서 양육자가 네게 무관심하지 않다는 선을 보여주는 적당한 정도를 나는 도저히 찾지 못할 것 같다.


다시 정혈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초등학교 5학년쯤에 정혈을 시작한 이후로 10몇년 간 꾸준히 정혈대를 사용하면서 특정 정혈대를 사용하면 두통 증상이 심해진다는 걸 20대에 들어와서야 깨달았고, 그 후에는 순한 정혈대, 유럽 정혈대 등 브랜드를 갈아타보다가 결국 하기스 기저귀 일자형 대형에 안착한 나로서는 정혈대 브랜드를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그러게. 기저귀는 이렇게 잘 만들면서 어째서 정혈대는 그렇게 순한 거 하나를 못 만들어서 이 지경까지 왔냐. 오버나이트를 써도 다 새는데 어쩌라는 거냐. 


집에서는 정혈컵을 써도 괜찮은데, 사무실 화장실 환경에 따라 컵이 편한지, 정혈대가 편한지는 좀 다른 거 같다. 정혈컵 쓴다고 피가 손에 안 묻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당신이 정혈컵 초보자라면 더더욱.... 정혈컵 판매 역시 문제가 여러 가지인데, 한참 한국에 정혈컵을 쓰자는 이야기가 돌 무렵에 펀딩을 통해 남성들이 제작한 정혈컵이 판매된 사례가 있다. 일단 사용도 안 해본 남자들이 만들었다는 것부터 찜찜했고, 동물 실험에 이어 여성 혐오 표현까지 응 안 사가 됨. 그렇게 여성용품을 사업 아이템으로 써먹을 생각은 하지만 여성 편의를 위한 움직임은 글쎄...?


[+하지만 정혈컵은 꼭 추천합니다. 여성분들 꼭 꼭...!!! 특유의 스윽 하고 나오는 느낌 완전 없어지니까요. 꼭 정혈대가 아니어도 탐폰, 정혈컵 등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보시길 꼭 추천드립니다(기저귀->정혈대 성인버전+크린베베와 가격대 비슷 or 더 저렴하게 출시하면 백퍼 팔립니다 여러분 제발 만들어줘).]


우스갯소리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혹시나 남자가 정혈을 했더라면, 애초에 정혈통이 싹 사라지는 약이나 자궁을 절제해도 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수술들이 이미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적어도 정혈통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은 데는 성별의 문제도 아주 크다고 생각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 맞는 것 같다. 남자가 특권을 누리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정혈을 했다면 적어도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이 말에 무슨 헛소리냐고 한다면 뭐 그럴 수 있지. 그러나 생각해보세요. 기득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2015년 4월 런던 마라톤에서 키란 간디가 정혈 용품을 전혀 착용하지 않은 채 피를 흘리며 마라톤을 완주한 의미를.


+ 발행을 누르려니 정혈이라는 키워드는 없이 생리만 존재한다. 브런치도 아직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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