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하자마자 우선은 화장실에 가서 손을 씻고, 텀블러 가득 물을 따라 가져온다. 커피가 당긴다면 따듯하게 내린 드립 커피 한 잔도 가져온다. 메일함에 로그인한 후 쌓인 읽지 않은 메일들을 확인한다. 투고 원고나 게시판 공지 등을 확인한 후에는 어제 받아둔 라이츠 가이드를 켰다.
수십 개가 넘게 쌓인 원서들은 정말 가지각색이다. 출판사의 성격에 따라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무슨 내용인지도 모를 외국어가 쓰여 있다. 때로는 복사해서 번역기에 돌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직접 그 원서를 읽으며 책을 평가해본다. 한국 시장에 출간한다면 어떤 제목으로 내놓을지, 컨셉은 무엇인지, 타깃은 누구인지, 저자의 영향력과 띠지 문구 등에 사용할 도서의 이력은 어떻게 되는지, 아마존 리뷰는 어떤지, 실제로 많이 팔렸는지, 한국과 어울리는 문화권의 이야기인지 등. 모든 의문은 그래서 이 책이 잘 팔릴 것 같은가?로 귀결된다.
대충 검토해보고 싶은 도서를 뽑은 후에 저작권 담당자에게 연락을 부탁한다. 검토용 도서가 들어오면 바로 확인해보고 리뷰가 필요한 것은 전문가에게 맡긴다. 외서 검토는 쌓이면 쌓일수록 국내 기획에 활용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바쁘더라도 꼭 시간을 들여 훑어보는 것이 좋다.
그러다 원고로 넘어간다. 최근에는 기존에 하던 도서보다 다양한 분야의 도서를 하고 있어, 편집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다시 고민하게 된다. 내년에 1인당 분담된 6권의 도서 중 2권의 국내 도서와 4권의 해외 도서를 출간할 예정이다. 그중 내가 고른 외서는 단 하나뿐이지만.
처음 편집자로서 일을 시작했을 때는 소설 편집을 하고 싶었다. 워낙에 책 읽기를 좋아했고 글쓰기 역시 픽션이 재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번은 저자분께서 왜 이렇게 손을 대지 않았냐고 했는데. 그때 머리를 맞은 기분이었다. 작가는 자기 글에 대한 프라이드가 없지 않을 텐데. 왜 고쳐달라고 생각했을까. 반점 하나 빼는데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저자와 '왜 안 고쳤어요?!'라고 하는 저자 사이에는 큰 간극이 있었다. 도대체 어느 기준에 맞추라는 말인가? 문학적 의도의 허용과 도서 편집의 기준 역시 편집자의 몫이었다. 책이 나오면 이름 하나 실리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일부 저자를 제외하고 그 내용을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은 편집자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인문, 교양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베스트셀러의 대열에 오른 지대넓얇이 투고 원고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수많은 출판사가 이 책을 꺼렸던 이유는 한국 시장에서 인문 교양이란 늘 어렵고 이해할 수 없는 전문적인 부분으로만 다뤄져 왔기 때문이다. 대학 교재나 전문직이 볼 법한 어려운 단어들이 나열된 책을 대중은 싫어했다.
지금이야 하루 한쪽씩 읽는 상식이니 교양이니 다양한 도서들이 출간되었고, 베스트셀러에서도 인문교양 도서가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 후로는 소위 말랑말랑한 인문교양 도서에 눈길을 주게 됐다. 지식을 전달하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책.
현대인들은 너무 지쳐 있어서 보기 힘든 책은 굳이 집어 들지 않는다. 힐링 에세이나 유명 저자의 회고록 같은 도서들이 주를 이룬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가벼우면서도 머릿속에는 무언가 채울 수 있는 그런 도서. 나 역시 그런 책을 좋아했고, 그런 책을 만들고 싶어 이직했다.
물론 현실은, 편집장님이 나눠 주는 대로 해야 한다. 강력하게 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밀어붙여야만 하고, 그 아이디어가 채택될 때까지 윗분들에게 이 기획이 어째서 나왔으며 왜 시장에 먹힐 것인지 열심히 발표하고 기획서로 설득해야만 한다. 재쇄를 찍지 못하는 책은 거의 의미가 없다는 취급을 받으니(그렇지 않은 곳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출판사는 1쇄 소진 이후부터 이득이 난다고 계산합니다) 이건 꼭 몇 부 이상 팔립니다란 확신을 가지고 밀어야만 한다.
그렇게 기획이 통과되면 원고를 받아(이 짧은 '원고를 받아'라는 말에는 작가와의 회의, 아이디어 구상, 닦달 등 아주 여러 과정이 함축되어 있다) 교정, 교열을 진행한다. 파일교-1교-2교-3교까지 텍스트와 씨름해가면서 마무리하는 동안 표지 아이디어도 생각하고 홍보방안도 생각하며 보도자료 초안 작성까지 마쳐둔다. 내지 디자인도 되도록 책의 성격과 내용을 고려해 그에 맞추도록 요청한다. 나는 대다수를 디자이너의 재량에 맡기는 편이지만, 원하는 부분이 있다면 강력하게 요구하는 편이다.
교정 도중에 보도자료 초안을 써두는 건 후에 내가 편하기 위함이다. 보도자료가 완성되면 카드 뉴스나 홍보 이미지, 상세 이미지를 만드는 건 비교적 쉬워진다. 문제는 출간 후 어떻게 홍보할 것인지다. 회사에서는 다른 도서들을 밀어주느라 이 책에는 마케팅을 진행할 여력이 없을 수도 있다. 또 특정 분야 전문 출판사는 계속해서 같은 신간이 나올 경우 매대에서 자기 책을 자기가 밀어내는 꼴이 될 수도 있다. 명목상 이어지는 출판사 sns활동(인스타, 블로그 등)에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지만 보여주기식 업무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게 웃음 포인트다. 여하튼 의미가 없어도 책 한 권 바닥에 놓고 띡 찍어 올리기라도 하는 무언가의 활동이 있어야 '저희가 이런 홍보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업무 보고에 올릴 거리가 생긴단 말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왜 편집자가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마케팅을 제대로 할 거라면 마케팅, 영업 부서에서 해주면 되는 일일 텐데. 소규모 출판사로 갈수록 이런 부수적인 업무는 더 과중해진다. 심각한 곳은 마케터라는 직무가 존재하지 않는 곳도 있다. 보도자료를 서점에 발송하는 것까지 직접 편집자가 맡고, 국내나 외서 인세 정산은 물론 대표전화까지 편집자가 맡는 경우가 허다하다(이건 재무/총무팀에서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보도자료는 책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써야 하는 게 맞다. 그러니 편집자가 맡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외 다른, 수많은 부수적인 부분까지 편집자에게 맡기는 경우가 허다하다. 간단한 이미지나 카드 뉴스를 다룰 수 있는 능력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동영상 제작에 외국 도서전은 혼자 가도 거뜬한 외국어 실력까지 요구하곤 한다. ...XX, 나는 이러고 살고 싶지 않은데. 이런 것까진 편집자의 업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데-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이 다니는 그 기업이 바로 ㅈ소기업입니다. 업무분담 제대로 해주십쇼, 사장님들.
하루에만 수백 종의 책이 쏟아진다. 다품종 소규모 생산 체제로 이뤄진 출판업에서는 홍보가 정말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책이 나와도 홍보가 없다면 묻힐 수밖에 없다. 라디오에 한 번 소개되기만 해도 그 주 동안 평소 대비 200-300권의 주문이 더 들어온다. 연예인이 한 번 들고나오기만 해도 폭주한 주문으로 재쇄 찍는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최종 인쇄를 넘기고 파일을 확인할 때는 두근두근거린다. 좋은 의미와 나쁜 의미 모두. 이상 없다고 확인한 후에 배열표를 작성하다가 장 제목이라도 잘못 들어간 걸 발견하면 당장 인쇄소에 전화해 수정자가 있다고 전달해야만 한다. 심장이 쫄깃해지는 순간이다.
마지막에 몇 번씩 확인한다고 있던 오탈자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최대한 해보는 거다. 별색 인쇄라고 적었다가 양장 도서 표지 배경이 모두 별색으로 들어가 전부 재쇄를 찍은 적도 있다. ISBN 번호와 바코드를 찍었을 때의 번호가 달라 스티커 작업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본문 특정 부분의 텍스트나, 가격 등이 잘못되어 스티커 작업을 하기도 한다. 독자 입장에선 스티커를 뜯어보고 가격이 더 올라 있으면 이건 뭐지 싶은 배신감이 들 수 있는 사항이다.
이 직업의 가장 큰 매력은 내 손으로 인해 다듬어지는 문장과 또 내가 시장에 선보이는 아이템이 어떻게 먹히는지 지켜보는 것이다. 아직 직접 기획한 도서를 빵빵 터트린 적은 없지만 대략 반년간 생각하고 기획해 저자 컨택부터 집필, 차례 작성, 교정 교열, 이후 홍보방안까지 1년 넘도록 준비할 예정인 도서가 있다. 저자분께 연락하는 데만 무려 한 달이 넘게 걸린 터라 꼭 이분과 진행하고 싶다고 느꼈다. 미팅차 만났을 때 저자분과의 첫 대면으로 너무나 긴장했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나이 차도 느끼지 못하고, 막힘없이 말이 술술 늘어놓는 나를 보고 '아 나 진짜 이 책 만들고 싶었구나. 꼭 하고 싶었던 거구나'를 느꼈다.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을 세상에 내보이는 수단으로 편집자를 택했단 사실을 실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다른 업계로 가면 어떻겠냐는 말을 많이 한다. 물론 가는 게 참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콘텐츠 에디터가 되더라도 '책'이 좋아서 편집자가 된 이유를 뛰어넘을 흥미로운 거리를 찾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출판계에 터지는 사건·사고(성추행과 성폭행 사건, 편집자 고용 후 다른 직무 배치, 소규모 출판사의 직원은 MD[편집자+디자이너+마케터+영업 모든 걸 다 함])를 보고 있자면 여기가 유독 이상한 건지 모든 업계가 다 이 모양인 건지 의문이 생기고 찐한 현타를 맞이하기 마련이지만.... 내가 들어오기 20년 전부터 이 업계는 늘 불황이었고 또 앞으로도 불황일 예정이지만....
그래도 이 업계에 남아 있는 모두가 책이 좋아서 남아 있는 사람들이듯이, 나도 그런 거다. 어렸을 적 책으로 가득한 방에 둘러싸여 지냈던 것처럼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그 말 그대로. 책을 통해 겪을 수 있는 풍부한 간접 경험과 다른 미디어에서 찾아볼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감성까지 전부 다른 사람들도 느껴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