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스무 살의 본과 생활...
코로나로 인해 새롭게 시작된 비대면 강의는 아날로그 세대 중에서도 가장 모자란 "나"라는 인간을 당황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처음에는 주어진 "주소"로 찾아들어가기 급급했고, 그 뒤에는 집중을 하는 것에 쉬이 적응을 하지 못했고, 그리고 한 번 들어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강의들을 녹화하지 못하고 넘겨야 하는 상황들에 대해서 나 스스로 한심해했다.
내가 복학한 2학기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기에, 오히려 1학기에 비해 대면 시험은 적었어야 함에도 1학기 때 한 번 보았던 과목들 모두 2학기에는 두 번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그 두 번의 시험을 치르면서, 나는 학교에 등교하며 배우고 시험을 치를 때보다 더 피폐해지고 피곤하며 끝내는 나의 멘털이 붕괴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 글은 내가 비대면 강의를 통하여 경험한 강의 경험과 시험 그리고 그로 인해서 겪은 나름의 불편함과 마음고생에 대한 이야기다. 이런 글들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많으시다는 것을 알기에, 굳이 이런 글을 올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곳은 나의 공간이고, 내 가상의 책의 한 부분이므로 내 의지대로 적어나가보려고 한다.
이번 학기에 나를 제일 힘들게 한 과목은 "Diseases of Poultry", 한국어로 표현하면 "조류질병학".
이 과목의 교수님은 대한민국의 백신에 관한 연구분야에서는 가장 훌륭한 분이시자, 내가 늘 마음속으로는 존경했던 분.(다만, 교수님 성함의 직접적 언급은 하지 않겠다.)
하지만, 이 교수님의 수업은 영어로 진행이 되고, 학문 자체가 어려워서 많은 학생들이 힘겨워한다. 그리고 본과 1학년 1학기에 진행되었던 교수님의 또 다른 과목인 "면역학"에서 30명이 넘는 학생에게 "F"를 난사하신 경험이 있으신 분이시기도 해서, 우리는 이 교수님의 수업을 늘 얼음 위를 걷는 것처럼 불안하게 생각했다. 이번 학기의 과목도 다르지 않아서, 나는 교수님의 수업은 되도록 집중을 해서 듣고, 가장 많은 시간을 공부에 쏟아부었다. 하지만, 연구자로서 존경을 하는 것과 나의 학점을 좌우하는 교수님으로써의 감정과 입장은 너무나도 달라서 나는 교수님의 과목에 대해 벌벌 떠는 한 학기를 보내야만 했다. 나의 동기들은 이미 한 학년 위로 진급한 상황에서 나 혼자 7과목, 그리고 7과목에 해당되는 실습까지 총 24학점의 과정을 버텨내야 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더불어 이번 가을에 나의 개인사가 겹치고 겹쳐서 나의 눈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별로 없었을 정도로 힘이 들고 외로웠으며, 그래서 늘 지쳐있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에는 "왜 영어를 잘해야만 상위권 학과에 가죠??" 혹은 "수학을 잘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막상 대학에 입학을 해보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을 수 있게 된다.
가령, 영어로만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에서부터, 대부분의 교재는 영어로 되어있고, 그것도 아니라면 대부분의 학명은 영어이기에, 영어가 없는 강의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국어"를 쓰는 나라입니다."라고 감히 자신 있게 자부심을 가지고 말을 한다 하여도, 그것은 비웃음을 사는 말에 불과하다. 그 어떤 나라도 "국어"를 학명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우리가 기생충이라 부르는 "회충", "촌충", "구충"들도 모두 다 그들 나름의 학명을 갖고 있다. 만약, 영어가 아니라면, 라틴어 혹은 우리가 우습게 아는 스페인의 언어인 서바나어라도 "국어"보다는 더 인정을 받고 있는 것, 그것이 현실이다.
그리하여, "영어로 공부해야 하는 것은 대한민국에서 이치에 맞지 않아요."라고 말하는 것은 "저는 이 학문들을 공부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다.
더군다나, 이런 원서들의 양은 정말 방대해서 때로는 천 페이지를 가볍게 넘어가는 책들도 허다하다. 그중에서 교수님들께서 중요한 부분, 중요한 내용들에 체크를 해주신다 하여도 그것을 혼자 정리하고 공부를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때로는, 강의를 듣고 책상 앞에 앉아서 수업한 것을 복습하고 다시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하루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 꼭 어떤 "고시"라든가, "무슨무슨 시험"에 응시를 하지 않는다 하여도, 공부를 직업으로 삼고 책상 앞의 공간을 내가 이 세상에 가질 수 있는 모든 공간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여하튼, 나는 이 번 학기에 1,000페이지가 넘는 교재를 가진 과목을 또 몇 개를 경험했으며, 이 교재들을 바탕으로 시험을 봐야만 했다.
강의 시간에 교수님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을 체크해주셨고, 나는 그것을 따라가며 책에 밑줄을 그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많지 않다고 생각했던 양은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서, 마침내는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면 숨이 차오를 정도로 많아졌다. 중요한 것은 수도 없이 많다. 질병을 일으키는 것은 바이러스와 박테리아, 그리고 그 모든 어떤 것들로 가득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어떻게 인간으로 전파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도 어렴풋이나마 예상할 수 있게 되는 것, 그 자체가 배움의 기쁨이겠지만, 이 많은 것들을 다시 정리하는 것들은 너무나 어려웠다.
그림은 되도록 똑같게 그려서 필기 위에 첨부한다. 그리고 점차 내용을 줄여나가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위주로 필기를 다시 정리한다.
시간이 오래 걸렸다. 내 성격에 맞게 정리정돈되도록 필기를 하는 것에, 오랜 시간이 다시 정리하는 것에 또 오랜 시간이 그리고 마지막 써머리에 다시 오랜 시간이 걸렸다. 피 효율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이 내게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여러 번 반복해서 필기를 옮기는 동안, 물론 자연스럽게 암기가 되는 것도 있었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것들은 더없이 많았다. 그럴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냥 다 외우는 방법밖에 없었다.
"왜 공부를 해도 안 될까요??"라고 물어보는 친구들과 대화할 때면, 보통 두, 세 가지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방향이 틀렸고(이번 학기 나의 공부 방법처럼), 그리고 중요한 하나는 절대적인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 그들은 자신이 열심히 하고 오랜 시간을 공부에 투자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스스로의 생각에 불과할 뿐이다. 하위권에서 중위권으로 발돋움하는 것에는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만그만한 학생들끼리 뒤섞여 그곳에 엉켜있으므로, 하지만 중위권에서 중상위권으로 오르려 할 때면, 지금까지 해왔던 노력의 몇 배가 필요하다. 그것을 아는 데까지, 느끼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자신을 너무 높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곳에 온 다음부터, 나를 아예 내려놔버렸다. 이 곳은 나보다 뛰어난 사람들이 집합소이기에. 나는 그래서 어떤 시험을 보기 전에 몇 백장의 종이와 몇 자루의 펜을 준비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눈으로 봐도 암기가 될 그 내용들을 다 손으로 쓰면서 암기를 한다. 엄지와 검지에 굳은살이 박히고 손가락이 아파서 펜을 못 쥘 정도가 되어도 모자라다고 생각되면 절대 그만두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늘 쓰고 또 쓰고, 또 암기하고 암기한다.
"왜 내가 합격하지 못할까??" 혹은 "왜 나의 성적이 오르지 않을까??"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말한다.
과연, 당신이 노력하는 것이 다른 이들에 비해 얼마나 많은 것인지, 혹은 적을 것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진지하게 생각하면 답이 나온다. 타인들에 비해 몇 배의 노력을 해도 되지 않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그것이 비록 안타깝더라도, 어쩔 수 없다. 세상은 그렇게 나뉘어 있다. 나보다 뛰어난 사람과 나 같은 사람...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유다.
금요일 조류 질병학 시험을 앞두고, 나는 긴장에 긴장을 했다. 중간고사 성적이 좋지 않아서 기말 시험에서 나는 상당히 높은 점수를 획득해야 했다. 금요일 오전 9시에 있을 시험을 앞두고 나는 목요일에 집에 들어가지 않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학교에서 가까운 모텔에서 밤새 공부를 하기로 계획을 했다. 분명, 입에 넣어도 소화가 되지 않을 것을 분명 알지만, 허기를 채울 수 있도록 간단하게 편의점 도시락을 먹은 다음, 공부를 시작했다.
이미, 그 지난 주말부터 연달아 시험이 있어서 잠의 양이 모자란 상황에서, 과연 내가 밤샘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감은 없었다. 그래도 밤을 새워야만 한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나는 F학점 대상자로써, 운이 좋아야 개설되는 계절학기를 듣거나, 그것도 아니면 본과 4학년, 국시 준비를 할 때 수강할 수 있거나, 최학이면 본과 5학년을 다녀야 한다.
이런 생각은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최근 들어 갑자기 안 좋아진 집안 사정은 내가 빨리 졸업을 하고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데, 지금 이 곳에서 멈출 수가 없다는 생각에 볼펜을 쥔 손이 떨렸다. 밤을 새워야 한다. 잠을 자지 않으려면, 카페인을 섭취해야 한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시고, 다시 카누를 마셨다. 잠시 달아난 것 같던 잠은 어느새, 내 머릿속 혹은 눈꺼풀 위로 다가와 스멀스멀 나를 유혹했다. "한 시간만 자고 해... 한 시간 잔다고 달라질 것은 없어..."... 잠의 유혹이 올 때면 또 커피를 마셨다. 입이 쓰다. 그래서 조금 달달한 믹스 커피를 마시자. 맥심 모카 골드 믹스 커피를 몇 잔인 지도 모르게 마셨다. 다섯 잔?? 여섯 잔?? 아니면 일곱 잔일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졸기 일보 직전에 나는 고농도 카페인 음료인 "레드불"의 캔을 열어서 입 안에 쏟아부었다.
그리고, 7시 반 꼬박 밤을 새우고 머리를 감고 머릿속을 정리하기 전 볼 일을 볼 때, 내 소변이 핏빛인 것을 확인했다. 그래도 밤을 지새웠다. 목요일 오후 4시 반부터 15시간을 꼬박 책상 앞에 앉아서 암기를 했다. 하지만, 내 머릿 솟은 몽롱 했다. 카페인으로도 어쩔 수 없는 한계... 그것이 바로 체력의 한계였다.
나는 공황장애 환자다. 무려, 10년...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 동안 지속되었을..., "공황장애"는 갑자기 찾아온다. 가령, 사람이 밀집된 지역이나 혹은 내가 어떤 어려움에 쳐했을 때나...
이런 지랄 같은 증상이 시험 시간에 찾아오면, 죽을 것 같은 느낌과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내 몸에서 일어나는 알 수 없는 증상들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
9시에 시작된 시험에서 총 15장의 시험지를 보며 나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분명, 밤새 내내 공부했던 내용인데 갑자기 정전이 된 것처럼, 머릿 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한 번 큰 호흡, 다시 두 번째 큰 호흡, 마지막으로 세 번째 큰 호흡을 하고 답을 쓰기 위해 노력을 했다. 앞의 문제를 쓰는 동안, 뒤에 있는 문제의 답들이 내 머릿속에서 휘발되어 날아가버렸다. '어쩌지... 큰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려, 두 시간이나 되는 긴 시험 시험이 시험문제의 반이나 남았음에도 30여분이 채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녀석이 찾아왔다.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면서 얼굴이 뻘게졌다. 피부에 반사적으로 붉은 반점들과 함께 가려움증이 찾아왔다. 머릿속은 더 백지상태가 되어갔다. 나의 한 학기가, 어쩌면 일 년이 이대로 날아가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더 커져만 갔다. 답을 쓰는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눈에서 눈물이 솟아오르고, 흐느낌이 시작될 때, 시험 감독을 하시던 조교님께서 시험 종료를 선언하셨다. 나는 몇 문제의 답을 쓰지 못한 것을 보며 어쩌면, 1년이라는 시간을 더 학교에서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리의 힘이 풀렸다. 그리고, 문득 눈물이 흘렀다.
한 때, 어릴 적 수재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보통 조그만 동네에서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뛰어난 아이들에게 곧잘 붙여주던 단어에 나는 우쭐했었다. 하지만, 질풍노도의 중학교 시절, 자퇴 권고 생의 고교생 시절을 지나고 재수의 실패와 그 실패 끝에서 방황하면서 떠돌던 잉여인간이었던 내가...
다시금, 보통 사람들의 세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그것도 조금 더 나은 모습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노력"이라는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죽을힘을 다해 살았다. 원체, 수학적 재능과 감각이 없어서 수학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 몇 년 동안 내 나름의 피나는 노력을 할 때에도 나는 그 노력이 분명 헛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갖고 싶었다. 그것은 오히려 내 노력을 비웃는 사람들이 나와 가까운 사람들, 가령 부모를 비롯한 가족들이나, 나의 친지들, 그리고 나의 친구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노력을 했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는 진리 아닌 것 같은 진리도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가고 배워갈 때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남들보다 두배, 세배 더 뛰는 것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나보다 다 똑똑했고, 공부를 잘했으며, 훌륭했다. 그 사람들 속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지금도 나는 남들보다 많은 시간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보고, 글을 쓰며 공부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해도 나는 내 노력에 합당한 결과를 보상받지 못한 적이 많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나라는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라고 생각하며 나 스스로를 내려놓고 인정하는 것에도 익숙해지는데 도움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에 나는 아직도 뚜렷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 우선, 최대한 정직하게 그리고 열심히, 묵묵히 살면 되지 않을까...라는 비효율적인 대답 밖에는 그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온 단 하나의 방법이기 때문에, 오로지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성적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떤 과목은 내 예상보다도 더 잘 나왔다. 교수님들께 마냥 감사했다. 내가 어찌했든 간에 교수님들께서 잘 봐주셔서 그런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A는 실습을 제외한 이론 과목에서 한 과목도 없었다. 그것은 미리 예상한 결과였기에 섭섭해도 안타깝지는 않았다. 올 한 해, 2학기를 잘 넘어가도록 해주세요.라는 것이 내 2학기에 대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에 비하면, 내 성적은 너무나도 감사할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두 과목의 성적이 남았다. 한 과목은 그토록 어려워했고, 힘들어했던 "조류질병학"이었다. 전염병학 교수님은 올 해를 마지막으로 학교를 떠나시는 교수님이셨다. 항상 인자하시고 학생들의 입장을 늘 먼저 생각하시기로 유명한 교수님이기에, 조금은 마음의 부담감이 덜했지만, "조류질병학"은 교수님께서 정하신 커트라인을 내가 넘지 못했기 때문에, F를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불안감은 2주 가까운 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교수님들을 향한 원성이 되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갑"과 "을"의 안타까운 사회적 문제에까지 넘나들었다. 깐깐하시 교수님에 대한 원망과 원성을 하다가도 "제발"과 "신"을 오고 가는 주술적 영역까지... 그렇게 2주의 시간이 지나고 "조류 질병학"
성적 발표날, 나는 감사해서 눈물을 흘렸다. 교수님은 다행스럽게도 "D+"라는 성적으로 나를 구제해주셨다.
예과 1, 2학년 당시, 기본 교과목 혹은 교양 과목을 쓸다시피 하면서 취득했던 "A+"보다 훨씬 소중했다. 이제, 마음 편히 본과 3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고 또 감사했다. 스마트 폰, 성적 확인을 보면서 스마트 폰 앞에다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내 모습이 그 감사함을 대변해주는 모습이었다.
2021년도 코로나로 인해서 어떻게 강의가 진행될지는 모르겠다. 본과 3학년이 되는 나는 이제 임상과목들과 만나게 된다. 내과, 외과, 피부과 등으로 이제는 수의학과도 많은 분과가 생겼다. 어떤 진료과를 선택하던지 하나같은 마음은 또 묵묵히 열심히 하겠다는 것뿐이다. 이제는 이론이 넘어선, 직접 아픈 아이들을 접했을 때 어떤 치료를 선택할 지에 대해서 배우는 진짜 "수의사"가 되기 위한 과정이다.
지난 2년, 휴학까지 3년 동안 기초 과목들을 배우고 시험을 치르면서 몇 번의 고 3 생활을 겪은 것 같았다. 그렇게 열심히 쓰고 외우고 나서 시험을 보고 나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은 성적이 나오면 기뻐하고 또다시 공부하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두 해 동안 마주한 교수님들께 솔직하게 투덜투덜, 험담 한 번 안 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나는 그만큼 모든 순간순간, 모든 시험 하나하나가 두렵고 무서웠다.
본과 3학년, 임상 강의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 하지만, 기초 과목이든 임상 과목이든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 단 하나는... 또다시 남들보다 열심히 하는 것, 오직 그것뿐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안다.
2021년 1월 5일
2학기에 복학했을 때, 이제 3학년으로 진급한 예전 동기들이 큰 도움을 준 친구들이 있었더랬습니다. 한 참 어리지만 같이 있을 때면 티격, 태격 거렸던 것도 같은데 그 녀석들이 제게 도움이 되라고 수업 자료를 한 아름 물려주었더랬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자료들 덕분에 마음이 조금이나마 더 든든했던 것 같아요.
이 자리를 빌어서, 그 친구들... 은아, 치영, 준영이에게도 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