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키 사장이 보따리 매고 부산에 온 이유
가끔 농담이 엄청난 인사이트를 보여줄 때가 있다.
예전에 고무신을 가리켜서 ‘조선 나이키’라고 말하는 거 들은적 있지 않나? 나도 그때 표현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해봤다. 그래서 뭔가 연결되는 것 같아서 찾아보니 정말 조선 나이키가 고무신과 연결이 되더라.
나이키 창업주인 필 나이트가 보따리상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나. 그리고 부산이 신발 기술로는 세계 최고라고 말하지 않았나. 필 나이트는 아식스의 전신인 오니츠카 타이거를 떼다 미국에다 팔면서 일을 시작했다. 당시 회사 이름은 블루리본 스포츠였다.
당시 아디다스가 너무 비쌌고, 아식스도 품질이 나쁘지 않아서 장사가 좀 됐다. 그러니까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나? 아 내가 직접 신발 만들어 팔아볼까? 나이키는 1971년 상호를 나이키로 바꾸면서 지금은 너무 유명한 스우시를 공개한다. 일본 고베와 기술은 비슷하지만 좀 더 가격이 싼 곳은 어디일까? 바로 부산으로 찾아온다.
“필 나이트가 1974년 부산의 삼화고무를 찾아와1974년 부산의 삼화고무를 직접 찾아와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방식 첫 계약(3000켤레)을 맺었다”며 “당시 나이키는 저가 일본 러닝화를 미국으로 수입해 팔았다”라는 국내 증언이 실제로 있다.
삼화고무와 나이키가 관련이 있는 건 알겠는데, 고무신은 언제 나오냐고? 삼화고무는 일제시대부터 신발(그러니까 고무신)을 만들다가 1958년부터는살짝 자동차 타이어를 만들었다가 1965년 신발을 다시 만들며 히트를 쳤다. 일본 니폰고무와 기술 제휴를 맺고 만화 슈즈를 만들면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나이키도 그래서 삼화고무로 온 것이다. 리복도 온다.
삼화고무는 범표 고무신을 만들었는데, 이게 타이거 운동화가 된다. 이 타이거 신발은 덕선이 신발로도 유명하다. 다만 삼화는 직원 1만명, 수출실적1,2위를 다퉜으나 1992년 자신들이 만들던 나이키와 아디다스에 밀려서… 폐업했다. 이는 한국 신발산업 운명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너무 고무신 이야기만 하기 그러니까 나이키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필 나이트는 러닝화를 만들면서 세계 최고 기업이 되는 길에 들어선다. 아디다스와경쟁할 수 있었던 것도 나이트가 러닝을 잘 아는 선수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러닝은 운동이 아니라는 시대 분위기를 거슬러 러닝화를 만들어냈다. 지금까지도 나이키 하면 떠오르는 ‘와플창’을 단 ‘코르테즈’도 이 시기에 나왔다.
나이키가 육상과 농구(마이클 조던)을 거쳐서 축구계에 확실한 도전장을 낸 것은 1994 미국월드컵부터다. 미국월드컵에서 나이키 축구화를 신은 선수는 단 8명이었다. 지금은 축구화 하면 나이키가 떠오르지만, 사실 나이키는 엄청난 후발 주자다. 그런데 나이키는 축구 시장에도 파격적으로 도전장을 던졌다.
농구에 마이클 조던이 있었다면 축구엔 에릭 칸토나가 있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 7번, 프랑스 대표팀 그리고 쿵푸킥으로 뇌리에 남은 선수다.
바바라 슈미트가 쓴 <축구화 전쟁>에 나온 이야기는 기억할만하다. 칸토나는 광고에 출연해 “저는 골키퍼를 때려서 출전정지를 당했습니다. 저는 징계처분을 내릴 상벌위원들을 백치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스폰서 구하기는 틀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며 웃었다. 정말 지금 들어도 파격적인 메시지다.
나이키는 이후에도 악마와 축구하는 광고, 그리고 여전히 회자되는 브라질 대표팀의 공항 광고를 연달아 내면서 당시 시장을 흔들었다. 당시 나이키가 밀었던 광고 문구가 조가 보니뚜(Joga bonito)였는데, 최근에 다시 밀더라. 그만큼 당시 나이키 축구 광고가 준 파급력은 대단했다고 생각한다.
1998프랑스월드컵에는 호나우두가 머큐리얼 2.1(머큐리얼 베이퍼 전신)을 신고 그라운드를 누볐고, 이 신발의 자손을 킬리앙 음바페가 착용하고 있다.
나이키는 지금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는 생각이 드는 3사일로(3 silo) 전략도 선제적으로 시도했다. 축구화 기능을 세 가지로 세분화 하면서 축구화 라인을 나눈 것이다. 스피드를 강조한 머큐리얼 라인, 패스와 슈팅의 정확성을 위한 토탈90 라인, 전통적인 축구화에 가장 가까운 ‘터치’를 강조한 티엠포 라인이다.
나이키는 이제 스포츠 브랜드를 넘어 문화가 됐다. 여기에 부산도 한몫했다. 조선 나이키는 이제 월드 베스트가 됐다.
덧) 부산 신발산업이 흥할 때는 부산 신발아가씨도 선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