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대윤 Mar 30. 2021

아프면 청춘이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아프다.

아무리 흔들려도 어른이 되지 않는 이들에게...

"어른"을 "어른"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일까?? 조금 더 나아가 "어른"과 "성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따금씩 이 두 단어의 차이를 생각하며, 나는 어디에 해당되는 사람인지 생각하고는 한다. 그리고 그 언젠가 오래전, 그 기준을 정해놓았을 누군가들은 과연 진정한 "어른"이며 "성인"이었을까를 의문한다. 더불어 현재 "어른"이자 "성인"으로 불리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자격을 충분히 갖춘 사람들인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졌다. 그 모든 것의 출발점은 내게서부터 시작했고, 나를 통해 출발한 끝에서 도출한 답이 정확하고 하나의 수학 문제의 해답처럼 결론이 나기를 바랐다. 


어떤 사전, 그러니까 "국어사전"이라든가, "영한사전", 혹은 "위키피디아"같은 "백과사전"을 찾아보는 것은 지식의 바탕을 이루는데 상당히 중요한 가장 기본적이지만 필수적인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중학교나 혹은 상급학교로 진학할 때, 새로 배우는 언어에 대한 "사전"을 선물로 받고는 했다.(하지만, 이딴 선물은 의미도 없고 기분도 좋지 않다.) 지식에 대한 바탕, 언어에 대한 기본 소양을 많이 찾아보고 그것에 익숙해지는 것

그것이 바로 첫걸음이기에.




자, 그럼 우리 "어른" 혹은 "성인"에 대해서 "국어사전"에서 한 번 그 정의를 찾아보자. 


어른        

1  다 자란 사람. 또는 다 자라서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                                  

2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                                    

3  결혼을 한 사람.                                    


성인           

1  자라서 어른이 된 사람. 보통 만 19세 이상의 남녀를 이른다.                                    

2  관례(冠禮)를 행하던 일.                                    


두 단어의 의미는 애매모호하게 걸쳐있는 것이 있다. "어른"이면 "성인"이기도 하지만, "성인"이라고 해서 "어른"이라고 할 수도 없다. 가령, 만 19세를 넘은 나 같은 나이만 먹은 사람 같은 경우, "성인"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자기 일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능력도 없고, 결혼을 하지도 않았으니 "어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다. 그래서, 작가 김난도 선생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고 했나 보다.





이 곳, 브런치에서 "나"에 대한 글들을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내 인생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나이가 마흔넷에다가 아직도 대학생 신분인 내가 "네, 제 인생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허허허..."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도 "어른"이 되고도 남았을 나이에도 불구하고 "어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른"이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제공한 것 역시 나보다 나이나 지위나 항렬이 높은 윗사람이었던 "어른들"때문이었다. 그분들로 인하여 나는 보통의 삶들과는 차별되고 특징적인 "삶"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내가 나보다 "어른"이라고 불렸던 이들에게 감사를 드릴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것 때문 일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조금 유심히 관찰을 해 본 분들 아니 단지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인생의 유년기, 초반에 꽤 평탄했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삶을 가볍게 흔드는 바람에 의해서 흔들리기 시작한 뒤, 그 흔들림의 근원이 된 곳을 제대로 찾아서 단단히 고정하지 않으면 다시 또 불어오는 비슷한 바람에 의해서 또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비슷한 바람들 뿐만 아니라, 다른 바람들에 의해서도 끊임없이 흔들리고 끝내는 삶의 뿌리마저 뽑힐 정도로 부서지고 망가지는 파국에 이른다. 어찌 보면 "천 번"이라는 숫자는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다. 매일, 매 순간 흔들리고 뿌리까지 아픈 사람들은 어느 곳에나 수없이 많이 있는 것이 내 눈에는 자주 보인다.


20대 초반, 나는 "성인"이 되었지만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큼 무서운 것은 없었다. "내가 있고 싶은 곳"과 "내가 있어야만 하는 곳", 언어로 따지면, 단 몇 자의 차이는 세상에서 엄청나게 크게 작용했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었다. 나처럼 이렇게 힘든 사람들은 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나만 이렇게 힘든 것일까에 대한 나름의 고뇌는 자기 계발서를 비롯해서, 수필집 등등을 가리지 않고 수없이 많은 책에 손을 가게 만들었다. 돈이 없을 시절이니 책을 다 사서 보지 못하면, 도서대여점에 가서 가리지 않고 대여해서 읽었다. 그리고 그 책들의 문구 중에서 내게 도움이 될만한 글들은 내 노트에 적어서 수없이 다시 보며 나를 위로했다.




아무것도 될 수도, 이룰 수도 없었던 그 시절, 나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는 그 말을 가슴에 얹고 살았다. 내가 아직도 무엇인가 될 수도 없고, 이룰 수도 없었던 이유는 아직도 "천 번"이라는 수만큼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위로했다. 비록, 나 자신이 "천 번"이라는 숫자보다 훨씬 더 많이 흔들렸고, 아파했다는 것을 나 스스로는 알았지만, 그렇게 위로하면서 나는 버텨내야만 했다.


하지만, 수없이 오랜 시간이 지난 현재, 다시 수천번을 더 흔들렸음에도 불구하고 국어사전의 "어른"에 해당되는 조건을 나는 갖추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내가 하는 일에 책임을 질 수 없으며(이 것이 얼마나 어렵고 무거운 것인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누구보다 특히 지위가 높지도 않고, 또 결혼도 하지 않았다. 만약, "어른"이라는 조건에 계속해서 "결혼"이라는 단어가 앞으로도 제외되지 않고 존재한다면,

나는 그때도 "어른"이 될 수도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내가 그토록 가슴에 얹고 살던 이 책을 쓰신 분에 대해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분을 분명 훌륭한 삶을 살아오신 분이 분명할 것이다. 그러하기에 수없이 흔들리고 나서도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셔서 훌륭한 "어른"이 되셨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미리 예상하고 있거나 감안해야 할 것도 있다. "글"이나 "인터뷰"의 뒤에 숨겨져 있는 "그"들의 본모습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분"이 훌륭하신 분이시라는 것에 대해서는 반박하고 싶지 않다. 대한민국 최고의 법대를 졸업하셨고, 역시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에서 교수로 계시는 그분처럼 훌륭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랴. 하지만,

왠지 모를 배신감도 들었다. 그분은 언더그라운드의 나 같은 사람보다 더 좋은 조건의 토양에서 잘 배양된 분이셨기에 그분에 대해 갖고 있었던 어느 정도의 믿음도 사라져 버렸다.




현재의 나를 비롯한 대다수의 우리는 평생 "어른"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어른"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기에 인내하고 희생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졸업을 해서 나만의 직업을 가진다 한들, 아파트 한 채를 가질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병원을 개원하면, 병원을 개원하기 위해 은행에서 대출한 대출금만 갚아나가기에 급급할 수도 있다. 집 한 채 없는 중년의 남자와 결혼하는 순진 무구한 여성들도 이 세상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아니, 결혼을 할 수 있다 하여도 나는 오히려 마다할는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내 어깨 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무게를 더 얹고 살아갈 자신도, 의향도 없다.


아마,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아파트 한 채를 갖는 것도, 혹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아닌", "생계"를 위해서 "일자리"를 찾는 것도 힘들어졌다. 매 년, 경제는 더 안 좋아질지도 모른다. "대학"을 가야 한다는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가 정해놓은 규정 때문에 "대학"의 존재 의미도 모른 채, 입학을 하고 4년을 보내고 나면, 취업이 코 앞이지만, 이제는 채용하는 회사도 그리 많지 않다.

이때까지, 좋은 토양에서 자랐던 온실 속 화초들이라 할 지라도, 이때부터 천 번을 흔들리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는다. 매 순간, 스치는 바람이 불어오고 그 바람으로 인해서 끊임없이 흔들린다. 하지만, "천 번"을 흔들렸다 한들, 원한 것을 손에 쥐지는 못한다. 그것이 이제 이 시대의 현실이다.


하지만, 이들만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 안타까운 이들은 "어른"이 될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무리해서 "어른"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른"을 너무 가벼이 봤고, "어른"에 대한 환상으로 준비 없이 그 문에 들어섰지만, 수없이 많은 난관에 부딪치고 있는 이들이다. 이미 어른이 된 그들에게도 "바람"은 불어온다. 결국,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의 몸을 휘몰아치는 "바람" 앞에 모든 것 내맡겨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존재 혹은 매개체들은 수없이 잘못된 것들이 많다. 이미 한 참이나 지나버린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주입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공부도 하면서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도 했었지."라고 말하는 586세대의 말을 듣고 있노라면, 때로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들의 시대와 우리의 시대는 엄연히 다르다. 적어도 그들은 취직 걱정은 하지 않았고,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면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현재의 우리는 당장 학교에서 내몰리면 먹고 살 걱정에 눈 앞이 막막하다. 부모님이 조금 부유하다고 해도, 그것은 부모님 세대까지의 것에 불과하다. 코로나로 인해 경기는 완전히 바닥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서 경제가 휘청이는 가정도 허다하며, 그로 인해 가족 모두가 자살을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 예로, "학생운동"을 하던 동아리의 가입하는 대학생들은 이제 거의 없다. 내가 먹고살기 힘든데, 어떤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인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앞을 정확하게 볼 수밖에 없게 되었음에도, 현실과는 전혀 다른 말들은 세상을 둥둥 떠다닌다.


"내 삶이 힘든가, 네 삶이 힘든가."에 대한 것은 자신의 깜냥에 달려있다. 어떤 일이든 자기의 일이 제일 크고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자신들의 세대에서 힘들었던 것들을 마치 현재에도 힘든 것인 양 주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일이 아닐까. 세상은 너무나도 변했다. 그리고 그 변화하는 세상에 발맞추지 못하는 그 누군가들의 책을 보며 감동을 받는 나 같은 사람도 변하고 있다. 감성적인 말로 뒤덮인 책 안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천 번을 흔들려도 어른이 되지 못한다." , 만약 천 번만 흔들리고 이 사회를 구성하는 번듯한 "어른"이 된다면 나는 지금부터라도 다시 "천 번"을 흔들릴 용의가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도 아프다. 굳이, "이 정도는 참아내야지."라는 말을 들으며 버텨내기에는 힘든 삶을 살고 있다. 글을 쓰시고, 그리고 강의를 하시는 훌륭한 "분"들의 말씀에 대놓고 반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현재를 버텨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을 말하고 싶은 것뿐이다. 우리는 이미 수없이 많이 흔들렸다. 그리고 아파했다. 흔들려야 "어른"이 될 수 있고, 아파해야만 "청춘"이라면, 나는 그런 삶은 다시 태어난대도 거절하고 싶다.


현재를 만든 것은 기성세대다. 나 역시 이제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가 이렇게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고칠 생각도, 그리고 그것을 바꿔볼 의도도 갖지 못했던 것이 부끄럽다. 하지만, 나는 "어른"이 될 수 없었다. 앞으로도 나와 같이 "어른"이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아서 안타깝다. 만약, 지금 끊임없이 "흔들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부디 훌륭한 "어른"이 되었으면 좋겠다. 말뿐인 "어른" 그리고 허울 좋은 "어른"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 참된 삶을 영위하고, 그 삶에 기뻐할 수 있는 멋진 "어른"말이다. 천 번을 흔들릴 필요도 없다. 그리고 아파할 필요도 없다. 꼭 그렇게 해서 "어른"이 되어야만 한다면 굳이 당신이 "어른"이 되지 않아도 된다. 나는 희망한다. 아파하지 않고 다치지 않은, 상처 없는 청춘들이 수없이 많이 흔들리지 않고도 아름다운 "어른"이 되는 세상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어른"들이 사는 세상이다.


2021-03-30


커버이미지 구글, 브런치


제 글의 바탕이 된 "김난도" 교수가 성매매 혐의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사람들은 왜 자신들을 포장하려 바쁠까요. 자신이 그만큼 아프면서 성장했다면, 아마도 그런 일을 쉬이 저지르지는 않을겁니다. 세상의 어려움에 맞서 그 순간마다 다시 일어나서 버티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은 단지, 그들의 한낱 책팔이 소재거리 밖에 되지 않는걸까요. 비록, "어른"이 되지 여러분들이라도 그 어떤 못난 세상의 "어른"들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라는 것을 있지 않았으먼 좋겠습니다. 아직도 수없이 아픈 "청춘"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의사를 만들지 말고 의사가 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