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은 늘 우리 주위를 맴돌아...

갑작스레 마주할지도 모르는 이별에 대하여...

by 고대윤
펫로스 증후군(Pet Loss Syndrome)
반려동물이 사고, 노환으로 죽었을 때 느끼는 우울감이나 상실감을 의미
- 지식백과




지난 10여 년 간, 나를 가장 지켜주고 위로해 준 존재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나의 반려견이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만큼 나는 녀석을 사랑했고, 녀석이 내 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안정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가장 극도로 우울했던 시절, 그러니까 나 자신을 포기하고 싶어서 안달이 나있던 그 시절, 내 반려견 "유키"는 나의 곁으로 왔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만 10년 전의 일이다.


녀석을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미끄러운 바닥에 형제들과 함께 내려졌을 때, 이리저리 미끄러지면서 나를 향해 곧장 기어 왔다. 그리고 내 무릎을 기어이 타고 올라왔고, 나와의 눈 맞춤으로 우리 가족이 되었다. 녀석을 처음 만난 부산에서부터 다시 집까지 데려오는 내내,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한 편으로는 설레었는지 지금도 잊지 못한다. 녀석은 참 신기하게도 어미의 품을 떠나왔는데도 낑낑거리지도 않았고, 의외로 대범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가족들에게 주눅 들지 않고, 자기에게 주어진 공간(케이지)을 탈출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으로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은 단 며칠 만에 우리 집의 보물이자, 자랑이 되었다.




"수의학과" 학생이지만, 나는 "수의학"을 포기했었다. 그것은 학문의 어려움을 떠나서 내 안에 내재되어 있던 일말의 자격지심의 심지에 부모님께서 다시 불을 붙인 이유이기도 했다. 나는 방황을 했고, 쓰러졌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수의학과"를 떠났다. 나의 20대, 첫 대학이자, 마지막 대학이기를 바랐던 대학이었다.


방황을 마무리하고자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어떻게든 내 인생에 주어져 있는 듯 한, 그리고 마치 내 인생의 큰 가림막처럼 느껴지는 그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서 노력했지만, 연달아 실패를 했다. 더불어 한 해, 한 해 지나며 내 마음의 병은 더 깊어만 갔고, 집에 틀어박혀 집과 병원, 그리고 유키 녀석과의 마실만으로 세상을 떠다녔다.


유키.jpg 유키, 한 살 벚꽃 떨어지던 봄날


녀석은 나처럼 자유로운 영혼이 되고 싶었던가. 나를 따라서 이리저리 다니는 것을 너무 좋아했다. 집보다 밖에 있는 것을 좋아했고, 때로는 빠방이에서 내리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나를 놀리기도 했다. 모든 것이 다 행복이었다. 녀석을 품에 안고 있으면, 녀석의 체온이 가만히 내 가슴속으로 전해졌다. 녀석의 숨소리, 녀석의 심장박동, 그리고 잠들었을 때 중얼거리던 잠꼬대까지 녀석의 하나하나가 다 소중했다.


P1060264 (2).JPG 유키 네 살, 나의 차 뒷 좌석에 응가를 하고 나를 보며 웃는 녀석


이 녀석은 어느 날, 나에 대한 큰 저항을 했다. 내 차의 뒷좌석에 응가를 해버린 것이다. 물론 녀석이 많이 배가 아프고, 참기 힘들어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녀석도 참고 참고 있었겠지만, 큰 일을 저질러 버린 후 자신도 머쓱했는지 앞좌석으로 쓰윽 옮겨와서 나를 보고는 "헤헤"하며 웃으며 바라보았다. 나는 뒷좌석에 녀석이 저지른 큰 일을 치우며, 녀석을 조수석에서 번쩍 안아서 엉덩이를 때리며 "이게 뭐야?? 이게??"라며 혼을 냈지만 내 손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것을 녀석은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 모든 것이 다 시늉에 불과할 뿐, 녀석과 함께 하는 그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유키"가 처음으로 작은 수술을 하게 되었던 날, 나는 녀석의 모습을 보며 눈물이 났다. 마취로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아 있는 녀석을 보면서, '내가 제 때 졸업을 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라며 수없이 반복해서 되뇌었다. 하지만, 나는 "수의학과" 자퇴생 신분이었고, "유키"는 아팠으며, 누군가의 손에서 수술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녀석의 나이는 일곱 살, 이제 막 중년으로 넘어가는 나이였다.


하지만, 내가 다시 "수의학과"로 돌아가고 싶다고, 쉬이 받아주는 곳도 아니었다. 내가 아파서 포기를 했었건, 아니면 그 어떤 다른 이유가 있었건 간에, "재입학"이라는 관문은 쉬이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어느 정도 포기를 하고 있었고, 그래서 무엇인가 다시 준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포기를 하고 있었던 어느 겨울, "수의학과"는 나를 다시 품 안으로 받아주었다. 그리고, 예과 2학년을 마치고 본과에 진급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는 진급식과 명찰 수여식에서 나는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는 말만 수없이 되뇌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다시 시작된 나의 학교 생활의 유일한 단점은 녀석과 함께 지낼 수 있는 시간이 적어졌다는 것뿐이었다. 녀석은 내가 없을 때면, 나를 부르면서 하울링을 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우느라고 목청이 다 쉴 정도였다고 가족들은 말했다. 녀석이 나를 기다리다가 새벽녘에야 들어오는 나를 보면 반가워서 빙빙 돌며 꼬리를 흔들고, 입맞춤을 하는 것만으로 다시 내가 "수의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했다. 방학 동안에는 내내 녀석과 놀아주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하며 본과 1년을 마쳤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나름 열심히 했던 결과인지 어찌 되었든 나는 적은 액수에 불과하지만 장학금도 수여받았다. 하지만, 2학년 봄 어느 날, 동생에게 사고가 났다.




동생의 사고는 심각해서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했다. 부모님이 아닌, 내 손 윗사람이 아닌, 나보다 어린 존재의 아픔과 마주하는 감정은 복잡했다. 끝나지 않는 학기와 남아있는 시험들, 머릿속이 복잡했다. 때로는 동생의 병실과 보호자 휴게실의 불빛 아래에서 시험공부를 했고, 어렵사리 봄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했다.


동생은 1년을 훌쩍 넘은 지난가을에 좋지 않은 증상들이 더해졌다. 대전으로, 또 서울로, 이리저리 큰 병원으로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고 비록 비대면 강의라고는 하지만 나는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을 느끼며 매일을 보냈다. 어쩔 수 없이 "유키"가 이모님 댁에서 지내던 어느 가을날, 오랜만에 부모님께서 보고 싶다고 "유키"를 데리러 갔던 날, 녀석은 거친 호흡을 쏟아내다가 오줌을 싸며 옆으로 쓰러져버렸다. 소형견에게 종종 볼 수 있는 "심장비대증"이었다.


2차 병원으로 옮겨진 "유키"를 보러 가는 내내 눈물이 났다. 갑자기 세상에 나와 인연이 있는 모든 존재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 때문에 늘 뒷전에 밀려있었던 동생에게도 그리고 언제나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유키"에게도 모두에게 미안했다. 산소실 안에서 거친 숨을 내쉬며 갇혀 있는 녀석을 보는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어쩌면 "동생"의 사고에 대한 아픔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것과 내가 지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것의 차이, 바로 그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말하기 부끄럽지만 코로나로 인해 지난 늦가을 우리 집의 경제적 환경이 그리 좋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유키"가 쓰러진 그 날, 입원을 한다면 당장 그 날 결제해야 할 금액도 부족할 수 있는 그런 시기였다. 나는 염치를 무릅쓰고 내가 믿는 지인(비록 나보다 어리지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나의 울음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차분하게 그리고 너무나도 담담하게 "유키"가 퇴원을 할 때까지 정도의 돈을 융통해주었다. 나에게는 마치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이자, 기적이었다.




하지만, 입원을 했을 뿐,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유키"는 밥도 마다하고 계속해서 산소실에서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가서 안아주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치 삶을 포기한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면 녀석의 그릇이 보였다. '녀석의 밥그릇에 금이 가있는 줄도 몰랐구나.'라고 알아차리고, 차 안에 있는 종이컵을 보면 '녀석이 좋아하는 드라이브를 몇 번 더 시켜주고 시원한 물을 더 주지 못했구나.'라는 생각에 또 울컥했다. "녀석"에 관한 그 모든 것이 다 미안함과 안타까움 자체였다.


이별은 늘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다만,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 늘 가슴이 아팠다.

동생과도 뜻하지 않은 생이별을 할 뻔했고, "유키"와도 또 이른 이별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어떤 존재가 갖고 있는 실존의 무게를 느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별은 그렇게 아무 소리도 없이, 기척도 없이 아주 가까이 다가와서 사람들을 흔들어 놓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갑작스러운 이별을 해본 적이 있다. 한 때는 너무도 사랑했던 사람들이지만, 오히려 이별 앞에서는 나는 당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매 순간 최선을 다했기에, 나는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반려동물 포함)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은 시간이 갈수록 가슴을 더 무겁게 할 것만 같았다.




숨을 죽이던 열흘의 시간이 지나고, 다행히 "유키"는 내게 돌아왔다. 이제는 평생 "심장약"을 먹어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것조차도 감사한 일로 느껴질 정도로 숨죽이던 시간을 지나고 말이다. 녀석은 앞으로 흥분도 하지 말아야 하고, 과하게 운동도 하지 말아야 하며, 그 좋아하는 드라이브도 삼가여야만 한다고 말을 들었다. 녀석에게는 안타까운 처방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 뒤로도 나는 늘 이별은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유키"의 일 이 후로, 나는 어쩌다 만나는 어느 집의 반려견들 그리고 그 흔한 길냥이들과도 매일 눈인사를 한다. 어떤 날, 어느 순간, 어떤 녀석은 내게로 다가와 나의 다리에 머리를 부비기도 하고, 또 어느 날, 어떤 순간에는 또 다른 녀석이 나를 보며 반갑다고 빙빙 돌며 꼬리를 흔든다. 나는 그들의 머리를 그리고 등을 쓰다듬고 간식을 주며 그들과 교감을 하면서도 늘 생각을 한다.

안녕.jpg 녀석들은 나의 눈을 바라봐, 그들의 눈에는 그 어떤 적의도 찾을 수가 없어.


'이별은 우리 주위를 늘 맴돌아, 그래서 너희들과의 모든 순간이 소중해. 비록, 말은 통하지 않는 우리가 서로 다른 존재들이라도, 나는 너희들을 사랑하니까...'




냥들.jpg 익숙하지 않던 존재들에게도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아닐까...


갑작스러운 이별에는 그 누구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그 갑작스러운 이별이 끝끝내 상처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그리고 나와 그들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순간이기에, 나는 오늘도 나의 눈을 맞추는 "유키" 녀석의 눈에, 그리고 주유소에 사는 "루키"의 눈에, 그리고 차 밑에서 조용히 나를 응시하는 이름조차 없는 녀석들의 눈에 애정을 담고 시선을 맞춘다.



2021-02-02



내 소중한 지인의 덕분에 "유키"의 생명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나는 학생이라 그만큼 여유롭지도 못하고, 아시다시피 큰 동물병원은 진료비가 비싸지요.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종종 '나는 어떤 수의사가 될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돈이 모자라다고 해서 살아있는 생명이 먼 길을 떠나는 것을 과연 제가 바라볼 수 있을까요.

하지만, 경제적인 계산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떤 이에게는 정말 혈육보다도 더 소중했을 녀석들의 생명이 치료비가 없어서 사라지는 것을 바라봐야 한다면, 저는 아마도 또 바보 소리를 듣겠지만, 제 이윤은 뒤로 미뤄두겠죠. 저는 저의 부탁 전화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제게 큰돈을 융통해 준 저의 지인의 고마움을 잊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지인이 제게 그토록 주저 없이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 또한 앞으로도 똑같이 그렇게 살아갈 겁니다. 이별은 늘 우리 주위를 맴돌지만, 그 이별이 너무나도 의미 없는 헤어짐이 되지 않도록, 저는 또 그렇게 노력하며 살려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더불어, 제게 더없이 큰 호의를 베풀어 준 저의 지인들께도 이 글을 통해 깊은 감사의 마을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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