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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Feb 25. 2021

"왕따", 뼈 속까지 아픈 그 단어

어떤 사회에서 혼자가 된다는 것은...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세계 어느 나라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아마, 세계에서 1,2위를 다투지 않을까. 그도 그랬을 것이 대한민국에서 오랜 시간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던 집안 혹은 개인의 지위 및 토대를 가장 빠르게, 그리고 송두리째 바꿀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시험"을 통한, "시험"을 통과하고 합격하는 그것밖에 없다는 것을

대한민국 사람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라고 했던가. 원래부터 부를 축적했던 사람들이 아니거나 집안 대대로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 말 그대로 "보통 사람" 혹은 그 "보통"이라는 평범한 단어조차 붙이기 힘든 가정 형편을 지닌누군가들은 그들의 자녀가 혹은 그 스스로가 부디 "용"이 되기를 바라고 바랐다. 그렇게 시작된 대한민국의 교육열은 지나친 경쟁도 불러왔고, 또 이해할 수 없는 사회적 병폐도 가져왔다. 


나는 그 사회적 병폐에 해당되는 당사자이자 범법자이다. 다만, 그 당시 발각되지 않았으므로 현행범이 되지는 않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의 일들이 기억이 나면 종종 위축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 어린 시절, 그토록 힘겹게 살아야만 했었는지에 대한 회한도 남는다. 그래서, 그 과거의 일들이 어린 시절 내게 주었던 쓰디쓴 맛을 잊고 싶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그 일들이 원래의 목적대로 잘 이루어져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한 스푼 정도의 아쉬움도 남는다. 




1989년, 대전은 주변의 대덕군과 통합을 하며 "대전직할시"가 된다. "한밭"이라 불리던 그 크고도 넓은 땅은 기차가 지나간다는 이유만으로 개발이 시작되어 끝끝내 "시(市)"가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까지 "충청남도" 아래에 있었던 행정 단위와 완전히 분리되며 완벽히 다른 "대전"만의 행정구역을 형성하게 된다. 그럼과 동시에 "충청남도"와 "대전" 사이에 오고 갔던 다양하고 많은 것들이 분리되기 시작되었다. 가령, 공무원의 경우 그 전까지만 해도 "충청남도"와 "대전" 사이를 오고 갈 수 있었지만, 1989년 "대전직할시"가 된 이후에는 그 왕래가 힘들게 되었다. 아버지는 1989년 "대전직할시"가 되기 전, "대전"으로 발령을 받으셨다. 그 발령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가져오게 될지는 전혀 모르는 채로, 아버지가 더 큰 "도시"로 발령을 받으셨다는 것 그 자체 하나만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뿌듯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발령은 나에게는 본격적인 아픔의 시작이었다. 그 "발령"으로 인하여 나는 국민학교 6학년 2학기를 시작으로 마음고생을 단 한 번도 안 해 본 해(年)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상처를 받고, 가슴은 누더기가 되었다. 


1989년 "대전직할시"가 되고 나서, 아버지는 큰 그림을 그리셨던 것 같다. 시골의 부족한 교육 환경을 벗어나, 더 큰 곳에서 공부를 시켜서 더 좋은 대학교에 진학시키시겠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그림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집은 "대전직할시"에 있지 않았고, 당장 "대전직할시"에 집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았다. 그 당시, 대전의 "서구"는 한참 개발이 되어가는 중으로 직업군이 좋은 사람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어 있는 곳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사는 그 사람들의 자녀들과 내가 정면으로 마주하여 이기기를 바라셨다. 물론, 이 큰 그림이 전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뒤에 불러올 일들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들의 연속이었고, 나는 나 스스로 어떻게 해 볼 사이도 없이 끝없는 나락으로 추락하였다. 그리고, 그 추락의 끝은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찬란했던 시절인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가을부터 조짐이 시작되었으며,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중학교 1학년이 끝날 때쯤에는 내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1990년 가을 어느 날, 나는 내 고향에서의 마지막 운동회를 했다. 천식 및 앨러지가 심했던 나는 달리기를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굳이 달리기를 해서 1등을 했다. 왜 내가 아팠는데도 불구하고 달리기를 했었는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지는 않았지만, 이제 곧 그곳을 떠날 내가 남겨두고 싶었던 마지막 좋은 추억을 위해서였다. 그렇게 운동회를 하고 나는 두어 주를 앓았다. 병원에 입원을 하고, 폐렴으로 진행되기 일보 직전 다행스레 호전이 되었다. 그리고 퇴원을 한 며칠 뒤, 나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학교와 그리고 유년기의 추억과 이별을 했다. 비록, 좋은 기억보다는 아픈 기억이 더 많았던 곳이었음에도 나는 그곳을 떠나는 것이 마치 죽으러 가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것은 끝내 현실이 되었다.


나는 아니 나의 부모님은 그러니까 나를 "위장전입"을 시키셨다. 대전 서구의 모 아파트로 "위장전입"이 된 나는 대전에서 가장 성적이 좋은 중학교로 진학이 가능한 국민학교로 전학을 갈 수 있었다. 그곳은 나처럼 "위장전입"을 통해서 전학을 온 아이들이 많은 것인지, 아니면 한참 개발 붐이 일어나서 그곳으로 거주지를 옮겨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인지, 아래 학년의 수업은 오전과 오후로 나뉘어서 진행될 정도로 전교생이 많았다. 나는 그때까지 다니던 나의 시골 학교와 비교도 안 되는 학교의 모습에서 기가 눌렸버렸고, 전학되어 배치받은 반에 들어가서 첫인사를 하면서도 주눅이 들어버린 그 감정들은 풀리지 않았다.


전학을 가기 전 며칠 동안 예전 학교의 친구들에게 할 "작별 인사"와 새로 전학을 가게 된 새 학교의 급우들에게 하게 될 "첫인사"를 마치 연설문을 외우듯이 외우고 또 외워서 눈을 감아도 술술 나올 정도가 되어있었지만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기운에 눌려서 한 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그 어려움의 이유는 늘 내가 "대전"에 집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나는 국민학교 마지막 학기를 "대전"이 아닌 원래의 고향에서 다녀야만 했는데, 그 불편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국민학교 6학년의 아이가 등교를 하기 위해 대략 1시간 동안 차를 타고 "시, 도" 경계를 넘는 것은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힘든 일이었음은 분명했다. "위장전입"은 그 당시에 많은 문제가 될 수 있는 소지를 갖고 있었기에 누군가 모르는 사람이 우리 집을 물어보면 나는 한 번도 가본 적도 없고 어디인지도 모르는 대전의 모 주소를 말해야만 한다고 부모님께 철저하게 교육을 받았고, 그런 이야기를 한 번씩 들을 때마다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떳떳하지 못했다.


8시 반까지 등교를 마치기 위해서 나는 늘 7시 초반 남짓에 출발을 해야 했고, 지금은 4차선으로 넓게 뚫린 길이 아닌 구불구불한 2차선 국도를 꾸역꾸역 시간을 채워가며 바듯이 시간에 맞춰서 등교를 했다. 7시 초반에 등교를 하기 위해 새벽 6시 30분 전에는 일어나야 했기에, 나는 체력적으로도 힘이 들었고, 매일 아침 2차선 도로를 때로는 묘기를 하듯이 앞에 가는 차들을 추월하며 운전하는 아버지를 보며 심적으로도 힘이 들었다.

(그 당시, 사업을 하시던 둘째 외삼촌께서는 직접 타고 다니시던 승용차를 선뜻 우리 집에 주셨다. 둘째 외삼촌께서 그렇게까지 해주신 배려가 오히려 나에게는 독이 될 줄은 그 당시에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로 인해서 악몽이 시작되었다.)


새 담임 선생님은 호의적이시고 좋은 분이셨다.(나는 지금도 그분의 성함을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왜 전학을 오게 되었는지, 나의 비밀이 무엇인지도 알고 계셨지만, 그것에 대해서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으셨고

늘 나를 따스하게 감싸주셨다. 선생님의 호의가 단지 내가 고향에서도 한, 두 손가락 안에 드는 성적을 가진 학생이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냥 한 인간에 대한 호감과 힘들게 "등교"를 해야만 하는 비교적 어린 나에 대한 측은함때문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당시 선생님께서 계셔서 내가 버틸 수 있었던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전학 간 학교에서도 1등을 하기를 바라셨다. 내게 주어진 숙제 혹은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갖고 태어난 운명이 있다면 오직 "1등"이라는 단어밖에 없었을까. 부모님은 내게 늘 "1등", "1등"을 말씀하셨고, 내 머릿속에 그리고 내 가슴속에는 '"1등"을 못하면 어쩌나'라는 부담감이 얹혀 있었다.


하지만, "시험"을 보기 전, 나는 어떤 한 문제와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따돌림"문제였다. 몇몇 친구들과는 이야기를 하는 정도는 되었으나, 반 전체적으로는 나를 싫어하는 분위기가 역력하게 느껴졌고, 그것은 내게 심리적 위축을 가져왔다. 한 번은 체육시간이었던가. 선생님이 자리를 비운 잠깐의 사이에 일이 터졌다. 함께 모여있던 급우 중 한 명이 갑자기 일어나며 내 얼굴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그리고 내게 "어디 시골에서 온 새끼가 죽으려고... XXXXXXXXXXXX"라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주먹으로 다시 녀석을 치고 말고 할 정신조차 없이 나는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 친구가 한 말은 전부 사실이었으므로, 전부 다 옳은 말이었으므로 단 한 마디의 반박조차 할 힘도 없었다.


그 일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일은 또 벌어졌다. 아직도 뚜렷이 기억하고 있는 그 날의 일은 내게 이 전의 폭력사건보다 더 큰 상처를 남겼다. 이제는 토요일에는 등교를 하지 않지만, 나는 토요일에도 등교를 했었고, 4시간의 짧은 수업이 마무리되고 청소를 하는 시간이었다. 10월 말(아마도)의 햇살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따스한 햇살이 교실로 들어오던 날이었다. 걸상을 책상 위로 올리고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은 뒤,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리는 행동을 반복하던 내게, 같은 반의 한 여학생이 내게 다가와 몇 번을 접은 종이를 던져주었다. 좋지 않은 예감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펴보지 않고, 아이들이 다 귀가한 뒤, 조금 늦게 오시기로 한 아버지를 한가한 길 한쪽에서 기다리며 쪽지를 풀어 읽었다. 그 쪽지에는 너무나도 당연한 듯이 나에 대한 비난의 내용이 적혀있었다. 


"야, 우리는 네가 재수 없어!!! 네가 하는 모든 것이 재수가 없어, 네가 자가용을 타고 등교를 하는 것도 재수가 없고, 네가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을 받는 것도 재수가 없어. 그러니까 너 그냥 다시 전학 가!!!" 




아이들의 눈에는 모든 것이 좋지 않게 보였을 것이다. 나 또한 그것을 이해한다. 담임 선생님께서 특별히 신경을 써주시는 것도,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타고 등교를 해야만 하는 것도 다 좋게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 역시 내가 선택한 것은 없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자동차를 타고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오고 가며 아버지에게 내가 왜 "1등"을 해야만 하는지에 대해 매일 같이 듣는 것도 지겨웠고, 그 모든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괴로웠다. 그 모든 것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서 나는 살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일 때가 많았다.


그렇게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나는 그냥 그 학교, 그 교실에 있는 "시골에서 온 왕따"에 불과했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아마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전학을 간 지 시간이 흐르고 안정을 찾았으니 이제 너의 성적을 찾아오라는 아버지의 압박도 심해졌다. 나는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1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등교를 한 다음, 아이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버티고 다시 오후 6시가 넘어서 집으로 돌아와, 12에서 1시가 넘을 때까지 공부를 했다. 때로는 새벽 2시를 넘게 공부를 하고 나서야 나는 잠이 들 수 있었던 때도 있었다. 그 노력이, 아니 그 고통이 왜 필요했는지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도 늘 의문이다. 꼭 그렇게 했었어야만 했던 것인지, 그것만이 개천에 있던 물뱀이 "용"으로 승천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나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살아야만 했다. 다시 말해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정신적 고통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끊임없이 주입하는 "1등"에 대한 압박감에 의한 정신적 고통, 그 두 가지를 모두 끌어안고 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둘 중에서 오히려 벗어나기 더 편할 것 같은 후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몸이 힘들고 지쳐도 아무 소리 하지 않고 공부를 했다. 고향에 있을 때와 똑같이 같은 과목의 문제지를 몇 권씩 풀고 또 풀고 그리고 외우고 또 외웠다.


내 나름의 노력에서였던가, 하늘은 내게 다행히 조금의 짐을 덜어주었다. 나는 전학 간 학교에서, 공부가 잘한다는 아이들이 모인 그 학교에서, 그리고 그때까지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다는 같은 반 친구에게서 당당하게 "1등"을 빼앗아 왔다. 그 일은 나를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하던 아이들을 놀라게 했으며,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고, 그로 인해서 나는 후자의 압박에서나마 벗어날 수 있는, 숨통이 트이는 일이었다. 뛰어난 성적은 나를 다르게 보이게 만들었나 보다, 그때서야 아이들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나는 이미 마음에 상처를 입을 대로 입고, 가슴은 너덜너덜해져서 마음의 문이 조금씩 닫혀가는 상태였다. 그리고, 쐐기를 박듯이 기말고사에서까지 "1등"을 하고 졸업을 하게 되었다.




졸업을 하던 날, 나는 울고 말았다. 누구는 좋아하고 누구는 웃고 있었고, 누구는 또 행복했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부모님(어머니도 그 날은 시간을 내셨기에)이 모두 참석하신 그 날, 웃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성통곡을 하고야 말았다. 부모님은 좋은 날 왜 우냐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한 참이나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울고 있는 나를 보며 다가오신 담임 선생님께 "대윤이가 학교를 떠나는 것이 많이 서운한가 봐요."라고 말씀하시는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나의 통곡은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피할 수 없었던 지난 일들에 대해 켜켜이 쌓아 놓은 나만의 슬픔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도 말해도 이해할 수도 없고, 또 이해해하려고 하지도 않을 그 시간들을 나는 그 순간 터뜨리고 말았다.

"왕따"라는 것은 그 나이의 내가 참아내기에는 조금 벅찬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도 그런 일들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가 되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일들은 그리 흔하지 않았고, 그에 더해 굳이 잘 다니고 있던 학교와 고향을 떠나와 사서 고생을 하며 당했던 알 수 없는 무시와 차가운 시선 속에서, 나름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 쳐야만 했던 내 가슴앓이에 대한 토로였다.


"왕따"는 누군가의 가슴, 그 뼈 속까지 아프고 시리게 만드는 단어이자 무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을 뿐, 나의 앞 날은 그리 밝지 못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정점에 있었던(너무나도 이른 시기에 마주한) 그 뒤로의 몇 달을 제외하고 나는 계속해서 인생에서 쓴 맛을 계속 봐야만 했다. 아직, 조금은 더 달콤한 시간들과 마주하고 그 시간들로 주위를 채우며 세상의 밝은 면을 보며 자라야 할 시기, 나는 세상의 가장 어두운 면과 마주하고 경험했으며, 그 일들로 가슴 아파했다.


많은 시간이 지난 뒤, 그 시절을 떠올려도 아픔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네가 싫어!!!!"라고 쓰여 있던 그 쪽지에 대한 아픔도, 이유도 없이 맞았던 얼굴에 대한 아픔도 종종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하지만, 나는 한 편으로는 그들이 나를 바라보던 그 시선과 그 감정을 이해를 한다. 한 참, 민감할 나이, 어느 곳에서 온지도 모르는 굴러들어 온 돌이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함께 지키고 있던 그 땅에 박히려고 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싫었을지도 나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그렸던 "큰 그림"처럼 되지 못했다.  중학교에 진학한 뒤로도 한 참 동안이나 통학을 해야 했고, 그러면서 또 새로운 환경과 마주하고 부딪쳐야 했다.


나는 늘 그래서 타인의 시선과 부모님의 기대 그에 더해 나와의 싸움에서 버티기 위해서 늘 발버둥을 쳐야 했다.


2021-02-25


고교시절, 나는 소위 말하는 양아치가 되었다. 학교에도 잘 나가지 않는 양아치.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5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나는 너무나도 변해버렸다. 부모님은 나를 인간 취급조차 안 하실 때도 많았고, 때로는 집에 들어가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내가 스스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그러면서 점점 공부와는 거리가 먼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꿈"이라는 것, "희망"이라는 것은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사람이 무너지거나 쓰러지지 않도록 해주는 지지대가 되어주지만, "꿈"이라는 것 자체를 버려버린 나는 "버러지"(주위의 표현에 의하자면) 보다도 못한 인간에 불과했다. 지금도 그 성함이 또렷이 기억이 나는 나의 6학년 2학기 담임 선생님을 버스 안에서 마주친 적이 있다. 담임 선생님은 몇 해가 지났어도 그 모습 그대로이셨는데

나는 너무도 변해있었다. 고교 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옷차림과 또 고교생이라고 예측할 수 없는 여자 친구와 더해서 또 학생이라고는 전혀 짐작할 수조차 없는 내 친구들과 함께였다. 나는 선생님께 인사를 드릴 수가 없었다. 인사를 드리고 싶었지만, 변해버린 나 자신이 너무도 초라해서 선생님께서 버스에서 내리실 때까지 끝내 이 악물고 애써서 외면을 했다. 버스 안의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는 불량학생의 모습이 된 나 자신을 나 스스로가 슬펐던 시간들이었다. 지금도 뚜렷이 기억나는 그 날 그 이후, 나는 선생님을 다시는 뵙지 못했다. 어떤 것들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래서, 분명 잘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그것이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사진 ins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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