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던 내 젊은 날의 초상
"∫f(x)dx=...."....
하얀 종이의 연습장, 제일 첫 장에 깨끗한 글씨로 수식을 쓰는 행복감은 그 당시의 나를 버텨내는 힘이었다.
몇 십장의 연습지를 반으로 접어 한 쪽면에서부터 수학 문제를 풀다 보면, 어느새 등에 꼿꼿하게 땀이 배어났다. 나는 정말 그 시간을 사랑했다.
특이하게도 공부를 열심히 하려면, 필기감이 좋아야 했다. 표면이 매끈한 종이 위에 부드러우면서도 딱딱 끊어지는 펜으로 정리를 하다 보면 몇 시간씩 시간이 가는 것은 예사였다. 참으로 특이하기도 했지. 나는 그토록 필기감이라는 요소에는 남다르게 신경을 썼다.
옷을 당시에 유행을 타던 옷을 입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아서, 옷에 대한 욕심도 없었고, 옷에 대한 욕심이 없으니 다른 그 어떤 욕심도 시나브로 사라져 갔다. 내 책상 위에는 내가 가고 싶은 대학교의 사진만을 복사해서
붙여놓고 오직 그 사진만을 보면서 나를 다잡고는 했다.
하지만, 필기감에 대한 것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참 이상하지?? 그런 습관을 갖고 있던 나는 몇 달씩 모아놓은 동전으로 샤프를 사서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을 즐겼다.
연필이란 꽤 사랑스러운 필기도구다. 요즘에는 샤프펜슬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탓에 학용품 업계에서 연필이 차지하는 지위가 다소 저하된 것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필에는 사람의- 적어도 나의 -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다.
- 무라카미 하루키,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중에서
나도 처음에는 샤프펜슬을 더 선호했던 것 같다. 좋은 샤프펜슬에 "2B" 샤프심을 넣고 수학 공식 하나하나를 그리듯이 채워 넣으면 그리 행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샤프펜슬에서 볼펜으로 취향이 바뀌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그 당시 내가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찾아뵙고 지도를 받던 수학선배님께서는 늘 문제를 푸실 때마다 볼펜을 사용하셨는데 그 모습이 단지 멋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날은 펜 끝이 뭉툭한 펜을 쓰시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모나미 153 볼펜을, 또 어떤 날은 BIC 볼펜을 쓰시기도 했다. 그리고 수학 문제를 자유자재로 풀어내셨는데, 그것이 너무 멋있어서 나는 그 모습을 따라 하고자 했다.
내 첫 볼펜은 대한민국의 국민 볼펜 "모나미 153"이었다. 이 볼펜을 한 타스를 사서 열심히 공부하는 날은 한 자루를 다 쓸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하지만 "153"의 가장 큰 약점은 흔히 "똥"이라 불리는 잉크 찌꺼기였다. 나 역시 아름답게 쓰여 있는 내 수학 공식이 "똥"이 묻어나서 망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153"과의 동거는 머지않아 끝이 났다. 그 뒤로는 주로 중성펜을 사용했다. 오래전 막 출시되기 시작했던 중성펜은 시간을 거듭할수록 국내 제품들도 많아져서 국내제품들을 사서 하루에 한 자루씩 다 쓰는 것을 목표로 공부를 했다. 하지만 중성펜은 모나미 볼펜보다 쉽게 끝을 드러내서 어떤 날은 두 자루 쨉의 볼펜을 쓰던 날도 자주 있었다.
나는 수학적인 머리가 뛰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무조건 하루에 한 권의 연습장을 다 쓰고 나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그렇지 못한 날이면 다음 날 채우지 못했던 양을 채우고 새 노트까지 다 써버려야 마음이 편했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있는 절대량으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그 바탕을 철저하게 증명해 주는 것은 다 쓴 볼펜의 개수와 연습장의 노트 수, 그리고 내가 한 해 풀었던 수학 문제지의 수였다.
한 해에 수십 권의 수학 문제지를 풀고 또 풀면서 나는 조금씩 수학에 눈을 떴다.
나는 지금도 공부를 하고 있는 입장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집중이 잘 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집중력도 떨어진다고 누가 했던가. 나는 최근 그 말이 틀리다는 것을 보여주려 노력을 하고 있는데 잘 되지가 않는다. 반면, 나의 볼펜과 연습장은 예전보다 훨씬 좋아졌다.
몇 년 전부터였는지 늘 최고의 자리를 잡고 있는 일본 모 사의 제트 xxx볼펜과 펜텔의 모 펜들은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잡았던 모나미의 "153"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필기감이다. 이 펜들과 깨끗한 종이는 공부의 능률을 올려야 마땅하건만, 나는 최근 매일 종종 빙빙 돌다가 하루가 마무리된다.
아무리 봐도 익숙하지 않은 약명과 전염병들을 외우다가 보면 수학을 풀던 그때의 내가 떠오르지만, 왜 지금은 등에 꼿꼿이 베이던 그날의 열정이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오늘, 나는 종일 내 방 안을 배회했다. 불안함과 함께 알 수 없는 부족함은 내가 방을 배회하는데 일조를 했다. 나는 노력형의 인간인데, 그 노력이 사라져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앞으로 남은 시험을 제외하고도 인생 곧곧에 시험이 숨어있을 터인데, 벌써 모든 의지가 꺾여버린 것은 아닌지.
아무리 좋은 볼펜도, 아무리 좋은 종이도 끝내는 공부에 절대적이 도움은 되지 않는구나. 조금은 거칠었고, 조금은 불편했던 필기구로도 매일을 열심히 달릴 수 있었던 것은 무엇 인기를 이뤄내야만 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구나.
모나미 153 볼펜과 책상의 한쪽 위에 접어 놓았던 잉크 찌꺼기 제거용 네모난 휴지 조각, 그리고 한 줄씩 채워지던 수학 공식과 등에 꼿꼿하게 베던 땀. 그 모든 지금보다 더 어렵고 힘들고 아팠던 시절의 내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오늘 밤, 책상 서랍 한쪽 켠에 자리 작고 있는 모나미 볼펜의 검정 머리를 눌러봐야겠다.
녀석이 다시 내게 어떤 마법을 부려 주기를 원하면서...
2023-08-27
이미지: 구글
Written By HAR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