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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블루 Feb 22. 2020

길의 지문, 길의 노래

<차마고도>를 읽고

프랑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여주인공 에스메랄다는 자신을 ‘길의 딸(혹은 길의 여자)’이라 부른다. 길은 그 자체가 서사의 공간이다. 온땅이 아스팔트 길로 뒤덮여가는 2020년 한국을 사는 우리에게는 먼 말이지만. 차가 밀려서 이쪽저쪽으로 뚫는 게 길이 아니다. 길은 떠나는 그 순간 무언가가 시작되는 공간이다. 누군가 길을 나서는 동시에 하나의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도중에 많은 이들의 사연이 널려 있다. 


명작이라는 다큐멘터리 ‘차마고도’를 보지 못했다. 책으로 먼저 접했다. 지루하리라 예상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천상의 길, 5000km를 가다’라는 표현이 맘에 들었다. ‘차마고도’는 꾸불꾸불하고 자주 끊어질듯했지만 지루할 틈은 없었다. 다큐멘터리를 만든 이들의 진정성이 차마고도를 위태롭게 오고 가는 이들의 진정성을 불러냈다. 이 길이 아름답다는 데 동의했다. 


히말라야 고봉을 내려다보기 위해 길을 낸 게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 떠난 길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상단을 꾸리고, 얼마 되지 않는 농작물과 면직물을 들고 소금을 얻기 위해 온가족이 나섰다. 말이 아닌 노새를 끌고, 수레를 끌면서 길이라기보다는 벼랑에 가까운 길을 조금씩 개척해갔다. 이들이 험한 산에 낸 길을 비행기로 내려다보는 우리는 탄성을 지르지만, 이 길은 표현 그대로 피와 땀 그리고 눈물에 다른 이름이다. 


길을 떠나는 이들은 불평하지 않는다. 왜 보기만해도 숨이 막히는 산 사이에 태어났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물론 산을 정복하겠다는 야망도 없다. 산을 넘어야 살 수 있기 때문에 한발한발 걸었고, 산에 길을 냈다. 한 걸음은 보잘것없지만 이어진 수많은 발걸음은 산에 선명한 줄기를 남겼다. 없었던 길이 태어났고, 존재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꿈틀댔다. 과장이 없는 담백함이 길 전체에 깔려 있다. 그래서 조금 슬프다. 

길의 끝 혹은 중간에 위치한 마을도 마찬가지다. 소금호수에서 물을 길어 소금을 만드는 옌징의 아낙네들도 “다시는 이런 무거운 소금물을 긷지 않게 해주세요”라는 노래를 부르면서도 일을 멈추지 않는다. 삶은 어떻게든 살아내는 게 중요하다고 몸으로 말하고 있다. 이들의 고된 노동으로 히말라야 인근의 사람들은 목숨을 부지한다. 여기서 태어난 소금은 다시 차마고도를 타고 이곳 저곳으로 향한다. 


길을 따라가면 슬픈 역사를 만난다. 길이 뚫리면 무언가 오고 가고, 양쪽의 사정도 변한다. 중국은 그 길을 따라 차를 보냈고, 티베트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티베트 귀족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결국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통해 중국은 티베트를 지배하고, 흡수할 수 있었다. 달라이라마는 이길 저편에서 몰려온 중국인들에 쫓겨 인도로 가는 험한 길을 탈 수밖에 없었다. 티베트 사람들에게 이 길은 원통한 길이다. 


분함은 있어도 길은 끊어지지 않는다. 티베트인들은 여전히 이 길을 따라 수도 라싸로 들어온다. 성불하기 위해 오체투지로 걷기도 힘든 길을 온몸으로 여행한다. 한 걸음은 미련하지만, 2200km의 대여정이 끝내는 삼보일배는 세상의 무게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이들은 길이 곧 인생이고, 길을 충실히 걸어가는 게 부처에게 가는 법이라고 말한다. 소리 없이. 아무런 생각 없이 오가는 건 길이 아니라고 웅변한다. 


당연한 게 너무 많다. 신도시가 생기면 길이 나고, 새 아파트가 서면 도로가 뚫리는 시절에 살고 있다. ‘차마고도’를 오가는 이들에 비할 수는 없을지라도, 이들의 영상을 찍으러 나선 이들의 고생도 이만 저만이 아니었을 터다. 이들이 ‘차마고도’와 그 길 위에 사람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인생의 길 위에 아무런 생각 없이 놓여 있는 우리에게 “발 밑을 한 번 내려다 보라”고 말하는 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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