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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대윤 Mar 23. 2021

의사를 만들지 말고 의사가 되세요.

자녀가 스스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자녀들 보고 한의사가 되라고 하시지 마시고, 한의사가 좋으시면 직접 한의대를 가세요!!"
- 김미경 강사의 경연 중에서


독설 언니로 유명한 "김미경"강사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분을 싫어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편적으로 대중매체에 나와서 강연을 하는 분들의 내용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랄까. 강연자들은 두 가지 타입으로 나뉜다. 어떤 강연자는 희생이 없이 성공도 없음을 강요하면서 끊임없는 노력을 요구하는가 하면, 또 다른 강연자들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으로 성공한 사람들보다, 특수하고 확률이 낮지만 크게 성공한 자신의 케이스나 혹은 자신 이외의 누군가의 케이스를 예로 들면서, 자신의 강연을 듣는 사람에게 희망을 젖게 하거나 혹은 일관된 삶에 대한 노력보다는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일관한다. 어느 경우의 강연자라 하더라도, 그 강연을 듣는 당시의 청중은 강연에 매료될 가능성은 높다. 왜냐하면, 이미 그 강연에 참석해서 듣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강연의 청중은 자신이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선택을 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나는 둘 중에서 그 어떤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보통 전자의 경우에는 유명한 학자라거나 훌륭한 지위에 있는 사람의 경우가 많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는 연예인이라든가 혹은 유튜버 등이 해당되지 않을까. 전자든 후자든 모두 죽을 정도의 노력을 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속한 분야에 있어서 최고가 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SSUL(썰)"을 푸는 것을 보면 왜 저 사람이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밖에 없었는가, 일견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강의를 듣는다고 목표가 쉽게 달성이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강연을 듣고 나면 심하게 "현타"라는 것이 올 때가 많다. 그것이 전자의 강연을 듣고 난 뒤인지, 후자의 강연을 듣고 난 뒤인지

간에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현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길게 그 후유증이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후유증은 결국 강연을 듣기 전에 해야만 했던 혹은 하고 달성하고 싶었던 목표와 거리가 멀어진다는 것에 있다. 그것을 우리는 "실패"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늘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타인의 말을 듣고, 그 말을 한결 같이 믿으며, 자신의 목표를 상실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지양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만약, 강연자가 우리들의 부모님이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본 사람이 있을까?? 나는 꽤 오랜 시간을 나의 부모님들의 말씀을 철썩 같이 믿었다. 비록, 그 믿음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부모님들이 내게 너무 큰 기대를 하셨었고,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나를 보면서, "회의"가 들으셨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아니, 그렇게 믿지 않는다면 나는 내가 살아온 삶의 시간만큼, 그리고 아주 늦게나마 밝은 길로 들어설 때까지의 아픔을 지금보다 더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자녀에게 미치는 부모들의 말은 기독교의 성경이나 이슬람교의 코란만큼 절대적이며 진리적이다.




부모들은 바란다. 자신의 자식들이 자신들보다 더 좋은 직업을 갖기를, 그리고 자신들이 살아왔던 삶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하지만, 그 바람이 다 긍정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다. 그것을 부모들도 어느 정도 예상하고 또 그것을 이해하며 살아야 한다.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실망을 할수록, 자녀들은 부모들이 자녀에게 실망을 한 것보다 더 가슴 아파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들에게는 자신이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한다는 것의 좌절감과 자신이 부모님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해져 오히려 부모가 자식에게 느끼는 감정보다 훨씬 더 큰 소용돌이에 휘말리고는 한다. 그것을 부모들이 감싸주지 못하면 아이는 곧잘 다른 길로 쉬이 접어든다.


세상에는 "판사"나 "검사" 혹은 "의사" 등의 전문직이나 "공무원"이나 "공사"등, 배우자감 1,2위에 오르내리는 직업들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불안정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훨씬 매력적인 직업들도 수없이 많다. 꼭 공부 이외의 것에 재능이 있는 한 아이가 자신의 부모가 "의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억지로 끼워놓은 단추처럼 공부에 끼워진 채 세월을 낭비하는 것은 어쩌면 사회에 있어서도 큰 손해일 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청각이 타고나게 발달했다면, 음악적 재능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고, 색에 민감한 아이라면 미술이나 사진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할 수도 있는 것이며, 만약 손재주가 있는 아이라면 그 누구도 따로 올 수 없는 조각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모들은 그런 것들을 대체적으로 바라지 않는다. 그들은 대한민국이 가장 힘든 시기일 때부터 아직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 살아온 세대이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자녀가 불안정한 소득과 사회적 위치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부모가 자녀의 삶에 개입하는 큰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의대"에 진학을 한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령, "의대"나 현재 내가 재학 중인 "수의대"에 진학을 해도, 실습 과정에서 기절을 하거나 어려움을 많이 겪는 학생들이 있다. 그들이 어찌어찌하여 졸업장을 따고, 라이선스를 취득한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의 남은 인생 동안 행복하게 살 것이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자아실현"이라는 것도 결국 자녀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다. 자신이 아무리 성적이 좋고, 또 좋은 대학, 좋은 과에 진학을 할 수 있어도, 그것이 자신의 행복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삶이 된다. 나의 이야기를 조금 보태자면, 내가 처음 "수의예과"에 입학을 했을 때, "합격" 소식을 기쁘게 전한 나에게 "축하한다."늘 말 대신 "수의사는, 동물 병원은 창피해서..."라는 말씀을 내 앞에서 하셨다. 그 말은 한참이나 나이가 들어서 진학한 내 가슴에 어떤 응어리가 되어서 남았고, 나는 또 많은 시간을 방황을 하는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다.


부모들이 무심코 던지는 말이나, 자녀에게 바라는 것들은 자녀에게 크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특히나 아직까지도 그 지랄 같은 "유교" 사상이 남아있는 사회에서는 그 영향이 더 지대하다. 이런 예들은 간단하게 "신경정신과"에 상담을 받으러 오는 수많은 학생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위에서도 말했듯이, 나라는 인간도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수없이 오랜 시간 방황을 하고 괴로워했다.




나는 부모들이 입시학원이나 입시 관계자들이 하는 입시 교육 강연이나 아니면 뚜렷한 근거 없는 "카더라"식의 정보를 믿지 않으면 좋겠다. 입시 학원 관계자들이 말하는 "우리 아이의 교육법"이라든가 "우리 아이 좋은 대학 보내기" 식의 강연은 그들에 의해 철저하게 계획된 하나의 미끼에 불과하다. 


그런 곳에 가서 쌍방향이 아닌 입시 관계자에 의한 일방적인 주입만 당하고 올 바에야, 자녀들과 시간을 갖고 자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함께 대화하고 의논하는 것이 좋다. 비록, 현재는 자녀가 원하는 진로가 불안하더라도 그 진로가 앞으로 계속 불안하리라는 법은 절대 없다. 세상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이미 너무 오래전 표현이 되었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진작 원하는 진로를 선택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 나는 내가 살 길은 공부밖에 없다고 나 스스로 깨달았을 때, 의자에 내 다리를 묶고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부모는 자녀를 낳는다. 하지만 "자녀를 낳는다."는 개념을 "자녀는 내 것이다." 혹은 "자녀의 삶은 내 계획대로 움직여야 한다."라는 생각은 그릇된 것이다. 자녀의 삶은 자녀의 것이다. 그들은 어느새, 자신이 하고 싶은 일, 그리고 살고 싶은 삶을 스스로 상상하고 결정하며 그것을 위해서 노력하고 싶어 한다. 만약, 그것이 정말 험난 한 길이고 어려움에 부딪혀 쓰러진다 하여도, 그것은 다 자녀의 몫이다. 그렇게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 다시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자녀는 그러면 다시 용기를 얻고, 자신의 삶에 대한 방향을 조절하여 그때는 정말 부모도 원했던 진로로 그 방향을 변경할 수도 있는 것이다. 자녀를 자신들의 소유물 혹은 자신들의 계획에 의해서 움직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녀들은 한 없이 힘들도 아픈 시간을 살아야 한다.


"한의대에 자식을 보내서 한의사를 만들고 싶다."면 한 번쯤 곰곰이 생각을 해봐야 한다. 과연, 자녀가 "한의사"가 되고 싶은 것인지 혹은 부모, 그 자신이 될 수 없었던 "한의사"가 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만약, 자녀가 "한의사"가 되고 싶지 않은데, 자꾸 강요를 한다면 그것도 결국 가정 폭력에 불과하다. 만약, 자신이 "한의사"가 되지 못해서 안타까웠고, 되고 싶었다면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서 다시 도전하면 된다. 현대는 이제 100세 시대이다. 40이 넘었다고 해서 "한의대"에 진학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직접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녀들도 더 감동을 받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러면 '생활은 어떻게 하느냐', 혹은 '가정은 누가 책임지느냐.'라는 어리석은 질문 따위는 하지 말자. 어떤 도전이든 희생이 따르지 않는 도전은 없다. 그런 핑계로 자신의 욕심을 자녀에게 덮어 씌우는 것이야 말로 자녀의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어리섞은 일이다. 그 아이가 당신의 아이라 할 지라도 당신 아이의 인생은 절대 당신의 것이 아니다. 아이는 당신이 원하고 희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높은 포부를 갖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당신 자녀의 생각과 의견을 존중해주길, 그것이 당신이 부모로서 자녀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희생이다.


자녀의 인생은 오롯이 그들의 것이다.


2021-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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