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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블루 Feb 22. 2020

대담한 르네상스와 <더 보르지아스>

시오노 나나미 <르네상스의 여인들>과 미드 <더 보르지아스>를 보고 

시오노 나나미는 내게 선글라스다. 로마인 이이기를 잃지 않았다. ‘로마제국을 옹호하며 결국에는 일본 군국주의를 긍정한다’는 평가를 읽었던 것 같다. 그래도 쉬이 넘기기에는 너무 큰 이름이라 저자의 가장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다는 첫 저작을 찾았다. 헌책방에서 누렇게 뜬 ‘르네상스의 여인들’을 집어 들었다. 처음에는 속도가 이운재 수준이었지만, 어느 순간(미드 ‘The Borgias’와 만난 후)에 엄청난 가속도를 냈다. 


르네상스, 라는 멋진 단어는 감미롭게 들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인생이 그러하듯 르네상스도 속을 들여다보면 비단 같지는 않다. 르네상스는 유럽이 암흑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된 변화의 시기로서 역사에 명함을 들이밀 수 있다. 르네상스 전까지 유럽보다 훨씬 더 나은 문명을 지녔던 아랍(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모두 아우르기 위해)인들의 눈으로 바라본 유럽은 야만 그 자체였다. 일례로 누가 옳은지 가리기 위해서 죽음의 결투가 횡행하던 동네였다. 

여전히 여성 권리와 평등이 화제가 되는 2020년이다. 르네상스에는 더했다. 나나미가 4명의 여인들을 선택한 이유는 이들이 변화의 씨앗을 품었거나 시대상을 너무나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이사벨라 데스테와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전자이고,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와 카테리나 코르나로는 후자다. 앞선 두 여인은 정치력과 군사력으로 남성들을 압도했고, 다른 두 여인은 르네상스라는 권모술수의 시기를 체감해야만 했다. 사실 모두다 한계가 있었다고 해야 맞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와 카테리나 코르나로의 결혼사 그리고 이사벨라 데스테와 카테리나 스포르차의 ‘전투’를 지켜보면, 르네상스의 역동성 혹은 대담함을 느낄 수 있다. 나나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오체는 비좁은 정신주의의 껍데기 속에 틀어박히지 않은 대담한 영혼과 냉철한 합리적 정신에 있다. 여기에 입각한 정신과 육체의 감각적이고 관능적인 조화. 이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신을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라고 외친 바 있다. 

<더 보로지아스>가 그린 루크레치아 보르지아(가운데 오른쪽)

교황의 딸(이른바 사생아)로 태어난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더 보르지아스’에서 교황역을 맡은 제레미 아이언스가 심심하면 한 번씩 외치듯 “가족을 위해!” 3번이나 결혼해야 했다. 엄마 그리고 아버지의 정부와 함께 거의 모든 생을 바티칸에서 지냈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는 결국 가족의 몰락과 함께 죽음을 맡는다. 베네치아의 규소로 키프로스의 왕비로 화려하게 등극했던 카테리나 코르나로는 결국 조국의 서늘함에 쓸쓸한 인생을 보내야 했다.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오빠이자 당시 최대의 실력자 체사레 보르지아(마키아벨리 ‘군주론’의 모델)와 겨루기도 했고, 남편의 암살범들과도 혈투를 벌였다. 자신의 아이들을 인질로 잡은 배신자들에게 자신의 성기를 보이며 “이것만 있으면 자식이야 10명이라도 더 낳을 수 있다”라고 외쳤던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이탈리아의 여걸’을 넘어 ‘르네상스의 여걸’이라 불려도 될만했다. 


나나미가 공백을 메운 르네상스의 속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역사라는 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말랑말랑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나나미의 표현대로 흔히 계략이라고 부르는 ‘능력’이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이렇게 온몸으로 변화를 살아낸, 이끌어낸 이들이 다리가 돼 주었기에 우리가 ‘이성’과 ‘상식’을 운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물론 가끔 책을 읽다가 여전히 권모와 술수가 능력으로 통용되는 르네상스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2020년에도 말이다.


배다른 남동생에게 키프로스 왕위를 빼앗긴 샤를로트 여왕의 호소에 대한 베네치아 모체니고 제독의 답장은 지금도 유효한 게 아닐까? “나라는 법으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칼과 역량으로 획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당신처럼 현명하신 분이 모르고 있다니 참으로 의아한 일이군요. 자크 왕은 키프로스를 칼과 역량으로 빼앗았습니다. 그런 자크 왕이 왕위를 카테리나 왕바가 앞으로 낳을 아이에게 남겼으니, 당신과 왕비 가운데 누가 키프로스에 대한 권리를 갖는 것이 옳은지는 자명한 일일 것입니다.”

<르네상스 여인들>과 <더 보르지아스>는 함께 보면 더 즐겁다. 역사물을 좋아하는 사람은 언젠까 꼭 보길 권한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로 나오는 제레미 아이언스 연기만 봐도 즐겁다. <미션>에서 신만 바라보는 수도사가 이런 탐욕스러운 성직자를 연기할 수 있다니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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