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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블루 Feb 26. 2020

학교에서 폐기한 공부, 캐서 남 주자

고미숙 선생이 쓴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를 읽고

고미숙 씨 책은 와인 같은 존재다. 매력적이며 읽고 싶은데 실제로 많이 접해보지는 않았다. 오래전에 김환이 생일 선물로 준 해피머니로 교보문고에 들러 이 양반의 <공부의 달인 호모쿵푸스>를 구입해 읽었던 것 같다. 내용은 가볍지 않아도 먹음직한 내용이라 끝까지 보는데 많은 시간이 들지 않았다. 구멍난 집중력으로 살아가고 있음에도. 혹자는 이 양반의 문체가 조금은 고압적이고 훈계조라고 평하는데, 그런 느낌은 받지 못했다. 문제를 지적하고 길을 펼치는 글임을 고려하면 별다른 무리가 없었다.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면,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난 인물과 말은 우리 아버지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공을 책보다 더 아끼며 살아온 나다. 그런 내가 가끔 책을 보고 있으면 어김 없이 날아오던 이야기가 있다. "공부라하니까 왜 책보고 있어." 어린 마음에 책읽는 게 공부아니냐고 항변하면 "공부와 책 읽는 것은 다르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 책인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 경험은 나만 겪은 게 아니리라. 


저자는 공부와 책의 분리는 학교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배움의 권리를 독점한 학교가 공부하는 책인 교과서와 다른 책들을 구분지으면서 독서가 공부에서 멀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교과서 혹은 전공서적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면 책과 아예 인연을 맺지 않는다는 것. "공부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도 학교가 퍼뜨린 거짓말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배움은 죽을 때까지 이어져야 하는데, 어른이 돼면 더 많이 배워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책을 중심으로 한 배움을 가까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었다.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계속되는 질문이 필요한데, 우리는 질문을 잃었다. 이 지점부터 공부는 사치가 되고, 질문은 금기가 된다.  

평범하게 초등학교부터 대학을 거쳐 취직해 마흔에 다다른 보통 남성인 나는 이 양반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나이를 먹어도 세상이 대부분은 미지로 남겨져 있는데, 무엇을 따라 걸어야 할까? 넘치는 처세서와 자기 계발서로는 갈증이 한국의 학교는 이미 공부를 버린 게, 아니 폐기한 지 오래라는 생각이 든다. 창의적인 생각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대, 나는 밑천이 없다. 창의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새롭게 엮고 뒤집어서 만들어 내는 일이다. 배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저자는 배우는 방법을 제시한다. 사회적인 구조를 혼자 돌파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어깨동무를 하면 상대적으로 쉬워진다. 꼭 같은 질문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도 함께 공부하고 독려하면 더 멀리 높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함께 하면 모든 게 쉽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는 진리다. 공부도 함께 하면 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리고 저자는 공부가 세대간의 벽도 허물어준다고 했다. 어린이와 노인이 함께 할 수 있는 건 밥 먹는 일만이 아니다. 공부도 할 수 있다. 공부를 하면 가까워지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100% 동의한다. 


같이 공부를 하면 인적 네트워크가 구성된다는 게 이 양반의 논리다.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가 생기면 공부 그리고 삶이 좀 더 윤택해진다고. 이 양반은 그 예로 자신이 니체 전문가인 고병권 씨와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기에 그의 머리를 '공짜'로 빌려쓸 수 있다고 했다. 나도 이런 경험이 있다. 무언가에 막힐 때 주위에 있는 전문가들에게 전화를 하면 막힌 게 한 번에 뚫리곤 했었다. 각자 다른 관심을 가진 이들이 공부를 이어가면 이런 일들은 더 쉬워질 게 분명하다. 


저자는 공부로 들어서는 길에 고전을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고전은 여러 세대에 걸쳐 뛰어난 이들이 적어 놓은 인생의 비밀 같은 거라고. 개인으로는 세상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먼저 걸은 이들의 정수가 들어 있는 고전을 보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 실제로 저자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고 인생이 변했다. '사우' 스승이면서 친구인 이는 꼭 지금 살아 숨쉬는 이가 아니어도 된다. 고전을 읽으면서 앎을 넓히고, 사우를 찾는 건 멋진 일 임에 분명하다. 


공부를 했으면 쓰라, 는 게 저자의 주문이다. 공부의 최종 단계는 글쓰기라고 한다. 그저 받아 들이는 일로는 완벽한 공부가 되지 않는 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 건 그저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거기에 서 있다. 얼마 읽지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쓰지 않는 것이다. 결국 공부가 누구의 말을 듣는 게 아니라 나의 삶을 발전시키는 거라면, 결국 소화해 내야한다. 글쓰기는 소화의 증거다. 완전 연소가 아니더라도 쓰고 또 써야 하는 이유다. 


저자는 앎은 변화를 불러온다고 한다. 머리 속이 변하면 몸도 변한다고. 공감한다. 책에서 시작한 공부는 내 몸에 대한 관심, 앎으로 옮아가고 결국에는 내 몸을 만드는 음식으로 흐른다. "네가 만나는 사람이 바로 너"라는 말보다 "네가 먹는 음식이 바로 너"라는 말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생각도 몸에서 시작하고, 모든 주체가 몸인데 몸을 생각하지 않는 세태를 개인적으로는 가장 문제라고 생각한다. 음식과 몸에 관심을 쏟으면 분명히 삶과 운명이 달라진다고 믿는다.  


공부는 나를 변화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배워서 남주냐?"라고 하지만, 유태인들은 "배워서 남줘라"라고 말한다고. 고여 있는 물은 썪고, 나만 가진 것은 의미가 없다. 지식도 흘려주고, 이식 받아야 한다. 그렇게 서로 스승과 제자 더 나아가서는 사우가 된다면 세상은 더 밝아질 것이다. <희망의 인문학>을 쓴 얼 쇼리스는 미국 극빈층, 부랑자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 변화를 이끌어 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문제는 "억압이 아니라 소외"라는 저자의 말을 지지한다. 진정한 공부는 나와 주위 사람들을 소외에서 벗어나게 할 수도 있다. 


익숙한 회사와 그 회사가 지켜주던 상대적으로 안온한 사회 속에서 나오지 공부가 더 절실하다. 다만 그 공부가 나 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까지 소외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있는 여행전문 서점 알타이르(Alt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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