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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Jan 12. 2021

장래 희망은 보통사람입니다.

마흔네살 철부지 중년의 꿈

언제였던가 혹은 어느 곳에서였던가, 다시 말해서 그 글을 읽은 정확한 시기나 그 글을 접한 곳이 어디였는지는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 글은 내게는 꽤나 의미심장하고 깊어서 내 폐부 깊숙이 들어와 한 동안 그곳에서 떠나가지 않았다. 아니, 떠나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부좌를 틀고 그곳에 자리를 잡은 채로 머무르며 내 의식 곳곳을 고쳐놓기에 일렀다.


어느 초등학교에서의 일이다. 보통 내가 그러했듯이 아니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입학을 하고 나면, 장래 희망을 기재하고 그것을 발표하거나 제출하는 일은 늘 있는 일이다. 아마도, 초등학교에서는 그것을 반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면서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도 기억된다. 만약, 나의 어렴풋한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그 초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적게 했다. 그리고 반 친구들 앞에서 발표를 하도록 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요즘 한 참 인기가 있다는 "유튜버"나 혹은 "BTS"같은 한류 연예인들을 적어냈으리라, 최근의 흐름은 우리 시절과 달라서 웬만한 전문직 장래 희망은 오히려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것이 뻔하니까...


그런데, 한 아이가 참 놀라운 장래희망을 적어낸 것이다. 그 아이는 많은 반 친구들 앞에서 자신의 장래 희망을 뚜렷하고도 반듯한 목소리로 그리고 흔들림 없이 발표했다. 


"저의 장래 희망은 두 명의 아이를 가진 아빠가 되는 것입니다."


갑자기 반은 소란스러웠졌을 것이다. 이 곳, 저곳에서 웃음이 터지고 어떤 아이들은 비웃기도 했을 것이다. 심지어는 선생님조차 "장래희망"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며 아이에게 설명을 했을지도 모르리라.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장래희망을 발표하고 주변의 반응을 무시한 채 자신의 자리로 당당히 돌아갔다고 한다.   


이 글을 접했던 순간, 나는 꺼져있던 전구에 불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깜깜했던 머릿속이 환해졌다. 그리고 장래희망을 발표하고 자신의 자리로 당당히 돌아간 그 아이는 아마도 웬만한 어른들보다 훨씬 성숙하고 깊은 사고를 갖고 있는 철학자일 것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쯤 해서, 잠시 나에 대한 소개를 해야겠다. 

솔직한 내 소개가 앞으로(어쩌면, 비록 여기서 멈출 수도 있지만...) 쌓여가게 될 내 글에 대한 증거 혹은 바탕이 될 테니까 말이다. 이런 증거 혹은 바탕이 없으면, 어떤 사람들은 내 경험을 토대로 적어가게 될 이 글들을 그냥 마구잡이로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 역시, 이런 글을 보면 '이 따위 글이 다 있어??'라고 혀를 찰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어느 정도의 내 소개를 통해서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혹은 왜 지금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는지에 대한 뒷받침을 해보려 한다.


나는 1970년대 말에 태어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1978년 생이고, 말띠이다. 말띠들은 성격이 더럽다고도 하는데 나 역시 성격이 좋지는 않으니 그 말은 맞는 말인 것 같다. 충청남도 언저리의 작은 군소재지의 읍에서 공무원인 아버지와 자그마한 점포를 하시던 어머니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나서 그곳에서 초등학교(내가 다닐 때는 국민학교였다.)를 6학년 말까지 다니고, 13살의 끝무렵 그 옆의 도청 소재지 도시로 전학을 갔다. 큰 도시로의 전학 이후의 내 삶은 엉망이어서 다시 기억에서 꺼내기도 싫다. 아마도 나는 이미 이 시절부터 우울증 및 공황장애를 겪었을 것이 분명하지만, 그 당시에 신경정신과라고 하면, 흰 벽에 쇠창살로 된 병실에 갇힌 침을 질질 흘리는 사람들을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니, 전문적인 진료를 받아보지 못한 나로서는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현재의 나와 그때의 내가 크게 다를 바 없는 심리 상태를 갖고 있는 것을 보면 그때, 이미 내 심리 상태는 엉망이 되었지 않았을까, 싶다.


10대 중 절반을 날려버리고, 20대의 절반은 흘려보냈다. 20대 중반에 꼭 해야만 하는 수술을 내 인생의 한 페이지에 중요한 일로 적어 넣으면서 내 인생은 조금 달라졌다.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특별나게 반전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자세가 달라졌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20대 중반, 새로이 공부를 시작했다. 이렇게 허무하게 인생을 닫아버리기에는 지나온 내 인생이 너무나도 슬펐다. 그래서 20대 중반, 그것도 30대를 향해서 더 많이 꺾인 어느 시점부터 책상 앞에 붙어서 죽으라고 공부를 했다. 


나는 보통 사람이 아닌 무엇인가 의미 있는, 그래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누군가"가 되는 조건을 "정치"를 통해서 이루고 싶어 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자본"을 통해서 이루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높은 "학업"적 성과를 통한 "경제적 부"를 두 손에 쥐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이 수십 년간 나를 두들겨 새운 내 부모님이 원하는 맞춤형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꼴찌에서 중간이 되는 것을 단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마치고, 중간에서 위로 올라가는 시도를 했다. 마치, 에베레스트를 등반하는 산악인들이 도전했다가 날씨가 맞지 않거나, 여건이 맞지 않으면 다시 내려왔다가 도전하기를 수십 번을 반복하듯이, 나도 계속해서 반복해서 도전을 했다.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 바탕도 없었던 노 베이스의 30세에 가까운 장수생이 짧은 기간만에 이루기에는 너무나도 벅찬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최종 목표였던 의대는 아니지만, 수의대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욕심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그것이 어쩌면 화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일말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던 부모님의 태도와 말씀은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기에는 충분했다. 나는 다시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그 주변을 떠돌기 시작했다. "네가 원한다면...". "네가 갈 수만 있다면..."등의 수없이 많은 조건과 갈망이 섞인 말들에서 나는 또 빙빙 제자리만 맴돌았다.




내 나이 마흔이 되면 나는 부의 상징으로 불리는 "포, 람, 페(포르셰, 람보르기니, 페라리)"와 "펜트하우스"가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인생이란, 모두 다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내 손에 넣을 것들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지만,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수의대로 돌아왔을 때 나는 많은 것이 바뀐 사람이 되어있었다. 어느 날, 그토록 당신들이 조건에만 맞으면 무엇이든 다 해주실 것 같았던, 부모님의 재산은 이미 아버지의 실수로 많은 재산이 날아가버렸고, 남은 것도 없이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셨다. 그토록 원하는 "포, 람, 페" 대신 출고한 지 6년 된 현대 "그렌져"를 타고 다니고, "펜트 하우스" 대신 대전 근교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친구들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릴 때, 나는 아파서 정신을 놓고 헤매고 있었고, 다시 돌아온 학교에서는 내가 입학할 때보다 훨씬 더 똑똑하고 성적이 좋은 친구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발바둥을 쳐야 했다.




내가 세상에 대해서 조금씩 다른 시선을 갖게 된 것은 다니던 학교를 휴학을 하고 나서 죽도록 한 번씩 아픈 다음이었다. 그러면, 그 틈을 타서 오래된 카메라 하나를 들고 다니며 도시의 외곽, 부유하지는 않지만 사람 냄새가 날 듯 한 곳들을 몇 번씩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부유하지 않았고", "특별하지 않았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행복해 보였고(적어도 매일 밤 울고, 쓰러지고를 반복하는) 나와는 달라 보였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 혹은 "누군가"와는 너무나도 먼 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한 없이 편안해 보이는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운 무엇인가가 늘 그들의 곁에 존재했다. 그들을 닮아가면 나도 조금 편안해질 수 있을까?? 그들과의 삶 속에 섞여 살면 내가 지나오면서 겪고, 행한 일들과 실수들을 만회할 수 있을까?? 어느 날, 카메라를 들고 밖을 나갔다가 돌아온 밤이면 이불속에서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그러던 중, "나의 장래 희망은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라는 어린 철학자의 말을 접했다. 어떻게 저렇게 똑 부러지게 자신만의 소신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된 것일까. 나는 그 어린 철학자의 이야기에 가슴이 이 울컥해졌다. "나의 장래 희망은...", "나의 장래 희망은...", "나의 장래 희망은..."


혼자서, 불 꺼진 밤 수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다가 "나의 장래 희망은 보통 사람입니다."라고 기어들어가는 소리 흐느끼듯 말했다. 만약, 내가 삶의 곳곳에 숨겨진 이런 수없이 많은 진리들을 일찍 알았었더라면, 그 흔한 "정치가", "대통력", "의사", "과학자" 따위의 쓸데없는 말은 하지도 않았을 것을...

나는 그 어린 철학자로부터 배웠다.




나는 올 해로 마흔네 살이 되었다. 지방의 어느 국립대 수의대의 본과 3학년이 되었고, 아직 졸업까지 두 해가 남았다. 앞으로 남은 두 해가 어떻게 내 삶을 또 바꿀지는 미지수다. 나는 늘 알 수 없는 미지수의 세상에서 살아왔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적어 놓고 싶은 글들이 있다. 왜 내가 이렇게 바보처럼 세상을 돌아왔는지, 그리고 아파했는지, 그렇지만 "보통"이란 단어의 의미를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기록들이다.


이 이야기들은 나의 이야기이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세상 모두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아니어서 다행이야...'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신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의 장래 희망은 보통 사람이다."


2021년 1월 12일


물론, 나도 가끔 분에 넘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직도 학생이지만 내 명의의 비록, 6년이 된 자동차이지만, 준대형 자동차도 있고, 그래도 추울 때는 따스하게 잠을 청할 수 있는 지붕이 있는 집도 있으며

운이 좋았는지, 아니면 내가 하는 노력을 누군가가 알아줘서 그랬는지, 본과에 진급한 뒤로 단 한 번도 F학점을 받거나, 평균 이하의 성적으로 내려가지 않고, 상위권에 있었다는 것들은 다시 생각해도 감사한 일들이다.

하지만, 나는 매일 작은 일에서 영감(말하기 거창 하지만)을 받고 있으며, 그것들로 인해서 또 배우고 깨닫는다.

삶에 대한 배움은 어쩌면 학문에 대한 배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는 잊고 살았다. 그래서, 나 같은, 혹은 나보다 훨씬 더 훌륭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방향을 잘못 잡아 좁은 길로 들어설 수 있는 이들에게 나와 같은 꽤나 복잡하고 머리 아픈 일들은 일어나지 않도록, 어떤 것들이 더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인지 함께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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