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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Jan 15. 2021

조용필은 되는데 현숙은
왜 안 되나요??

기억의 끝을 잡고


화려한 도시를 그리며 찾아왔네. 그곳은 춥고도 험한 곳. 여기저기 헤매다 초라한 문턱에서
뜨거운 눈물을 먹는다. 머나먼 길을 찾아 여기에, 꿈을 찾아 여기에 이 길을 왔는데...
- 조용필, 꿈(1991)


어머니께서 가수 패티김의 노래들 이외에 가장 좋아하는 노래, 조용필의 "꿈"이라는 노래의 일부분이다.  나 역시 이 노래를 너무나도 좋아했다. 그리고 지금도 좋아한다. 가사의 내용 때문이었던 가. 어느 날, 준비하던 입시에서 보기 좋게 낙방하고 나서 이 노래를 들으며 한 참을 울었던 기억도 있다. 사람에게 음악은 어떤 날에는 희열과 희망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또 어떤 날에는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음악을 사랑하지만, 좋아하는 음악을 바탕으로 그 사람의 삶의 배경이라든가, 의식 수준 혹은 그 이외의 모든 것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어느 날은 문득 헨델, 바흐, 베토벤 등 이름도 어려운 세계 음악 거장들의 음악이 내 귀에, 내 가슴에 전달되는 날이 있다가도, 어느 날은 우리나라 보통 가수들의 노래가 귀를 파고들고 가슴을 뒤흔들어 놓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단지, 클래식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가요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나누고 평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는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내 머릿속 끝, 기억의 한계 속 장면은...

어느 날 오후, 내가 낮잠에서 눈을 떴을 때 어머니가 나를 보며 웃으시면서 산타할아버지의 부츠 모양으로 생긴 과자 선물 세트를 내려주시던 모습이다. 그 당시, 어머니는 너무나도 젊으셨고, 나를 바라보고 미소 지으시던 모습은 눈 부시게 환해서 나는 아직도 그 모습이 내 삶의 가장 끝, 가장 머나먼 첫 기억으로 자리 잡아 있다. 


아버지는 교육 공무원이셨는데, 말 그대로 결혼을 하실 때 집에서 해 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서, 어머니가 고향의 시장에서 작은 보세 옷가게로 집안의 생계에 보태셨고, 아마도 내 기억의 끝에 있는 그 모습은 어머니께서 장사를 하시던 그 옷가게의 한 귀퉁이에 있던 작은 방이었던 것이라고만 짐작한다. 


그 기억의 끝은 너무도 아련하지만, 늘 잔잔하고 따스하게 가슴에 자리 잡고 있어서, 지금도 내가 어떤 일에 불같이 화가 나거나, 심지어는 부모님께도 섭섭한 일이 생기면 그 일을 떠올리며 참고는 한다. 아름답게 자리 잡은 기억, 그러니까 추억은 그만큼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뜻이기도 하다.




끊어지려고 하는 기억의 끈을 다시 잡아서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막내 이모님 앞에서 어느 추운 겨울날, 여느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내복 차림을 부끄러워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부모님은 내가 사람들 앞에서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라는 노래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셨고, 나는 멋도 모르고 그 노래를 사람들 앞에서 앵무새처럼 즐겨 부르고는 했다. 그 노래가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따위는 중요하지 알지도 못하고, 그냥 부모님이 좋아하시고, 사람들이 흥겨워하니까 노래를 부른 것뿐, 나는 늘 부끄러웠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시기, 우리 집은 내 고향의 어느 동네 단칸방에서 세를 들어서 부모님과 나, 그리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내 동생, 이렇게 살고 있던 때로 기억한다.


그 뒤로 몇 년이 지났던가...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버지의 형제들 중 그 누구도 할아버지를 봉양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 자기 살기들 바쁘다는 이유였지만, 그들 중에서 우리 집이 경제적으로 윤택한 것도 아니었고, 단지 아버지가 공무원이라는 이유 하나뿐이었다.

우리 아버지들 형제 중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은 유일하게 우리 아버지뿐이었고, 작은 아버지 그리고 막내 작은 아버지는 재수, 혹은 삼수 또는 사수, 오수를 한다고 대전, 서울에서 공부한다는 핑계로 고향을 떠나 있었다.

이 것은 어쩌면 불행 중 다행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그치들까지 우리와 함께 살았다면, 변변치도 않은 공무원 월급에 늘 살림에 쪼들려하던 어머니는 더 힘드셨을 것이 분명하니까. 나는 아직도 내 잠결에 경제적 부담감으로 힘들어하시던 어머니의 한 숨소리와 눈물을 기억한다. 그것은 아마도 내 평생 지워지지도 잊히지도 않을 기억으로 남을 것이 분명하다. 




이 당시부터, 아버지는 이상하셨다. 당신께서 공무원이시라는 것을 은연중에 타인에게 자랑하고 싶으셨던 것일까. 아니면, 경제적으로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타인에 대한 결핍을 떨쳐내시고 싶으셨던 것일까, 나의 행동에 대해서 늘 신경질적인 동시에 하나, 하나 지적을 하셨다.


어느 햇빛이 길게 늘어지던 날, 손님이 오시기로 했던 날인 것 같다. 너무나도 햇살이 좋게 그리고 길게도 늘어졌던 그 날, 나는 무심코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그 당시 TV에서 자주 나오던 효녀 가수 현숙의 "정말로"란 노래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슴이 찡하네요, 정말로... 가슴이..." 그냥 추임새처럼 나오던 그 구절은 계속해서 그 부분만을 반복했다. 어느 정도 이상 더 나아가지도 못하고, 어느 이상 앞에서 시작되지도 않는 앞과 뒤는 딱 막혀있는 그 노래를 나는 계속해서 반복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아버지께서 화를 내셨다. "그런 노래는 부르는 것이 아니다!!!!"


나는 우선 아버지께서 내게 갑자기 화를 내시는 것이 무서웠고, 그다음으로는 "그런 노래"라는 것이 어떤 노래를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추측할 수 있는 의미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현숙"의 노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흔히 말하는 "뽕짝" 혹은 조금 더 품격 있게 표현한다고 하면

"대중가요", 어느 쪽이 든 간에 중요한 것은 "나"라는 아이가 "그런 노래"를 부르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날 이 후로 내 입 안에서 종종 맴돌던 "가슴이 찡하네요..."라는 그 노래를,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현숙"이라는 가수를 잊고 지내게 되었다.

 



그 날 오후, 햇볕이 더 길게 시골의 마당을 차지했을 때, 손님이 오셨다. 아버지의 손님이 분명한데, 나는 그 날 왜 아버지의 옆에서 한자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나, 동생의 성함과 이름을 한자로 쓰고 있었을까.

나는 그 햇살 좋던 날 오후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 기묘함을 생각한다. 종종, 아버지에게 이 한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바보야?? 몇 번을 알려줘야 해!!!"라는 꾸지람을 들으며, 아버지 옆에서 그리고 손님의 맞은편에서 연필을 잡고 한문을 반복해서 쓰고 있던 장면을, 그 기묘하고도 가학적인 분위기와 어색함을 나는 기억한다.


손님은 그리고 무엇인가를 한 참이나 대화를 하시다가 가셨고, 나는 그 손님이 나를 위해서 당장이라도 가줄 것을 수없이 바랐었다. 하지만, 그 손님은 꽤나 한 참이나 머물다가 가셨고, 끝끝내 나는 그 날 나의 조부모님, 부모님, 그리고 내 이름과 내 동생의 한자어를 다 암기하게 되었다.


되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그 날을 한자어를 쓰며 외운 날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효녀 가수 "현숙"씨의 노래를 부르다가 혼이 난 날로 기억을 하게 되었다. "가슴이 찡하네요... 정말로..."라는 그토록 수없이 내 입 안에서 맴돌던 구절을 다시는 부르지 못하게 되었던 날로 말이다. 언젠가 시간이 흘러서 나는 문득 부모님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어차피 현숙이나 조용필이나 매한가지로 대중가수 아냐?? 근데 왜 내가 현숙 노래 부를 때 못 부르게 했어??"

"..."

"아니, 그러니까... 가슴이 찡하네요, 정말로...라는 그 말이 어디가 잘못되었냐고..."

"..."


나의 몇 번의 따져 물음에 부모님께서 마침내 꺼내신 대답은...

"응??? 언제???"였다.


그 뒤로 나는 그 당시에 대해서 다시 묻지 않았다. 그냥 그 당시 TV나 라디오에 흔하게 들려 나오던 그 대중가요가 부모님의 귀에는 가벼이 그리고 천박하게 들렸을지도 모를 테니까...

 



세월이 지나서, 우연이 인연을 맺게 된 사람이 있었다. 나보다 10여 년 위의 그 사람은 가요를 마치 "상 것"들의 음악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니, 모든 가요는 아니었다. 일부, 김광석이라던가... 과거 386들의 노래들은 제외하고.


그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클래식 음악, 교향곡 혹은 재즈 등을 진정한 음악이라고 했다. 그리고 대중가요를 듣는 사람들의 정서적 혹은 지식적 천박함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못해서 나는 어느 날

마음을 먹고 한 마디를 했다.


"그래서 일 년에 읽으시는 책이 몇 권이나 되신다고요??"


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식의 천박함 혹은 지식의 깊고, 얕음을 너무 간단한 것으로 평가하시는 것은 아니신지. 세상에서 어떤 사람을 그 사람이 듣는 음악만으로 평가하고, 그 사람이 갖고 있는 레코드 장비로만 평가하시는 것이야말로, 정말 가벼운 처사가 아니신가, 그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저는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만, 가요를 좋아하는 천박한 성향의 사람이라 더 이상, 선생님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나는 "현숙"이나 "조용필"이나 "베토벤"이나 어느 음악을 좋아하든지 간에 그것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절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나온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음악에는 절대적인 어떤 힘이 존재한다고는 믿지만, 그 위대한 음악가들에게 가려져서 그 시대를 반영하던 풍속 음악가들의 음악이 천박하거나 무시할만한 것은 절대 아니다는 뜻이다.


어느 날, 이제 나의 은사님(곧, 정년퇴직을 하실 교수님께서..)께서 강의 시간에 "나는 요즘 트로트가 참 좋아..."라며 말씀을 하셨다. 아무나 갈 수 없다는 프랑스의 "파스퇴르 연구소"에서도 연구를 하셨고, 평생 책을 보시며 공부를 하시고 늘 한 시대 지식의 끝에 서 계셨을 교수님의 그 솔직한 말씀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조용필"은 되는데, "현숙"은 왜 안 되지??...라는 질문은 늘 내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그것은 "조용필"은 안 되는데 "헨델"은 왜 돼??" 혹은 "가요는 안 되는데, 재즈는 된다고??"라는 식으로 바뀌어서 내게 다가올 뿐...


"보통 사람"이라서, "가요"를 혹은 흔히 말하는 "통속적"이고 "하층"의 문화에 빠져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혹시 아직도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만약, 아직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면, 왜 "음악"이 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음악의 본질이 무엇을 추구하는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공부를 조금 해보면 좋겠다는 권유를 하고 싶다.


세상에 "특별한 사람"이니까 더 고귀해, 고결해... 그래서 그곳이 아름다운 곳이야...라는 생각은 접어두시면 좋겠다. 어차피,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 똑같은 "보통 사람들"이다.


2021년 1월 15일


내가 가진 것을 억지로 꺼내 보이는 것으로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간다. 나도 모르게 내가 가진 것들이, 아름다운 것들이 자연스레 흘러나올 때, 나는 그 것이 가장 멋지고 힘있는 "아우라"라고 생각한다.


사진은 구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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