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미술이야기> 6권, 북유럽 르네상스와 플랑드르 이야기를 읽고
부족한 부분과 아쉬운 부분이 많지만, 어른이 된 후 가장 갈증을 느낀 부분은 미술이다. 명작이나 명화를 봐도 뭐가 뭔지 하나도 몰랐기 때문이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좋아하면서도 다녀온 후에는 허망함을 느낀 적도 많다. 이론적으로도 그렇고, 감성적으로도 충만함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몇 작품을 제외하곤 다시 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서 미술과 아무런 직업적인 연이 없음에도 ‘난처한(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시리즈를 집어 들었다. 최근에 나온 6권까지 감탄하며 읽었다.
무엇보다 어렵지 않다. 미술을 다룬 책을 10권 이상을 봤다. 그러고도 이해하거나 잘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미술 쪽으로는 정말 문외한이 아니라 ‘무뇌한’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르다. 지금까지 읽은 미술 관련 책 중에서 가장 폭넓게 미술이라는 텍스트뿐 아니라 당시의 컨텍스트라 할 수 있는 역사까지 다루는데도 그렇다. 저자 양정무 교수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하다. 만약 내가 스포츠 역사를 이 정도 수준으로 다룰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망상까지 해보기도 했다.
1권부터 6권까지 모두 재미있었으나 최근에 읽은 6권 이야기를 좀 풀어보려 한다. 최근 코로나19로 세상이 전체적으로 뒤집어지고 이전 권력판도에 균열이 일고 있다. 저자는 이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저 시기상으로 상업자본주의가 미술에 큰 영향을 끼친 15세기부터 17세기를 다뤘을 테지만, 각 시대마다 상업자본주의와 미술을 주도했던 도시의 흥망성쇠를 보면 묘하게 지금 이 시즘에도 시사점을 준다. 보통 역사를 길게 보면 흐름이 완만해 보이지만, 시기와 시기를 뜯어보면 급격한 변화도 많다.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우리 삶도 그렇다. 엄청나게 큰 일도 지나고 보면 점 하나에 불과해 보일 때가 있지 않은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 상업자본주의를 이끈 도시는 브뤼헤, 안트베르펜(이상 현재 벨기에. 당시 플랑드르), 암스테르담(네덜란드)이다. 세 도시가 명멸하는 과정은 모두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시대가 던져준 기회를 잘 잡아 번성했다가 그 장점 때문에 쇠락했다. 강점이 약점이 되고, 약함이 강함이 된다고 정리할 수도 있겠다. 자세한 이야기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최근 우리가 겪는 변화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한국 사람들이 약점이라고 생각했던 너무 많은 생각과 의견이 예전에는 ‘난립’이고 평가 절하됐으나 최근에는 ‘역동성’이라고 평가 받는 것과 비슷하다.
세 도시가 모두 속한 플랑드르 지역은 척박하다. 이 지방은 프랑스어로 Pays-Bas(저지대 나라. 현재는 네덜란드를 이렇게 부른다)다. 저지대에 살고 싶은 부자는 없을 것이고, 여기서 살아 남으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다. 그래서 이들은 농경 시대에는 먹고 살기가 어려웠기에 상업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런데 르네상스 이후 상업이 발달하면서 이들이 딛고 산 땅 때문에 해야만 했던 상업 때문에 부를 누릴 수 있었다. 약한 게 강점이 된 것이다.
15세기 가장 번영했던 브뤼헤는 폭풍으로 황금기를 열었다. 브뤼헤는 바다에 닿아 있지만 깊숙하게 들어간 곳에 있다. 즈빈만에 모래가 쌓여 바다로 무역하기가 어려웠는데 1134년 폭풍우가 이 모래를 걷어내면서 상업 활동을 다시 할 수 있었다. 브뤼헤가 얼마나 번성했는지 보여주는 단어도 있다. 브뤼헤에 상업이 발달하자 여관업(당시에는 은행업도 겸했다)이 발달했다. 가장 유명한 여관 이름이 테르 뷔르제(Ter Buerse)였다. 여기에 최초로 금융가가 생기면서 증권, 선물거래가 이뤄졌고 뷔르제 이름을 따서 증권거래소라는 단어가 생겼다. 프랑스어 bourse, 독일어 borse.
이런 브뤼헤는 1500년경부터 다시 즈빈만에 모래가 쌓이면서 성장이 갑자기 멈춰버렸다. 지금 브뤼헤는 ‘북유럽의 베네치아’라고 불릴 정도로 예쁜 관광도시로 이름 높은데, 그게 16세기 모습이라고 한다. 그 당시에는 런던과 비슷한 규모의 도시였으나 발전하지 못해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게 된 것이다. 브뤼헤는 발전하지 못했기에 지금은 관광업으로 번영하고 있다. 이번에는 다시 약점이 강점이 됐다고 할 수 있다.
만화 ‘플란다스의 개’ 배경인 안트베르펜은 브뤼헤가 뱃길이 막혀 쇠락하고 천연자원의 중요성이 높아지면서 16세기 최대 상업 도시로 떠오른다. 플란다스의 개 주인공 네로가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했던 루벤스의 대작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는 성모 마리아 성당에 있다. 안트베르펜은 브뤼헤보다 더 크게 성장했고, ‘세계 시장’이 처음으로 형성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르투갈 상인이 내려 놓은 향신료와 신대륙에서 들어오는 은이 안트베르펜에 가장 처음으로 도착한다. 그런데 이런 안트베르펜은 예기치 않은 일로 멸망한다. 1576년, 네덜란드 독립전쟁에서 임금을 받지 못한 에스파냐-합스부르크 용병부대가 안트베르펜을 파괴하다시피 약탈하며 빛을 완전히 잃었다.
안트베르펜이 몰락하자 이번에는 암스테르담이 부상했다. 억압적인 카톨릭을 피해 온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암스테르담에 자리를 잡으면서 화학작용까지 일으켰다. ‘평화가 있는 것에 신이 있다’는 네덜란드 속담이 그들의 개방성을 잘 이야기해준다. 암스테르담은 1578년 알테라치(대변혁)을 천명하고 도시를 네 단계에 걸쳐서 팽창시킨다.
이런 과정을 읽으면서 역사라는 게 긴 안목으로 보면 평화롭게 흐르는 것 같아도 자세히 보면 수많은 굴곡이 있다는 걸 느낀다. 게다가 바뀌지 않는 ‘강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깊숙하게 다가온다. 브뤼헤와 안트베르펜에게 강력함을 주었던 요소들이 나중에는 가장 아픈 부분으로 다가왔다. 반대로 플랑드르를 괴롭혔던 척박한 환경은 상업 발달이라는 선물이 됐다.
2020년 5월, 이 격변이 우리를 데려다 줄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사회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고, 예전에 번영을 가져다 줬던 ‘장점’이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일도 모르는 우리가 미래를 완벽하게 준비할 수는 없다. 다만 변화가 왔을 때 그 변화를 인정하고 대처하는 것만으로도 문을 더 넓게 열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