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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Feb 27. 2021

저는 학교 폭력 피해자이자,
가해자입니다.

두 자매가 쏘아 올린 큰 공...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고작 국민학교 6학년생짜리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나는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중학교에 입학을 할 때까지도 나는 그 겨울, 대전에 있는 모 학원에 계속해서 오고 갔다. 폭설이 와도 갔고,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강추위에도 갔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배운 지 하나도 모르겠다. 선행학습이라는 단어 아래, 중학교의 범위를 넘나드는 학습을 했지만, 그곳에서 내게 남은 것은 분명코 하나도 없었다. 흔히, 요즘 많이들 쓰고 있는 돈지랄, 시간 지랄만 했을 뿐, 단연코 나는 그곳에서 배운 것은 없었다. 그곳에서도 오히려 그 잘나신 "대전직할시"가 고향이신 학원강사들께도 "촌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졸업 후 몇 개월을 보내고 다시 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보통 흔히들 말하는 "일진" 혹은 "짱(우리 때 단어)", "캡(역시 우리 때 단어)"등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복잡하지 않다. 그 과정을 살짝 언급을 하면, 국민학생 때는 치마바람이 센 어머니를 둔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발육이 빨랐을 때, 중학교 때는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기이기에 발육이 남다르게 빠른 아이들(생각해보라 이제 수염도 나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서 키가 180에 가까운 아이들을 이길 수 있겠는가.) 그리고 비로소 고교시절이 되면 그중에서도 주먹이 세고, 중학교 시절 싸움을 조금 경험 해 본 아이들 중에 가장 겁이 없는 학생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사실, 남학생들이 싸움이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멋지지 않다는 것은 싸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안다. 가령, 비트의 정우성이라든가, 아니면 다른 폭력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멋지게 주먹을 피하고 다시 치면서 싸우는 모션마저 아름다운 싸움은 그리 없다. 우선은 먼저 때리고(흔히 말하는 선빵), 맞은 아이가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그다음에 계속해서 때리면 그것으로 싸움은 먼저 때린 아이의 "승(勝)"으로 끝이 난다. 


중학교에 올라가서도 나는 사뭇 불안전한 위치에 있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왕따였고, 그래서 그 흔한 어떤 친구 무리 하나 만들지 못했다. 키는 중간에서 약간 앞 쪽에 있었다. 크지도 않고 그렇다고 세력도 없었으며, 학교에 자주 찾아와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는 부모님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었다. 그냥 공부하다 보면 혹시 또 국민학교 때처럼 그렇게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기대와 기약 없는 희망이라고나 할까... 그것만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중학교 1학년 1학기에 전국에서 일부 성적이 우수하다고 평가되는 학교들을 대상으로 치러진 모의고사에서 전국에서 2등을 했다. 그리고, 지능 테스트에서 다른 학생들보다 월등히 높은 스코어를 기록하면서 주변의 선생님들을 놀라게 했다. 내가 전국에서 2등을 했다는 것, 그리고 지능지수가 거의 정신병자 수준으로 높다는 것은 내 동생의 학교(내 국민학교 후배)에까지 소문이 났고, 심지어는 동생의 급우 어머니들이 동생에게 형이 어떻게 공부하냐고 물어봤다는 동생의 전설 같은 이야기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이 것은 좋지 않은 작용을 했다. 그러니까, 내가 모의고사를 치를 때까지만 해도 나는 여전히 지역을 넘나드는 통학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몰려다니는 친구들" 즉, "일진"의 전 단계 아이들의 눈에 타깃이 되었고 나는 언젠가는 손을 봐줘야만 하는 놈의 리스트에 올라갔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시험이 있었고, 그 시험에서는 내가 1등에서 밀려나고 같은 반 다른 친구가 1등에 올랐다. 마지막 1학기 기말고사에서는 나도 우리 반 친구도 전교 1등을 하지 못하고 다른 반 친구가 전교에서 1등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1등"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는 지금도 알지 못하겠다. 그 단어가 과연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솔직히 알지 못하겠대. 한 아이가 자신의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빠짐없이 해나가며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이 교육이라고 생각하는 현재의 나로서는 더더욱이 이해를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내게 있어서 "1등"은 다른 의미였다. 내게 있어서 "1등"은 부모님의 자녀로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하지 않는 아들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1등"을 하지 못할 때면, 부모님은 늘 내게 화를 내시고 창피하다는 말씀과 함께 집안의 분위기는 살얼음 판이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 스트레스, 그리고 불안감은 마치 내게 "1등"이 아니면 살아갈 가치가 없다는 듯 내비쳤고, 나는 다시 "1등"을 찾아오기 위해서 방학 내내 노력을 했다. 하지만, 내게는 학교 폭력이라는 검은 그림자가 2학기부터 드리우기 시작했고, 그것이 나를 한 순간에 망가지게 만들어버렸다.




한 학급에는 "꼴통"이라 불리는 학생들이 존재한다. 중학교 1학년 때 우리 반에도 "꼴통"이라 불리는 학생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그의 집은 대전에서도 알아주는, 그래서 선생님도 벌벌 떠는 부자였고, 그와 그 주변의 아이들은 비교적 선생님의 영향력 밖에 있을 수 있었다. 


날짜까지는 뚜렷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 어느 가을날이었던 것 같다. 바람이 차갑게 불기 시작했던 어느 날, 나는 빼앗긴 "1등"을 되찾기 위해서 쉬는 시간에도 참고서를 보고 있었다. "꼴통"과 "꼴통"의 추종자들은 신나게 놀다가 책을 보고 있는 내게 부딪치며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며 추종자들 중 한 명을 "ㅋㅋㅋㅋ 그만해~!!"라고 밀었을 뿐인데, 갑자기 뒤에서 "XXXXXXXXXXXX"라는 욕설 등과 함께 주먹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책을 보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피하고 어쩌고 할 틈이 없었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주먹을 고스란히 다 맞고 말았다. 그 아픔과 억울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름의 친분이 있다고 생각한 급우였는데, 갑자기 책을 보고 있는 나의 뒤에서 주먹을 휘두르는 어이없는 경험을 겪은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그 쉬는 시간이 끝나고 수업 시간 내내 나는 이를 갈았고, 그다음 쉬는 시간에 점심시간 아이들이 야구를 하려고 가져다 놓은 "알루미늄 야구 배트"를 들고 가서 뒤에서 그 친구의 허리를 향해 야구 배트를 날렸다. 사실, 원래는 "머리"를 향해서 날리고 싶었으나, 죽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참 순진했다.)은 허리를 때리는 것으로 대신했고, 아이들은 야구 배트를 들고 있던 나를 잡아서 말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 슬픈 것은 나를 말리며 했던 부반장이라는 친구의 한 마디였다. "나는 너 같은 놈이 제일 싫어."라는 그 말...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했길래,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하는 동시에 나는 또 맞았다. 그렇게 신나게 맞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부모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런 일이 왜 일어났느냐?? 혹은 누구 그랬느냐?? 는 말은 단 한 마디도 없이, 나는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한 참을 울었다. 적어도 그렇게 당신들의 명함이 되기를 원하는 아들이었다면 적어도 담임 선생님께 자초지종을 물어볼 수는 있었을 것을, 같은 공무원이신 아버지는 모든 것을 단단히 봉인해버렸다. 




그 뒤부터, 나는 달라졌다. 내가 그렇게 당했듯이, 나도 나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주먹을 날렸다. 아이들의 코피가 터졌다. 통쾌했다. 그렇게 나는 나보다 약한 아이들을 향해 내가 당했던 것처럼 학교 폭력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래서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때리는 것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내 온몸에서 퍼져나가는 아드레날린의 짜릿함에 빠져 나는 약하고 작은 아이들을 향해서 마구 주먹을 날렸다.


2학년에 올라가면서 나는 또 피해자가 되었다. 내 옆자리의 짝은 또 문제아였다. 그 녀석은 선생님의 치마 속을 훔쳐보고 수업시간 내내 포르노 비디오 이야기를 하는 문제아 중에 문제아였다. 오죽하면 그 녀석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 부모님께 부탁에 부탁을 드렸다. 더 이상 일이 커지기 전에 선생님께 중재를 해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돌아온 답은 너무나도 나의 기대와는 판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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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일을 뒤로, 나는 녀석과 친했던 무리에 의해 또 린치를 당했다. 이 번에는 그 당시 학교의 "짱"이던 친구까지 있는 무리였다. 정말 죽도록 맞았다. 내가 맞는 것을 보며 처음 문제를 일으켰던 녀석이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다는 말을 할 정도로 많이 맞았다. 그 뒤로도 내게 사건들은 연달아 터졌다. 몇 명의 문제아들과도 싸움이 이어졌다. 이길 때도 있었고, 질 때도 있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막무가내로 맞지도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나름 단단해졌다. 선배들에게도 싹수없는 후배로 낙인이 찍혀서 불려 갔다. 병을 깨서 얼굴에 그어버린다는 선배였던가,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벌어졌다. 아버지는 "네 행동이 잘못되어서 네 친구들이 그런 것 아니겠냐."라고 말씀을 하시며, 선을 그었다. 어느 곳에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억울하고 원통했지만, 이 것이 내가 겪어야만 하는 일이라면 처절하게 겪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공부를 조금씩 포기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갈 무렵, 나는 조금씩 양아치가 되어갔다. 그리고 내가 당하던 학교 폭력을 나보다 약한 아이들에게 가하는 가해자가 되기도 했다. 그것은 내가 당한 것에 대한 복수이자, 부모님에 대한 반항이자, 학교 폭력 및 학생들의 문제에 있어서 수수방관하는 교사들을 향한 비웃음이었다.




중학교 3학년, 나는 학교에서 어느 정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소위, 중간 포식자 정도가 되어있었다. 더불어, 타학교 일진 친구들과도 인연을 갖게 되어 한결 마음이 편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일들을 겪은 후 갖게 된 우정을 나는 진실된 우정이라고 착각했다. 어쩌면 차라리 이런 우정이 진실된 우정일 수도 있다. 공부를 하고 더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경쟁하며 서로의 험담을 하는 그런 사이보다 오히려 한 때 주먹을 주고받아도 다시 친해질 수 있는 친구들이 더 소중한 친구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발목에 칼을 차고 다니는 친구를 보면 마음이 든든했다. 어느 폭력 조직으로 스카우트가 될 것 같다고 말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내가 일류 대학교에 합격한 것처럼 기뻤다. 그것은 더 이상 내가 할 수 없는, 내 능력 밖의 이야기들이기에 더 흥분되고 더 멋지게 포장되어 나조차도 그런 길을 걷고 싶다는 환상을 만들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나는 또 다른 세계에 편입되어야 했다. 내가 다니던 중학교의 대부분 친구들이 배정받은 고교들이 아닌, 외떨어진 고교에 배정을 받게 되었다. 나를 제외한 한 친구만이 그곳에 배정이 되었다. 고교에서조차 나는 혼자 다시 시작해야 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은 늘 변함이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같은 학급의 고교 재수생과도 마찰이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도 이제는 "어떤 무리"가 있었기에 그리 겁이 나지 않았다. 내 친구들은 나를 위해 기꺼이 칼로 그 녀석을 찔러 줄 것이라는 헛된 희망도 갖고 있었다. 그렇게 이런 것도 아니고, 저런 것도 아닌 채로 나는 고교 시절을 보내기 시작했다. 무의미한 시간과 알 수 없는 앞 날 속에서 나는 부모님께는 부모님 인생의 "오점"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적당히 공부를 잘해서 어느 정도 대학교에 진학할 가능성이 충분한 학생에서 "자퇴 권고 생"으로 쉴 새 없이 굴러 떨어졌다.


나는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매일이 지옥이었고, 매일이 삶의 끝이기를 바랐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내 초등학교 시절 일부를 제외하고는 내게 그 어떤 날도 행복하고 편하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없었다. 성적이 나오면 아버지께 "XX" 혹은 "공부도 못하는 놈"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허탈하게 웃어야 했고, 학교에 가서는 또 다른 마찰이 생기지 않을까, 늘 초조하게 촉각을 곤두세워야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때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이자, 또 어떤 때는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학교 폭력의 가해자"가 되기도 하면서 마치 외줄을 타는 것 마냥, 학창 시절이 이어나갔다.




마침내 고교 2학년 말 내가 원하던 "자퇴 권고 생"이 되었을 때, 나는 너무도 기뻤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개미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차라리,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서 새롭게 내 인생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에 흥분이 되었다. 더 이상 성적으로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가족과 친지들에게 인간 대접도 못 받는 마당에 집은 나오면 그만이기에, 선생님께서 "자퇴"를 권고하셨을 때, 단 한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자퇴"를 선택했다.


하지만, 끝내 나는 자퇴를 하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교직 사회 대부분은 썩어 문 들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곁에는 참 스승이 계셨기 때문이다. 자퇴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내가 다시 아주 오래전처럼 모범생으로 돌아간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고 그런 삶, 그냥 마지못해 사는 삶으로 세상을 살아갔다. 


최근, 학교 폭력 이야기가 너무나도 많이 들린다. 나는 그 뉴스들을 보면서 지나온 시절을 떠올린다. 내가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을 때를 떠올리면, 폭력을 겪었을 그 당사자들이 '얼마나 무섭고 힘이 들었을까'라는 생각에 측은한 동질감이 들었다. 반면, 나 역시 어떤 친구들에게는 학표 폭력 가해자였기에 한참이나 지나온 뒤에도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끄럽고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나 역시, '내가 살기 위해서 했던 것뿐이야... 미안해.'

라는 말로 내가 했던 행동들을 다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학교 폭력"은 생각보다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어쩌면 누군가가 조금만 더 신경을 쓰면 일어나지 않을 일들 인지도 모른다. 나는 화장실의 한 구석에서 맞고 있을 때, 나를 때리는 친구보다 이런 일들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척, 모르는 척 애써 무시하고 덮고 있는 선생님에 분노가 치밀었고, 이렇게 내가 아픈 것에도 불구하고 오직 학교 성적만을 중요시했던 부모님에 대해서 인간적인 서운함이 앞섰다. 


많은 시간이 지났다. 그래서 다 잊힌 것 같지만, 잊히지 않는 것은 당한 사람들이 괴로움이다. 나도 때때로 혹시 나로 인해 괴로웠을 친구들을 생각한다. 그러면 학교 폭력의 희생양은 나로서 끝났어야 한다는 생각에 후회가 가득할 때가 많다. 나도 표현을 해야 했다. 나도 적어도 벽에 몰리면, 이를 내세운 채로 너희들을 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오만이었고, 착각이었다.


현재, 학교 폭력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일들이지만 그 일들이 가볍게 "죄송하다."혹은 

"반성한다."라는 말로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심 마음 제일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과 반성의 마음으로도 그 아픔을 당했던 당사자에게는 모자랄지도 모른다. 경제적 보상 같은 것은 중요하지 않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뒤부터 그 상처가 완전히 봉합이 되지 않으면 그때부터 곫기 시작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렇게 곪은 상처는 나같이 되어서 또 다른 곳에 상처를 낸다. "나는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고, 또한 가해자였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내가 마지막 "피해자"였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후회와 반성을 한다. 혹시라도 내게 단 한 번이라도 상처를 받은 누군가가 있다면 그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고 싶다. 


2021-02-27



언젠가 나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친구들을 우연히 사회에 나와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나를 몰라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기억에서처럼 나보다 크지도 않았고, 힘이 세 보이지도 않았다. 이제는 오히려 그들의 모습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로 초라하고 보잘것이 없었다. 그리고 내가 일부러 눈을 마주치려 쳐다보는 동안 내내 그들을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20년 아니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는 내가 당한 학교 폭력이 억울하기도 했지만,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또다시 나보다 약한 누군가에게 가했던 나의 폭력이 너무나도 미안하고 죄책감이 들었다. 나도 어느 정도의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애써서, 하기 싫어도 했던 그 일말의 행동 속에는 아무런 것도 의미도 있지 않다는 것을 그 당시의 나도 알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학교 폭력"에 대한 수없이 많은 제보가 나온다. 왜 우리는 수십 년이 흘렀음에도 똑같은 일들로 괴로워하는 것일까. 어쩌면 "학교 폭력"은 막을 수 있는 일임에도 , 누군가의 무관심 혹은 알고 있음에도 방치하는 것으로 인해서 더 복잡해진다는 것을 사람들은 정녕 모르는 것일까.


며칠 째, 같은 기사, 같은 내용의 방송은 내 마음을 심란하게 한다. 끝이 날 것 같지만, 끝나지 않는 일들은 늘 이렇게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반복이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내 눈은 또 살포시 흔들리기도 한다.


이미지: 서울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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