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미소에서 국제고무 그리고 국제상사. 한 시대를 풍미한 프로스펙스 이야기
1970~80년대 생들의 로망 프로스펙스
1970~80년대생들은 서로의 운동화 메이커를 몰래 훔쳐봤다. 1980년대 이후부터 나이키와 아디다스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이키와 아디다스만 있었던 건 아니다. 한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브랜드가 있었다. 바로 프로스펙스다.
프로스펙스는 프로페셔널을 뜻하는 단어에서 professional에서 pro를 사양을 뜻하는 specification에서 스펙스를 따와서 만든 조어다. 뜻은 프로의 자격, 프로의 사양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다. 그만큼 고사양 제품이었고 가격도 매우 높았다.
최순호의 이탈리아전 골, 메이드 인 프로스펙스
2021년 현재는 이동국이 광고했던 브랜드, 김연아 워킹화를 만든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프로스펙스는 축구화도 아주 잘 만들었다. 1980년대는 프로스펙스 축구화 전성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다. 년 10월 효창구장 인도잔디 포설(설치) 기념으로 아르헨티나 청소년 대표팀과 브라질 클럽 플라멩구가 와서 청소년 대표와 친선경기를 했는데, 당시 한국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이 프로스펙스 인조 잔디용 축구화를 신고 뛰었던 게 시작이다.
이 축구화를 대표하는 인물은 최순호다. 최순호는 1986 멕시코 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은 물론이고 본선에서도 프로스펙스 축구화를 신었다. 이탈리아와 조별리그 경기에서 통렬한 중거리슛을 터뜨릴 때도 이 신발을 신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도 박경훈, 최순호, 황선홍이 이 신발을 신었다. 최순호가 밀어준 황보관의 캐논슛도 50% made in 프로스펙스다. 다만 이후로 축구화 개발에 힘쓰지 않으면서 인기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멕시코 월드컵 유니폼은 삼성물산 계열에서 만든 위크앤드라는 브랜드였는데, 1985년 5월 이후로 착용했다. 월간축구 표지에 나온 변병주와 김주성의 앳된 얼굴을 보시라! 그런데 최순호와 많은 선수들이 멕시코 월드컵에서 프로스펙스를 신었던 비사가 있다. 어제 직접 최순호 포항 단장에게 이야기를 들었다.
“사연이 있다. 우리가 85년도 월드컵 예선을 할 때부터 신었는데, 당시 프로스펙스에 신문선 위원이 있었다. 축구 선배가 애용을 해달라고 했고, 품질도 괜찮아서 쭉 애용했다. 당시에 나이키는 축구 시장에 처음 들어와서 품질이 그다지 좋지 않았고, 당시에는 프로스펙스가 개발 노력을 많이 했다. 국산 브랜드가 발전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우리가 월드컵 본선에 가니까 아디다스에서 팀 전체를 대상으로 지원 제안을 했다. 축구화를 2족씩 줄테니까 신어 달라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 것은 개인이 결정할 일이라며 거절했던 것 같다. 결국 멕시코 월드컵과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모두 프로스펙스를 신었다.”
어데라고? 부산에서 왔다카이!
1970년대 중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에 태어난 분들은 한국 산업화 과정을 배우면서 ‘섬합신’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거다. 부산 등 남부지방에서 섬유, 합판, 신발 등 노동집약적인 산업이 흥했다는 것이다. 부산은 ‘한국 신발의 메카’로 불린다. 다음에 길게 한 번 이야기하겠지만, 나이키 창업주 필 나이트도 1974년에 부산을 직접 방문해 신발 3천 켤레를 주문하기도 했다. 당시 아시아 최대 신발 도시였던 고베와 가까웠던 이유도 있다. 고베에는 아식스가 있다! 그리고 재일교포들의 삶이 있다. 고베시 나가타구에서 신발공장 많이 했다.
프로스펙스도 부산을 기반으로 한다. 1947년 정미소를 경영하던 양태진 사장과 아들 양정모 상무가 고무신 제조회사 국제고무(국제화학)를 만들었던 게 시작이다. 이때 국제고무가 만든 고무신 상표는 ‘왕자표(왕의 아들이 아니라, 고무신의 왕)’였다. 옛날 신문보면 왕자표 고무신 광고가 있다. 코리안 왕자표가 나중에 프로스펙스가 됐다고 말할 수 있다.
말표(태화고무)
기차표(동양고무) – 1975년 ‘월드컵’ 1986년 ‘르까프’ 1989년 화승으로 이름 바꾸고 리복과 합작. 화승은 이후로 르까프라는 자체 브랜드 만들었다.
삼화고무(범표)- 일본고무와 기술 제휴를 맡아 나이키 생산(1970년부터, 독점 계약하다 나중에 물량이 많아 독점권 포기) 그리고 타이거(덕선이 신발) 만들었다.
1992년 도산 대양고무공업은 1985년 슈퍼카미트 상표를 등록
이후 신발도 만들기 시작했고, 1972년에 부산 사상에 세계 최대 규모의 신발 공장을 지었다. 1976년에는 국제상사로 사명을 바꿨다. 국제상사는 1970년대 수출 10억불을 달성하기도 했다. 프로스펙스를 만든건 1981년이다. 당시는 국내 내수시장이 개방되면서 나이키와 아디다스 같은 브랜드가 막 들어오던 때다. 품질로는 이미 전 세계에서 좋은 평가(미국 내 6대 스포츠화 선정)를 받았던 국제상사 신발은 프로스펙스를 만들면서 빛을 발했다. 프로스펙스 세대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1962년에 주문자 생산 방식으로 농구화를 국내 최초로 일본에 수출하였다. 1981년에 자체 브랜드 PRO-SPECS를 개발하여, 미국 내 6대 스포츠화로 선정되었고, 미국 씨어즈 사에 5000만 족을 수출하였다. 197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하였고, 국내에서 네 번째로 종합 무역 상사로 지정받아 절정기를 맞았다. 1977년 2월 연합철강과 연합물산, 연합개발, 연합통운을 인수하여 그룹으로 성장하였다. 신발 산업으로 출발하여 22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제계 7위의 그룹으로 성장했다.
근데 너무 비싸서 ‘서민에게 부담되는 고가의 신발’이라는 질타도 받았다(필자도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래서 이 회사에서는 프로스펙스와 함께 보급형인 스펙스, 아동화 브랜드 아티스를 신었다. 아티스는 필자도 신었다. 그 시절 어린이라면 거의 신었을 거다. 사진 보면 다들 고개 끄덕일 것. 그리고 연세대 선수들이 즐겨 신던 농구화 헬리우스도 선풍적인 인기! 얼마전에 복각판 펀딩도 했다.
거짓말 같은 그룹 해체와 부활
국제그룹은 1980년대 중반 재계 7위까지 올랐지만, 전두환 정권 시기인 1985년 강제 해체된다. 당시엔 일해재단에 기부(정치헌금)을 내지 않아서 갑자기 그룹히 해체됐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물론 나중엔 기업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반론도 있긴 한다. 그룹이 해체되고 프로스펙스는 한일합섬(배구팀 기억하시나?)로 넘어갔고, 1986아시안게임과 1988서울올림픽 공식 후원사가 되며 전성기를 누렸다.
1998년 금융위기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가 2007년 LS그룹이 인수하면서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지금도 만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프로스펠스는 “걷기는 달리가와 다르다”라며 워킹화를 출시해서 인기를 끌었다. 김연아 워킹화는 100만 족이 넘게 팔렸다고 한다.
프로스펙스는 레트로 전략으로 재미를 보고 있다. 2020년, 로고를 다시 누운 F(학이 날아가는 모양이라고 한다)로 바꾸고 1020세대를 겨냥해 마케팅을 시작했다. 88서울 올림픽 복싱 금메달리스트 김광선 선수와 배우 성훈이 나와서 “잘됐으면 좋겠어, 대한민국 오리지널” 광고를 만들어 아재와 젊은 세대 모두의 관심을 잡았다.
1949년 태어난 왕자표 고무신은 2021년에도 프로스펙스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요즘 모두 어려운데, 이 광고 문구처럼 모두 잘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