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티거입니다. 지금 충남대에서 앞으로 수의사가 될 형, 누나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봉사를 하고 있어요. 저의 집은 비글 구조 네트워크예요. 그리고 실습을 도와줄 때만 학교에 머문답니다."
"티거"는 실험견이 아니라 실습견이다. 다시 말해서 실험을 하기 위해 데려온 강아지가 아니라 수의대생들이 실습을 할 때, 교수님들이나 조교님들이 시범을 보여주실 때만 살짝살짝 도움을 주는 친구라는 뜻이다. 예전에는 "비글"을 학교에서 "실험견(??)"으로 사육을 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실험견들은 그렇게 학교의 옥상 위에 있는 작은 사육장과 실습실 혹은 실험실만 오고 가다가 생을 마감했다고 들었다. 그렇게 살던 비글 혹은 실험동물들의 넉을 달래주기 위해서 매년 4월 우리는 수혼제를 한다.(다만,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로 하지 못했지만...) 하지만, 이제 실험을 목적으로 하는 "비글"친구들을 학교에서 사육하지 않는다. "실습"의 도움이 아닌 "실험"을 목적으로 하는 대상들은 이제 더 이상 학교에는 없다.
어떤 약을 만들거나 개발할 때, 임상 시험 전에 전 임상 시험이라는 단계가 있다. 그 전 임상 시험 단계에서는 오직 수의사들만 실험에 참여할 수 있다. 보통 동물들에게 실험을 하는데,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그때서야 사람에게 시험을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시험을 하는 것을 임상 시험이라고 한다. 결국, 동물 친구들에게 실시되었던 실험의 목표도 사람이 신약이나 어떤 새로 개발되는 물질들로 인한 피해를 최대로 줄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사람을 위한 시험이었지만,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생명을 담보로 하는 시험이라는 것에는 거부할 수 없다. 다만, 지금까지 지구 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존재를 인간으로 봤을 때, 그 인간에 대한 최대한의 위험을 낮추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하면 나름 가장 합리적인 변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라는 것과 동물이라는 것 그리고 지구 위에서 어떤 생명이 더 가치 있느냐는 가치 판단의 기준을 인간 쪽에 두지 않고 바라본다면, 전 임상 실험에 다른 동물을 이용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에 불과하다. 동물들이 인간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는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다. 모든 생명은 다 똑같이 의미가 있고, 생명의 무게 또한 다르지 않다. 이 것은 내가 수의학을 전공해서가 아니라, 내가 살아온 세월과 경험의 바탕을 토대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동물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시험에 투여되었다.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결정하지 못한 채 태어나서, 또 그 삶의 기간 동안 괴로운 경험만을 한 채로 살다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최근에는 다른 종의 생명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생명 경시 풍조에 대한 우려의 시각이 높아진 덕분인지, 이제 더 이상 수의대 내에서 사육하는 "실험견"은 거의 없어졌다. 아니, 현재 우리 대학 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 때는, 사람의 안전을 담보로 한 실험에서, 또 다른 종의 생명 혹은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해서, 사회는 지금 변화를 하고 있는 셈이다. 철학자 헤겔의 "정반합"이론이 어느 정도 사회에 적응된다고 가정하면, 동물들에 대한 실험이나 실습들에 대한 사회 전반적인 시선과 제도가 분명히 개선되리라고 본다. 모든 것은 좌우를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는 것이기에.
"티거"는 지난 4월 내과 실습을 도와주기 위해서 학교에 왔다. 나는 지난 3월 말부터 코로나 유사 증상이 있는 관계로 (코로나 검사도 하고 "음성" 판정도 받았지만) 되도록 실습 참여를 자제하라는 권고로 실습에 많이 참여하지 못했지만, "티거"의 집을 청소해주고 밥을 챙겨준 적이 한 번 (우리는 그것을 "개당번" 줄여서 "개당"이라고 한다.) , 목욕을 시켜 준 적이 한 번이 있다. "티거"는 보통 반려견들과는 다른 면이 많았다. 아주 사소한 것들, 가령, 짧은 산책, 그리고 아주 적은 양의 사료에도 꼬리가 올라갔다.(기분이 좋다는 감정의 표현 이리라...)
실습이 있는 금요일이면 우리들은 "티거"를 목욕을 시켰다. "티거"의 위생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님에도 "티거"가 거주하고 있는 곳의 특성상, "티거"에게는 여러 가지 냄새가 배어있었다. 그래서 실습 전에는 목욕을 시켰는데 최대한 깨끗하고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구석구석 씻겨주었다. 따스한 물의 온도와 비누 거품의 감촉을 아는 것인지, 그리고 상쾌해진다는 것을 느끼는 것인지 녀석은 목욕을 하는 내내 웃고 있었다. 특히나, 나의 전매특허인 "두피 마사지"를 해줄 때면, 녀석의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타월과 드라이로 깨끗하게 물기까지 건조하고 난 후 보니, 꼬리가 한층 더 하늘로 올라가 있었다. 보통 반려견이라면 죽어라고 싫어할 수도 있는 목욕을 즐기는 녀석을 보면서 기분이 좋기도 하고, 또 조금 딱하기도 하고 애매한 감정은 늘 내 곁을 맴돌았다.
"티거"를 목욕시키준 날, 나는 "티거" 곁에서 더 오래 같이 있었다. 많이 쓰다듬어 주고, 많이 안아주고. 녀석들이 사랑스러운 이유는 사람에게 자신들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로 "티거"는 내게 연달아 꼬리를 흔들며 드러누웠고, 나 역시 녀석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 대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티거" 뿐만 아니라, 실습에 참여해서 우리를 도와준(예전 같으면 이런 표현을 쓰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른 친구들에게도 손길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가 다 순하기만 하고, 사람을 좋아하는 녀석들을 보고 있노라면, 사랑을 있는 껏 줘도 아깝지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거"를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동물", "개"애 대한 애정 이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수의학을 공부하니까, "개"를 좋아하니까 느낄 수 있는 감정들과는 또 다른 것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여느 집안의 보통의 반려견들은 "티거"에게 쏟는 애정의 두배, 세배를 쏟는다 해도 주인의 사랑을 다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티거"는 매번 오고 가는 사람들, 자신에게 사료를 주기 위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바뀌고 때로는 귀찮은 실습에 참여해야 함에도 사람들을 한없이 좋아했다.
더불어, 짧은 산책, 목욕 등 다른 반려견들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한 관리에도 한없이 고마워하고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며, 뜬금없이 "행복"의 기준에 대해서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는 늘 많은 것들을 바라고 더 좋은 상황에 놓이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다 채워져야만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 다른 욕심을 부른다. 그 욕심들은 또 다른 욕망을 만들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끝내 안타깝게도 "행복" 대신 "불행"으로 이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의 시작이 어떤 것이었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 순간 우리는 불행해지기 시작한다.
쉽게 타인이 갖고 있는 것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단 하나의 변화에도 감사할 수 있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삶일 수도 있다. 녀석의 몸집에 비해 턱없이 적은 양의 사료와 다른 반려견들은 쉬이 먹을 수 있는 간식도 녀석에게는 특별한 일이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렇게 특별하기 때문에 "티거"에게는 그 하나하나가 더 행복하게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많은 것들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가진 것이 적어지는 것 같아서 한없이 불안하기도 하고, 그 불안함으로 더 우울해지고, 화가 나고 슬퍼진다. 왜 내가 갖고 있던 것이 이렇게 사라지는 것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불만은 나를 더 조급하게 만들고 안달이 나게 만들었다. "티거"를 보며 조금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이렇게 해서 내게 있던 것이 다 사라지게 되면, 오히려 하나, 하나 새로이 만들어가는 것에 더 희열과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마음가짐도 생겼다. 하지만, 나는 "티거"처럼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철학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직은 "안분지족"의 삶을 살면서도 행복을 논하기에는 내 욕심과 욕망이 크기 때문이리라.
수의학 공부를 하면서 꽤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고, 느낀다. 그것은 어쩌면 학문과는 직접적인 관계없는 것들이다. 하지만, 학문보다 더 중요한 진리인 것들도 많다. 나는 동물들에게서 숨어있는 삶의 이치가 그들을 통해서 내게 전달이 되는 것을 느낀다. 다만, 느끼는 것을 조금 더 나아가 내 안에 체득화 시키면 좋으련만, 아직까지 그 정도의 깨달음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티거"의 심장박동수와 호흡수 그리고 림프절이 어디에 위치해있는가를 잘 평가하는 것은 "실습 평가"에 중요한 요소이다. 하지만, 녀석을 보면서 사람의 삶에 대입시켜 얻는 감정들은 어쩌면 단순한 "실습 평가"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는 세상에 대해 더 배우고 다가가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단지 아픈 동물을 얼마나 빨리빨리 수술을 하고, 약을 조제해서 아픈 현상만을 가라앉히는가만 배우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생명의 가장 궁극적인 목표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삶의 자세에 대해서 함께 느끼고 깨달아가는 것, 그리고 그 자세를 그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사람의 입장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생명에 관련된 학문을 배우는 가장 중요한 배움의 목적이 아닐까.
2020-06-27
커버 이미지 충남대학교 수의학과 17학번 배지희 선생님께서 찍어주신 "티거"의 사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