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 경찰을 도입하기
그 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

그들도 우리만큼 아픈 생명이다.

by 고대윤
처음에는 얼마나 예뻤다고, 뽀얗고 통통하게 살이 올라가지고 너무 예뻤다니까. 그런데 버려지고 3개월이 지나니까 이 녀석이 살이 다 빠져서 지금은 얼마나 안쓰러운지 몰라. 그래도 아직도 정이 있는 사람들이 있더라. 집을 조그맣게라도 만들어주고, 사료도 주고, 물도 주고. 그런데 이 녀석이 내가 출근할 때면 막 내 차한테 달려오는거야, 아마 자기를 버리고 간 주인이 탄 차가 내 차랑 비슷한가봐. 그래서 늘 조마조마해.


버려진 지 3개월이 된 녀석은 아직도 주인을 기다리는 것 같다고 했다. 아니, 어쩌면 평생을 그 자리에서 자신을 버리고 간 주인을 기다릴지도 모른다. 우리는 쉽게 그 녀석들의 기억과 그들의 정을 떨쳐냈지만, 그 녀석들은 자신의 가족과 주인을 배신하지 못하고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 듯 했다.




매년, 버려지고 안락사를 당하는 유기견의 개체수는 대략 13만마리, 지방의 중소 도시의 인구만큼의 생명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생명을 뺏기고 있다. 그들이 잘못 한 것이라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사람을 만난 것 그리고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그러니까, 두 발로 걷는 개체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네 발로 태어난 것이 바로 죄가 되는 셈이 되었다.


나의 어릴 적에는 반려견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어느 집에서 귀여운 새끼 강아지를 봤는데 몇 개월 혹은 1년이 지난 뒤에는 녀석을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개를 키우는 이유 중 하나가 그 것이었고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듯 여기기도 했다. 사람의 몸에 좋다는 연구 자료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 것을 먹고 특별히 나아진 실례라도 있는 것일까, 서울 88 올림픽을 계기로 "보신"이라 씌어진 집이 대거 철거 될 때까지 그 문화는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 뒤에도 사실 큰 변화가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개나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이 조금 나아졌을 뿐,

개나 고양이는 늘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개체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반려동물로 바꿔 부르기 전까지 우리는 그들을 애완동물로 불렀다. 그러니까, 우리를 기쁘게 해주고 즐겁게 해주는 완구와 같은 개체들이라는 뜻이다.




혼자사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혹은 서구의 문화가 조금 더 유입되면서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은 조금씩 달라졌다. 그 달라지는 인식 속에서 입양되는 아이들의 개체수도 급성장을 했다. 그 결과, 내가 산책할 때 예쁜 반려견 하나와 동행하지 않으면 나의 생활수준이 마치 떨어지는 것같이 비춰지기도 한다.


고급 수입차에 아이들을 태우고 찍은 사진들을 개인의 SNS에 올려놓는 것은 이미 한물 간 유행이 되어버렸다.

그런 유행의 이면에서는 반려동물들에 관련해서 많은 부분들이 곪아가고 있었다.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어린 시절에는 더 없이 예쁘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이 예쁜 아가들이 자라서 다 배우처럼 예쁘게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씩 달라지기도 하고 그 기대에 못 미치기도 하듯이, 반려동물 역시 그렇다.

여기서 차이가 있는 것은 사람은 자신의 자식이기에 버리거나 쉽게 유기할 수 없지만(하기는 요즘은 그런 사건들도 많이 접한다.) 반려 동물들은 쉽게 유기할 수 있다. 그렇게 아이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상에 버려지고 떠돌게 된다.




보통의 유기동물들은 약 열흘 동안의 재입양 공고 기간을 갖지만, 다시 입양되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그리고 입양되지 못하면 아이들은 "안락사"에 처해진다. "안락사"를 당할 때까지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주인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리고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그들에게는 가족의 모습을 눈에 담았을 것이고.


하지만, 개인이나 혹은 여타의 보호 단체에서는 못 믿을 일들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다. 믿기 힘든 사육 시설과 그리고 아직도 눈 감은 척 행해지는 식육이 그 것이다. 가령, 개인의 경우에 반려동물의 소유가 자신이라는 이유로 그들에게 학대를 가한다. 구타를 넘어서서, 구타한 상처로 인해 죽을 때까지 방치하기도 하고 기아 상태에 이르기까지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잔인한 일들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이제는 도박으로 금지되어 이뤄질 수 없는 투견을 비롯한 반려동물들을 이용한 도박과 내기까지,이 땅에는 아직도 "내 것" 혹은 "내 동물","내 재산"이라는 이름으로 학대가 이뤄진다. 더불어 보호단체의 경우에도 몇몇의 보호단체들을 제외하고는 국가의 보조금이나 기타 단체 혹은 시민들의 후원을 받아가며 진심으로 유기 동물을 보호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은 곳도 많다.


그 대표적인 예가, 몇 년 년 크게 보도 된 적이 있었던 "더 케어"의 "박소연"회장이다. "더 케어"같은 동물 복지 보호 단체는 꽤나 많은 후원을 받는다. 그들에게 배정되는 국고도 상당할 것이고, 더불어 후원 역시 넘쳐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과연 투명하게 그 모든 것들을 자신이 하겠다고 약속한 일에 투명하게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만약, 안락사를 시키지 않았으면 그들은 더 힘들었을 것이다."라는 변명으로 운을 뗀 "박소연씨"는 악마의 모습 그대로였다. 그 사건이 있기 얼마 전, 대전동물원에서 탈출한 "퓨마"를 어쩔 수 없이 안락사 시켜야 했을 때, 그 녀는 눈물을 보이며 안락사 된 퓨마를 향한 사랑을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했던 사람이다.




그럼, 왜 그들은 반려동물 및 유기동물을 학대하는 것일까. 나는 그 원인을 "내 것"이라는 소유의 개념으로 반려동물을 다가가는 것에서부터 찾았다. 결국, 그들에게는 아주 오래 전 "개"를 보신으로 생각하고 있던 시대의 개념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한 사고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이라는 단어보다 "재산"이나 "소유"라는 단어의 의미가 더 크게 작용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는 이따금 방송에서 보여지는 반려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인터뷰 할 때마다 보여지는 장면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내 개인데, 당신들이 무슨 상관이야??"라든가, "내 농장에서 나가!!"라는 식의 강한 협박성 발언등은 그들이 아직도 전근대적인 의식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반영한다.


동물 경찰 제도는 이런 동물 학대를 예방하려는 취지로 그 제도를 고려하는 것 같다. 하지만, 단순하게 동물 경찰 제도를 도입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예방되고 교정되는 것이 아닐 것이라는 것은 확신하다. 왜냐하면, 반려동물 자체에 대한 의식이 현재에 머물러 있다면, 혹은 유기 동물의 개체수가 오히려 증가하게 된다면, 동물 경찰의 한정된 인원으로는 제한적인 처리 밖에 진행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근대적인 사고와 자신의 "것"이라고 강하게 생각을 하는 재산적 측면의 사고를 가진 이들을 말그대로 "계몽"할 필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어떤 생명이라도 그 생명은 절대 돈으로 사고 팔 수 없으며,

비록 그 소유를 자신들의 돈이나 재산으로 취했다하더라도 그 것은 생명의 댓가가 아니라는 것이 그 것이다.


아주 오래 전, 인신매매 사건이 만연했던 때가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돈"이나 "재화"의 개념으로 보고 사건을 저질렀다. 현재 반려동물들에 대한 구타 혹은 학대 및 유기는 그 연장 선상에 놓여있다. 아직도 "인권"을 찾고 "생명권"의 존중을 찾고 있지만, 아직 우리에게는 "생명"이 갖고 있는 그 비중을 알지 못한다. "생명"이 얼마나 무겁고 숭고한 것인지, 그래서 사람의 깜냥으로 그 척도를 쉬이 평가할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다.


동물 경찰 제도는 꼭 필요한 제도가 될 것이다. 동물 경찰 제도로 인해서 버려지는 아이들과 학대받고 고통 받는 아이들의 개체수가 줄어들면 그보다 더 좋은 취지의 제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은 절대 돈이나 재화로 계산 될 수 없고, 평가될 수도 없으며 그 누구의 재산도 소유도 아니다는 생명에 대한 존중이 없어면 아무리 훌륭하고 좋은 취지의 제도가 있더라도 정착되지 못할 것이다.


2020-07


글, 사진 고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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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어떤 강아지를 입양을 할 수는 있다. 하지만, 당신은 그 강아지의 생명까지 돈으로 산 것은 아니다. 생명은 돈으로 평가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네 발과 두 발 혹은 생명의 길이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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